능성 구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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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 구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4명, 무과 급제자 105명, 생원·진사 170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024_130_0023}}</ref> 파별로 보면 도원수파 3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2명, 공신 9명, 부마(駙馬) 3명을 배출하였다. 무과 출신 가운데에서는 영조 때까지 장신급(將臣級: 종2품)이 9명이나 나왔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비율이다.
 
== 기원 ==
능성 구씨의 시조 구존유가 [[1224년]] 주잠과 함께 중국에서 도래하였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으나, 중국에 있는 신안 주씨의 기록에 [[구존유]]는 고려인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1224년]] 이전부터 [[호남]] 지방에 토착 구(具)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백제|백제]]가 멸망한 뒤 나주(羅州)에서 포로로 잡힌 [[후백제|백제]] 장군 구도(具道)의 아들 구단서(具端舒)가 있고,<ref>[http://db.history.go.kr/id/kr_092r_0010_0110 《고려사》 권92 열전 권제5]</ref> 궁예의 태봉국 시중(侍中)이었던 [[구진 (고려)|구진]](具鎭)이 918년(태조 1) 나주도(羅州道) 대행대(大行臺)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ref>[http://db.history.go.kr/id/kr_001r_0020_0040_0030 《고려사》 세가 권제1 태조(太祖) 원년 9월]</ref> 1101년(고려 숙종 6년)에 탁라(乇羅) 성주(星主)인 배융부위(陪戎副尉) 구대(具代)가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ref>[http://db.history.go.kr/id/kr_011r_0080_0100_0020 《고려사》 세가 권제11 숙종(肅宗) 6년 10월]</ref>
 
구씨(具氏)가 예로부터 나주(羅州)나 능성(綾城) 지역의 토착 성씨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에도 구씨(具氏)를 능성현(綾城縣)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대종회에서는 역사서를 근거로 중국 도래설을 반박하고 능성 구씨가 토착 성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ref>[http://www.neungsungkoo.com/htmls/bo/bo8-11.htm 능성구씨 시조(始祖) 존유(存裕)공의 상세(上世)에 대하여]</ref> 첫째, 고려 이전에도 [[호남]] 지방에 토착 구씨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둘째, 본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역사서에 능성 구씨가 토착 성씨로 기록된 점이다. 셋째, 중국 측 주씨의 기록에는 구존유가 고려인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편찬된 신안 주씨의 족보를 토대로 능성 구씨가 중국계 성씨임을 주장하는 일각의 주장은 역사 사실과 맞지 않다. 넷째, 현재 중국에는 구(具)씨 성을 가진 씨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성 구씨가 중국계 성씨라는 주장은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중국과의 관련성을 부각하고자 했던 시도로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 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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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공파(參判公派): 파조(派祖) 참판(參判) 구성미(具成美)
* 문천군사공파(文川郡事公派): 파조(派祖) 문천군사(文川郡事) 구원립(具爰立)
 
== 기원 ==
능성 구씨의 시조 구존유가 [[1224년]] 주잠과 함께 중국에서 도래하였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으나, 중국에 있는 신안 주씨의 기록에 [[구존유]]는 고려인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1224년]] 이전부터 [[호남]] 지방에 토착 구(具)씨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후백제|백제]]가 멸망한 뒤 나주(羅州)에서 포로로 잡힌 [[후백제|백제]] 장군 구도(具道)의 아들 구단서(具端舒)가 있고,<ref>[http://db.history.go.kr/id/kr_092r_0010_0110 《고려사》 권92 열전 권제5]</ref> 궁예의 태봉국 시중(侍中)이었던 [[구진 (고려)|구진]](具鎭)이 918년(태조 1) 나주도(羅州道) 대행대(大行臺)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ref>[http://db.history.go.kr/id/kr_001r_0020_0040_0030 《고려사》 세가 권제1 태조(太祖) 원년 9월]</ref> 1101년(고려 숙종 6년)에 탁라(乇羅) 성주(星主)인 배융부위(陪戎副尉) 구대(具代)가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ref>[http://db.history.go.kr/id/kr_011r_0080_0100_0020 《고려사》 세가 권제11 숙종(肅宗) 6년 10월]</ref>
 
구씨(具氏)가 예로부터 나주(羅州)나 능성(綾城) 지역의 토착 성씨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에도 구씨(具氏)를 능성현(綾城縣)의 대표적인 토착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대종회에서는 역사서를 근거로 중국 도래설을 반박하고 능성 구씨가 토착 성씨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ref>[http://www.neungsungkoo.com/htmls/bo/bo8-11.htm 능성구씨 시조(始祖) 존유(存裕)공의 상세(上世)에 대하여]</ref> 첫째, 고려 이전에도 [[호남]] 지방에 토착 구씨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둘째, 본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역사서에 능성 구씨가 토착 성씨로 기록된 점이다. 셋째, 중국 측 주씨의 기록에는 구존유가 고려인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에 편찬된 신안 주씨의 족보를 토대로 능성 구씨가 중국계 성씨임을 주장하는 일각의 주장은 역사 사실과 맞지 않다. 넷째, 현재 중국에는 구(具)씨 성을 가진 씨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성 구씨가 중국계 성씨라는 주장은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중국과의 관련성을 부각하고자 했던 시도로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 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