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hsheheeuudisiqoejejd(토론)의 24534917판 편집을 되돌림
719번째 줄:
 
== 평가와 비판 ==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그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극우주의와 진보주의 및 보수주의를 가르는 척도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광주민주화운동 학살자, 군부 독재자라는 혹평에서부터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전두환에 대한 시각이 보수주의 내부에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 군사 반란]], [[5·17 쿠데타]]를 비롯한 불법적인 집권 과정,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과 전두환 대통령이 세운 제5공화국 정권이 민주주의 및 인권 탄압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 인물평 ===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날짜=2003-05-12|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75-0}}|장=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쪽=50}}</ref> [[정승화]]는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ref>정승화(이경식 정리·대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휴먼앤북스, 2002) 404쪽.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며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가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ref>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날짜=2003-05-12|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75-0}}|장=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쪽=49}}</ref>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ref>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조선일보사, 1992) 346쪽.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은 1987년 4월 12일 청와대 본관식당에서 수석 비서관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육여사와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육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ref>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111743155&code=960205 "80년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때 나는 외롭게 감금당해 있었다"] 경향신문 2008년 11월 11일 기사</ref>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전두환을 가리켜 '전두환 역도 또한 미국이 오래전부터 손때묻혀 키운 친미분자'라고 평가했다.<ref name="북조선 평가2">http://www.naenara.rep.kp/ko/news/news_view.php?0+1667{{깨진 링크|url=http://www.naenara.rep.kp/ko/news/news_view.php?0+1667 }}</ref> 전두환 당시 야당인사이자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그가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1280364 박찬종 "전두환, 現국정파탄 책임 이순신 동상앞 석고대죄…"] 동아일보 2006-11-28</ref>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날짜=2003-05-12|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75-0}}|장=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쪽=50}}</ref>
 
[[정승화]]는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ref>정승화(이경식 정리·대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휴먼앤북스, 2002) 404쪽.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며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가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ref>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ref>{{서적 인용 |저자=[[강준만]] |제목=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날짜=2003-05-12|출판사=인물과사상사|출판위치=서울|id={{ISBN|89-88410-75-0}}|장=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쪽=49}}</ref>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ref>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조선일보사, 1992) 346쪽.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은 1987년 4월 12일 청와대 본관식당에서 수석 비서관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육여사와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육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ref>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111743155&code=960205 "80년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때 나는 외롭게 감금당해 있었다"] 경향신문 2008년 11월 11일 기사</ref>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전두환을 가리켜 '전두환 역도 또한 미국이 오래전부터 손때묻혀 키운 친미분자'라고 평가했다.<ref name="북조선 평가2">http://www.naenara.rep.kp/ko/news/news_view.php?0+1667{{깨진 링크|url=http://www.naenara.rep.kp/ko/news/news_view.php?0+1667 }}</ref> 전두환 당시 야당인사이자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그가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1280364 박찬종 "전두환, 現국정파탄 책임 이순신 동상앞 석고대죄…"] 동아일보 2006-11-28</ref>
 
=== 긍정적 평가 ===
* [[1979년]] [[박정희]] 피살 후 경제회생경제회생에 노력을 기울인기울여 점과일명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헌정 사상 최고의 호황을 맞이했다.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 [[1988년 하계 올림픽]](1981년 9월 30일)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15116 '제5공화국', `전두환=29만원?' 홈피에 논란 재연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 [[2009년]] 9월 납북자가족모임과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회원들은 서울 세종로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하며 임진강 참사 사고 이후 전두환이 북한의 수공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평화의 댐]]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2841&CMPT_CD=P0001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 수공계략 간파했다" - 오마이뉴스] 2009년 09월 9일자</ref>
* 자신의 임기기간 동안 [[경제기획원]]이 관치를 펼쳐, 전임 박정희 정권에 비해 임기동안 평균 물가상승률을 6.1%으로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86&aid=0002090065 물가정책 가장 실패한 대통령은 MB] 내일신문 2012년 1월 9일</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122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1-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0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월 22일</ref>
* 과외 과열로 인해 계층간 위화감이 심각해진다고 보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7·30교육개혁조치에 따라 대학졸업정원제와 함께 교육정상화와 과열과외해소라는 이유로 과외금지조치를 실시했다. 학교밖에서의 과외수업은 일체 금지하고 미인가된 교습자와 과외를 한 학부모는 명단을 공개하여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직장인인 경우에는 면직처분을 내렸으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80600209201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8-06&officeId=00020&pageNo=1&printNo=18104&publishType=00020 課外 學父母명단공개·免職] 동아일보 1980년 8월 6일</ref>, 과외를 받은 학생은 적발된 경우 입시자격을 박탈하고 형사입건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8210032921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8-21&officeId=00032&pageNo=11&printNo=11044&publishType=00020 社會淨化委 課外학생 入試資格박탈] 경향신문 1981년 08월 21일</ref>
* 전두환은 대중의 정치적 관심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으로 [[KBO 리그|야구]](1982년 창설)와 [[K리그|축구]](1983년 창설)의 프로리그를 만들었다. 이를 통해 [[1988년 하계 올림픽]]으로만 해당하는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038787 30년만에 밝혀지는 ‘88서울올림픽 유치’ 성공 비화… ‘왕회장’의 꽃다발, 日 물량공세 꺾었다]</ref>
 
=== 부정적 평가 ===
*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이용해, 1979년의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통해 불법적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이다. 5.18 사건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전두환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직무상 관련이 없는 보안사 참모들에게 지시해 입안케 한 다음 이러한 조치를 실행했다.<ref name='범죄사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392 12.12및 5.18 사건관련 全斗煥씨 범죄사실]</ref> 전두환의 집권 과정 중에 행해진 조치들에는 인권 유린, 헌정 파괴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 신군부의 집권 과정과 제5공화국 시절에 언론의 자유가 크게 훼손됐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전두환은 언론인, 언론사를 회유하기 위해 보안사를 통해 [[K공작계획]]을 비롯한 수 차례 언론 공작을 했으며, 대통령 재임 시절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통폐합|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에 관여했다.<ref name='언론장악1'/> 전두환 정부의 문화공보부는 매일 [[보도 지침]]을 편집국에 보내서 여론을 조종했다. 제5공화국 정부는 외국 잡지나 신문을 한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9690 서울 첫 상주특파원 눈에 비친 5.18 광주]</ref>
* [[국가안전기획부]], [[경찰청 대공분실]], [[보안사]] 등을 통해 [[김근태]], [[박종철]], [[권인숙]] 등의 반체제 인사와 학생운동가를 고문하여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는 비판이 있다.
* 전두환 정권 동안 여러차례 권력형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으로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던 이규광의 처제였던 장영자와, 육사 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희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그의 남편인 이철희가 건설업체에 접근하여 현금을 제공하는 대신 그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이를 사채시장에 할인함으로써 거액의 자금을 조성했던 장영자ㆍ이철희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에 발생한 명성그룹사건과 영동진흥개발사건도 대표적인 사례였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1021102501&section=01 '정의사회' 내세웠던 전직 대통령의 파렴치 ]</ref> 새마을본부 중앙회장이었던 동생 [[전경환]]은 공금 76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동생 전순환과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 그리고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 등이 전두환의 재임기간 중 저질러진 친인척의 비리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ref name=autogenerated4>{{웹 인용 |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62080_3835.html |제목=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확인날짜=2009-09-09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513025115/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62080_3835.html |보존날짜=2008-05-13 |깨진링크=예 }}</ref>
*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이승만 21.6%, 박정희 33.1%,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에다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때는 생산소득에 대한 불로소득 비율이 거의 미미한데 비해 이승만 때에 43%, 전두환은 67.9%, 노태우는 거의 100%, 박정희는 무려 248.8%에 달했으며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것과 동시에 제5공화국 시절의 경제 치적은 실제로 경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부동산 거품경제로 인한 착시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004114101&Section= 한국경제 제 3의 길이 가능한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