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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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송병준 (방송인)||대한민국의 방송인, 대중음악 작곡가}}
{{공직자범죄자 정보
|이름 = 송병준
|원래 이름 = 宋秉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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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조선]]에 귀국하였는데, [[1877년]]때 일본인과 같이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였으나, 86년에는 그와 함께한 [[조선]]인 밀정의 밀고에 의해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다시 출옥하였다.
 
이후 흥해군수[[흥해]]군수·양지현감[[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1897년]]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듣고 그는 황제와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임을 포기하고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은신하며,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잠업(蠶業)과 밭 농사, 막노동에 종사하면서 숨어 지냈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보통의 사대부와는 다르게 거친 공사장 인부일을 하였다.
 
==== 을사 조약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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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대한제국 고종|고종]] 황제 양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07년]] [[대한제국 고종|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 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 한일 합방의 배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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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일설에 그가 양반가의 서출이었다고[[서출]]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송병준의 주장일 뿐 실제로 송병준은 민태호의[[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가는 등 고아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의 출생에 의혹이 있으며 성씨 또한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족보나 자료가 없다. 그래서 당대 문벌 명문가중 하나인 은진 송씨 집안에서 식객생활을 하다가 성씨를 사칭하며 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모는 기생 홍씨로 알려졌는데 민태호의 식객 생활을 하면서는 당시에 그의 첩인 홍씨를 어머니로 불렀었으니 그의 출생에 한층 의혹이 가는 부분이다. 또한 그의 사위 중 한 사람인 [[구연수]]는 [[을미사변]] 당시 조선인 고위 협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 어머니: 덕상 홍씨 (기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