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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爆彈과拳銃의大陰謀 金相玉事件의公判|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3051300209203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23-05-13&officeId=00020&pageNo=3&printNo=988&publishType=00020|출판사=동아일보|저자=|날짜=1923-05-13|확인날짜=2012-07-29}}</ref>이며, 이어 [[김시현 (1883년)|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변호하였다.<ref name="han">{{뉴스 인용|제목=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76 항일 변론투쟁 벌인 사법부 독립 상징|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80900289107001&editNo=4&printCount=1&publishDate=1991-08-09&officeId=00028&pageNo=7&printNo=999&publishType=00010|출판사=한겨레|저자=최영선 기자|날짜=1991-08-09|확인날짜=2012-07-29}}</ref>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을 무료 변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면서<ref name="dong">{{뉴스 인용|제목='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한국의 인권변호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17384|출판사=동아일보|저자=유윤종 기자|날짜=2003-12-05|확인날짜=2012-02-21}}</ref>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강점기]]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ref name="dong" />
 
김정은이 뱃살로 신간회 부숨 킼 킼 킼
==== 신간회와 사회 활동 ====
[[파일:신간회 창립.jpg|섬네일|250px|왼쪽|[[신간회]] 창립 모습 (1927년 2월 14일)]]
{{참고|신간회|근우회}}
[[1929년]]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 겸 회계장에 선임되었으며, 자신의 고향이자 곡창지대인 [[전라북도|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분규 등의 사건과 [[갑산화전민항일운동]]의 진상조사<ref>{{뉴스 인용|제목=신간회에서 량일간 - 회의를 열고 화전민사건 토의|url=|출판사=신한민보|저자=|날짜=1929-09-05|확인날짜=2012-02-22}}</ref> 등 농민·화전민들과 관련된 사건 변호를 많이 맡았는데, 이는 농민 생활에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 것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광복]] 후 토지개혁문제와 관련하여서도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던 사실과 일맥상통한다.<ref name="han" />
 
[[1929년]] [[광주광역시|광주]]에 파견되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조사를 맡았고<ref>{{뉴스 인용|제목=新幹會委員三氏 光州에서 活動中 총독부학무과에서도됴사 高普生九名을釋放|url=|출판사=중외일보|저자=|날짜=1929-11-11|확인날짜=2012-02-22}}</ref>, 이 과정에서 신간회 간부들이 민중대회를 계획한 것이 일제에 의하여 탐지되면서 검거되자 결국 [[1931년]] 신간회는 해체되었다.<ref name="han" />
 
이후 김병로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이사에 취임하였는데,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 (언론인)|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 해체 이후 수많은 변호와 법정투쟁을 하던 중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변호사 정직 처분이 떨어지고, [[창씨 개명]]을 요구 받는 등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일부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1940년대]] 일제가 [[창씨 개명]]을 요구했을 때도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tag:ref|일부 보수세력에서는 김병로가 《반도시론사》라는 총독부 어용단체에 명단에 있다는 구실 삼아 그를 친일파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http://parshas.net/bg/68?category=1 참고]) 그러나 김병로 자신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고 [[신간회]] 해소 이후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했기 때문에 이는 정황상 맞지않다. [[일제강점기]] 말 일제는 거의 모든 분야에 발악하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무단으로 명의도용하여 각종 단체에 명단에 넣기까지 했다. 대표적인 예(例)가 [[홍명희]], [[안재홍]], [[여운형]], [[허헌]], [[조만식]], [[이극로]] 등이다.<ref>{{서적 인용|저자=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제목=조선일보 사람들 (일제시대 편)|쪽=|출판사=랜덤하우스코리아|날짜=2004-12-22|ISBN=8957579222}}</ref>|group="주"}}.
 
=== 광복 이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