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국호: 추가된 링크
태그: m 모바일 앱 안드로이드 앱 편집
편집 요약 없음
태그: 되돌려진 기여
48번째 줄:
 
=== 건국 ===
금나라는 1115년, 현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 걸쳐 살던 여진족 완안부의 수장 [[금 태조|아골타]]에 의하여 세워졌다. 구전에 의하면 아골타는 [[함보|완안 함보]]의 후손이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여진족들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거란|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시기에 한족들은 거란족들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잡혀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받았다. 여진족들은 요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1121년, 송나라는 금나라와 해상의 맹약을 맺어 함께 요나라를 무너뜨리기로 하였고 곧바로 요나라에 대한 합동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전쟁에서 송나라 군대가 요나라에 맞서 고전하는 와중에,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결국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요나라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금 태종은 여진족 군사들을 이끌고 송나라 원정에 나섰으며 기병 위주의 여진족 군대가 송나라에 물밀듯 밀려오자 송나라는 연일 패배하였고 송나라 전체가 황폐해졌다. 금나라는 손쉽게 1127년 1월 9일에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여 송나라(북송)은 멸망하였다. 금 태종은 송나라의 황제 [[송 흠종|흠종]]과 태상황이었던 [[송 휘종|휘종]]을 잡아갔고, 이들과 함께 조정의 고관대작들도 대거 납치해갔다. 금 태종은 송나라 흠종과 휘종의 황후와 후궁들 모친들을 잡아 기방으로 보내 기생으로 삼았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칭한다. 이후 송나라의 한족 잔당들은 중국 강남 지방으로 후퇴하여 [[송 고종|고종]]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고, 이 시기 이후의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이후 금나라는 남송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남송 전체가 금나라군에 의해 유린되었다. 남송 조정에서는 금나라의 위협에 주화파가 득세하였고 1141년에 남송의 [[진회]]가 금나라와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맺으며 일시적으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이 협상에서 굴복한 송나라는 [[화이허]] 이북의 영토를 모두 금나라에 내주어야 했으며, 당대 남송의 충신이였던 [[악비]]를 죽여야만 했다. 게다가 금나라에 세공(歲貢)으로 매년 은(銀) 25만량과 비단 25만 필을 조공하고 수 만명의 남송 여성들을 공녀로 보내기로 합의하였다.<ref>《金
史》 卷77, 皇統二年二月,宗弼朝京師,兼監修國史。宋主遣端明殿學士何鑄等進誓表,其表曰:「臣構言,今來畫疆,合以淮水中流為界,西有唐、鄧州割屬上國。自鄧州西四十裏並南四十裏為界,屬鄧州。其四十裏外並西南盡屬光化軍,為弊邑沿邊州城。 既蒙恩造,許備籓方,世世子孫,謹守臣節。 每年皇帝生辰並正旦,遣使稱賀不絕。 歲貢銀、絹二十五萬兩、匹,自壬戌年為首,每春季差人般送至泗州交納。 有渝此盟,明神是殛,墜命亡氏,踣其國家。 臣今既進誓表,伏望上國蚤降誓詔,庶使弊邑永有憑焉。」</ref>
 
금나라의 사회에서는 지배층이 여진족이며 피지배층은 정복된 한족이였다. 물론 항복하여 여진족에 충성을 맹세한 한족들은 등용될 수 있었다. 여진족에 충성을 맹세하고 등용된 한족들은 남송에게서 한간이라고 불렸다. 당시 호구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기록도 없기 때문에 인구는 추측에 불가하나 여진족과 한족의 수는 차이가 별로 없었다. 현재 중국의 인구에서 한족이 다수이기 때문에 금나라도 여진족이 소수, 한족이 다수로 잘못아는 경우가 있는데 호구 조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금나라가 언급한 여진족 군대의 숫자를 보면 한족과 인구면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한족'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소수 귀족 계층 뿐이었고 대다수 인구를 구성하던 백성들은 족속에 포함되지 못했고 성씨 또한 없었으며 남송의 경제를 지탱하는 것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소농들의 수전(水田) 농작이였다.
 
북송을 정복한 이후 많은 여진인들이 화북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각 성에는 여진족들을 보내 한족들을 통솔, 감시하며 지배하였다. 여진족들에게는 지주들로서 땅이 배분되었으며 한족으로 이루어진 많은 소농들이 배분되어 여진족들의 재산이 되었다. 각각 군직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여진족들은 여진족들 끼리만 결혼하게 하였는데 이 규제는 1191년에 철폐되었다. 1135년에 금 [[금 태종|태종]]이 사망한 이후 황위에 오른 자들은 모두 금 [[금 태조|태조]]의 손자들이었다. 정복되어 피지배층으로 전락한 한족들은 여진족에게 차별을 받았고 송나라에 협력한 한족들은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