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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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샤넬은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 은퇴했다. 이후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니거
=== 나치 스파이 활동과 말년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비호아래 타락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러면서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ref>{{뉴스 인용 |제목="코코 샤넬, 나치 스파이 맞다"…프랑스 비밀문서 공개 |url=https://www.yna.co.kr/view/AKR20160317059400009}}</ref> [[1944년]] [[샤를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경위로 [[현재]]에도 샤넬은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인식이 [[프랑스]]에선 강하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 (프랑스)|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샤넬의 [[2차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유럽]]에선 <매국노>라는 경멸과 나치독일에 대한 혐오감이 전쟁이 끝난 후 10여년간 샤넬의 [[발목]]을 잡아 위상이 약했다. 이와 [[상하좌우|반대]]로 [[미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패션은 인기를 끌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라 하여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71년]], 거주하던 [[파리 (프랑스)|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