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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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초기 ===
==== 출생과 가계 배경 ====
조소앙은 [[1887년]] 4월 10일(음력), [[경기도]] [[파주군]] [[월롱면]]에서 [[함안 조씨]] 가문의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중 2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경기도]] [[포천시|포천군]] [[이동면 (포천시)|이동면]]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훗날 [[경기도]] [[양주시|양주군]] [[백석읍|백석면]]에서 성장하였다.<ref>[[양주군]] 출생설도 있다.</ref>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조부 [[조성룡]]으로부터조성룡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 최연소로 입학하기 전까지 사서오경, 제자백가서등 한학을 공부하였다. 성균관 재학 시 그는 [[신채호]]를 알게되었고, [[신채호]]와 함께 일본에 대한 '황무지 개척권 양도'에 반대하여 성토문을 작성하였다. 성균관 졸업 후에는 '황실 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 [[가츠우라 토모오]] 교장이 '한국학생들이 열등하다'는 민족차별적인 발언을 하자, 동맹파업을 주도해 항의했다. 중학교 졸업 후 [[1908년]] 3월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시 조소앙은 공수학회와 대한흥학회간부로서 유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1909년]] 12월에 [[일진회]] 성토문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10년]] 8월에는 [[대한흥학회]] 차원에서 추진한 '합방'반대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11년]]에는 조선유학생학위회 회장이 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보는 '요시찰 인물'로 끊임없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12년]] [[3월]]에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조선법률학교 교수로 근무했으며, 일제식민지 한국을 떠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외무부장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브레인으로 활동했다.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베르그송을 만나 '시간'에 대하여 철학적 담론을 나눴으며, [[러시아]]의 러시아혁명가인 [[레닌]]과 [[노동당 (영국)|영국 노동당]] 맥도널드 상원의원과 만나 사회주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 성균관 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