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양씨 (楊):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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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양씨'''(南原 梁氏)는 [[제주 양씨]]에서 분관(分貫)하여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 인물 ==
* 양공준(楊公俊, 1484년 ~ 1525년) : 자는 언경(彦卿). 전라도 순창(淳昌) 구미(龜尾)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구암(龜巖) 양배(楊培)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0년(중종 15)에 별시 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 병조좌랑 겸 춘추관(兵曹佐郞兼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지냈다. 양공준의 진사시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문과합격증인 홍패(紅牌)는 보물 725호로 지정되었다.
* [[양홍]](楊洪, 1508년 ~ 1564년) : 양공준의 아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란(乙卯倭亂)이 일어났을 때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임 중 왜구를 토벌하여 공훈을 세웠다.
* 양사형(楊士衡, 1547 ∼ 1599년) : 양홍의 아들. 자는 계평(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 또는 어은(漁隱). 노진(盧稹)·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직장(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에 낙향하였는데, 그 해 여름에 왜적이 침범하자 이대윤(李大胤)·최상중(崔尙重) 등과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지로 보냈다. 1594년윤두수(尹斗壽)가 체찰사로 삼남지방을 순시할 때 그를 참좌하였다. 또 변사정(邊士貞)·정염(丁焰) 등과 의병으로 활동한 공로가 평가되어 병조정랑에 오르고, 이어서 춘추관기사관·경기도사·남평현감(南平縣監)·예조정랑을 거쳐 1599년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임지에서 죽었다. 승정원도승지의 증직이 내리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으며, 남원화산사(華山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어은유집』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546 양사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f>
 
== 항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