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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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지도가 아니라 한국의 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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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건문(建文) 4년에 해당하는 조선 태종 2년([[1402년]]) 조선 조정의 [[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 (1567년)|이회]](李薈)는 2종의 중국 지도를 수합하여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이택민의 지도는 만주 남부로 흐르는 요하의 조금 앞까지밖에 그려내지 못하였는데, 한반도 전체와 일본까지도 포함된 지도였다. 이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다음은 그 성립 과정을 해설한 것이다.
 
=== 몽골 제국의 지도 ===
강리도의 성립은 [[몽골 제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몽골 제국은 서쪽으로 이슬람 세계와 중국 세계를 이었다. 몽골 제국은 세계의 지리와 기록 문화를 통일시키는 것으로 세계 정복의 사실을 알렸다. 이로 해서 이슬람의 선진과학과 중국의 첨단과학이 융합되게 된다. 다만 몽골 제국이 중국에 유통시킨 지도는 어디까지나 「민간용」이었으며, 몽골 제국은 이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ref>(Miya:2006)</ref>
 
[[1285년]] 몽골 제국은 [[대원대일통지]](大元大一統志)라고 불리는 지리해설서를 작성하였다(다만 지도 부분은 유실되었다). [[1286년]] 페르시아 천문학자 자말 알딘(札馬剌丁)는 몽골 황제(대칸) [[쿠빌라이 칸]](원 세조)에 대해 제국 영토의 지도를 수집하여 세계지도를 작성할 것을 제안하였고, 천하지리총도(天下地理総図)를 완성하였다. 이 지도도 현대에는 전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는 이슬람 배편으로 『Rāh-nāmah』(도로도道路圖)를 입수하였다. 이 지도는 《[[경세대전]]》(經世大典, 1329-1333)에 수록 되었고, 몽골인이 이슬람 교도로부터 정확한 아시아 내부의 지리정보를 얻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문화사업의 영향으로 [[1297년]] 중국 [[도교]]의 [[도사]]인 주사본(朱思本)은 구역지(九域志)라 불리는 지리해설서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 일을 계속 하여 [[1311년]] - [[1320년]]에는 여지도(輿地圖)라 불리는 지도를 작성하였다. 이 지도도 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 자료는 유통시키기에는 너무도 규모가 컸다.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2차적 자료였다. 14세기 전반 [[한묵전서]](翰墨全書)나 진원정(陳元靚)이 편집한 《[[사림광기]]》(事林廣記)라는 백과사전이 제작되었고, 중국인들의 지식은 금(金)이나 남송(南宋) 시대의 정보로부터 원 왕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정보를 갱신해 나갔다.
 
근년에 보이는 자료로부터 중국 남부, 특히 경원로(慶元路, 지금의 닝보) 부근에 지식인들의 개인적인 있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태주(泰州) 출신의 청선(淸濬)은 경원에서 혼일강리도)를 작성하였다. 중요한 문헌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오사도(烏斯道) 또한 경원 출신이었다. 당시부터 닝보는 중요한 항구의 하나였고, 복주(福州)、광주(廣州)、동남아시아, 일본, 고려와 교역이 있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배편으로부터 바다에 대한 지식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성교광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