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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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mmunist-manifesto.png|섬네일|위오른쪽|〈[[공산당 선언]]〉 독일어 초판본 (1848년 2월 21일)]]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머무를 수 없는 신세가 된 마르크스가 [[벨기에]] [[브뤼셀]]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 1845년 2월이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는 현재의 정치시사에 관한 글은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ref name="Wheen 2001. p. 90"/> 브뤼셀에는 유럽 각지에서 망명온 다른 사회주의자들([[모제스 헤스]], [[카를 하인첸]],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등)이 많았는데, 마르크스는 그들과 어울렸다. 같은 해 4월, 엥겔스가 독일 [[바르멘]]에서 브뤼셀로 마르크스를 따라왔고, [[의인동맹]] 간부단도 브뤼셀을 새 본부로 삼으려 했다.<ref name="Wheen 2001. p. 90" /><ref>Heinrich Gemkow ''et al.'', ''Frederick Engels: A Biography'' (Verlag Zeit im Bild ["New Book Publishing House"]: Dresden, 1972) p. 101</ref> 얼마 뒤 엥겔스와 사실혼 관계가 되는 [[메리 번스]]가번스가 잉글랜드 [[맨체스터]]를 떠나 브뤼셀로 와 엥겔스에게 합류했다.<ref>Heinrich Gemkow, ''et al.'', ''Frederick Engels: A Biography'', p. 102.</ref>
 
1845년 7월 중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잉글랜드로 가서 [[차티스트 운동]] 지도자들을 방문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첫 영국행이었으며, 1842년 11월부터 1844년 8월까지 이미 2년간 맨체스터에 머물렀던 엥겔스가 여행 가이드 노릇을 해주었다.<ref>Heinrich Gemkow, ''et al.'', ''Frederick Engels: A Biography'' (Verlag Zeit im Bild [New Book Publishing House]: Dresden, 1972) p. 53</ref><ref>Heinrich Gemkow, ''et al.'', ''Frederick Engels: A Biography'', p. 78.</ref> 엥겔스는 그 사이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했을 뿐 아니라,<ref name="N. Fedoseyev, p. 89">P.N. Fedoseyev, ''et al.'', ''Karl Marx: A Biography'', p. 89.</ref> [[차티스트]] 운동가들과도 안면을 트고 가깝게 사귀고 있었다.<ref name="N. Fedoseyev, p. 89"/> 그랬기에 엥겔스는 잉글랜드의 차티스트, 사회주의 언론들을 물어다 주는 기자 노릇까지 해주게 되었다.<ref name="N. Fedoseyev, p. 89"/> 마르크스는 이 잉글랜드 여행을 런던과 맨체스터의 다양한 도서관들에서 경제학 자료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ref>[[#Whe00|Wheen 2001]]. p. 92.</ref>
 
이즈음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합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를 쓰는데, 이것은 [[역사적 유물론]] 개념에 관한 그의 최고의 저작으로 여겨진다.<ref>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German Ideology" contained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5''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6) pp. 19–539.</ref> 여기서 마르크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바우어]], [[막스 슈티르너|슈티르너]] 등 청년 헤겔학파, 그리고 [[카를 그룬|그룬]] 같은 관념론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한 다른 사회주의자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오로지 유물적인 것이 역사를 유일한 추동하는 힘이라는 자신들의 철학을 마침내 완성했다.<ref>P.N. Fedoseyev, ''et al.'', ''Karl Marx: A Biography'', pp. 96–97.</ref> 《독일 이데올로기》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형태로 쓰여졌지만, 그럼에도 [[검열]]을 피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다른 초기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고, 1932년에야 초판이 출간되었다.<ref name="sep"/><ref name="wk"/><ref>[[#Whe00|Wheen 2001]]. p. 93.</ref>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한 마르크스는 '진실로 과학적인 유물론 철학'의 견지에서 작동하는 '혁명적 무산자 운동'의 '이론과 전술'에 관한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는 작업을 시작했다.<ref>See Note 71 on p. 672 of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6''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6).</ref> 이것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 사이에 구분을 짓고자 하는 의도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람이란 자신의 경제적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노동자 개개인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가 동원되어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노동계급에게 최대의 물질적 이득을 보장한다고 계급 단위의 선동을 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다음 책의 주제로 계획한 것이었다. 그 책의 제목은 정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철학의 빈곤]]》(1847년작)이라고 붙였다.<ref>Karl Marx, ''The Poverty of Philosophy'' contained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6''(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6) pp. 105–212.</ref> 또한 이 제목은 프랑스의 무정부주의 이론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1840년)의 '소시민적 철학'을 저격하는 것이기도 했다.<ref>[[#Whe00|Wheen 2001]]. p. 107.</ref>
 
[[파일:Marx+Family and Engels.jpg|섬네일|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마르크스의 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