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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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1849년 6월 초 [[런던]]에 도착했고, 이후 런던을 거점으로 삼아 여생을 보냈다. 공산주의자동맹 본부 역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49년에서 185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이끄는 파벌은 공산주의자동맹이 지금 봉기하면 전체 노동계급이 전 유럽에서 "동시적으로" 들고일어나 합류할 것이며 전유럽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 봉기를 선동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무계획적 봉기는 '모험주의적'이며 공산주의자동맹의 자살이 될 것이라고 거부했다.<ref name="N. Fedoseyev, p. 233">P.N. Fedoseyev, ''Karl Marx: A Biography'', p. 233.</ref> 샤퍼나 빌리히 등이 주장한 봉기들은 유럽의 반동 정부들의 군경에 쉽사리 분쇄될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산주의자동맹의 파멸이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사회변혁은 하룻밤 사이에 한 줌 인간들의 의지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ref name="N. Fedoseyev, p. 233"/> 대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의 경제상황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매진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봉기들이 분쇄당한 현재(1850년경)의 사회발전단계로 미루어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진보적 부르주아들과 합작하여 봉건귀족제를 우선 타파하도록 공산주의자동맹이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정부개혁, 입헌공화국, 자유선거, 보통(남성)선거를 요구하는 부르주아 민주화 운동에 노동계급이 참여해야 하며, 노동계급 의제와 노동계급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그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적 결과를 거둔 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은 내홍을 겪은 끝에 마르크스의 입장이 승리하고, 빌리히와 샤퍼 등은 탈당했다. 한편 마르크스는 독일노동자교육결사에 깊이 관여했는데,<ref>Note 269 contained on p. 674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11''.</ref> 이 결사는 런던 도심 유흥가인 [[소호 (런던)|소호]]
런던 망명기 초기에 마르크스는 오로지 혁명활동에만 골몰했기에 마르크스 가족은 극심한 빈곤을 겪어야 했다.<ref name="DusselMoseley2001"/><ref name="egsbio"/>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용돈을 받아 연명했고, 엥겔스의 그 돈은 엥겔스의 부유한 자본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었다.<ref name=egsbio/> 프로이센에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굴리면서 그 지면을 통해 예상 독자인 노동계급과 소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무일푼이 된 마르크스는 자기 신문을 새로 만들 수 없었고, 국제언론으로 관심을 선회한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미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남아프리카의 6개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ref>Jonathan Sperber, ''Karl Marx: A Nineteenth-Century Life'', p. 295.</ref> 마르크스는 1852년부터 1862년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고, 이것이 그동안 주 수입원이 되었다.<ref name="Kluger">{{서적 인용|이탤릭체=예|성=Kluger|first=Richard|제목=The Paper: The Life and Death of the New York Herald Tribune|location=New York|출판사=Alfred A. Knopf|날짜=1986}}</ref>{{rp|17}} 그 외에도 여러 "부르주아" 언론들에 기사를 써가며 입에 풀칠을 했다. 마르크스는 영어를 몰랐기 때문에 기사를 독일어로 써서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1841년 [[호러스 그릴리]]가 창간한 신문으로,<ref>P.N. Fedoseyev, ''Karl Marx: A Biography'', 274.</ref> 진보적 부르주아 언론인, 출판인들이 편집주간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1857년 3월 21일,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불경기 때문에 매주 기사 한 부치 고료만 주게 되었다고 통보했다. 다른 특파원들은 기사가 지면에 실려야 고료를 받았지만 마르크스는 기사가 실리지 않아도 매주 한 부치의 고료는 받았다. 마르크스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기사를 송고했다. 10월이 되자 《트리뷴》은 재정 악화가 더 심해져 마르크스와 다른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유럽 특파원들을 잘랐고, 마르크스도 주 1회 기사로 일감이 줄어들었다. 1860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의 기사는 달랑 다섯 번 지면에 게재되었다. 6개월 쉬고, 마르크스는 1861년 9월부터 1862년 3월까지 기사를 썼다. 그 뒤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미국 국내 문제로 인해 《트리뷴》에는 더이상 런던 특파원 자리를 둘 여유가 없다고 편지를 썼다.<ref name="MECW">[https://ia801605.us.archive.org/29/items/MarxEngelsCollectedWorksVolume10MKarlMarx/Marx%20%26%20Engels%20Collected%20Works%20Volume%2041_%20Ka%20-%20Karl%20Marx.pdf Marx & Engels Collected Works, vol.41]</ref> 1857년 4월, 다나는 마르크스에게 《
1850년대 말이 되면 미국인들은 유럽 사정에 관심이 시들해졌고, 마르크스의 기사들도 '노예제 위기'나 1861년 [[미국 내전]] 발발 같은 미국 국내 문제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ref>Note 1 at p. 367 contained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19''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84).</ref>
1851년 12월에서 1852년 3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프랑스 2월 혁명에 대한 이론연구를 집대성하여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ref>Karl Marx, "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 contained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11''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9) pp. 99–197.</ref>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 [[계급투쟁|계급투쟁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무산자독재]],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무산자의 승리 등 여러 개념을 넘나들었다.<ref name="Marx2008"/>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8년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을 자신들의 경제이론 및 역사진보이론에 반영시켰다.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고, 혁명적 추진력이 소진된 것 같은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가 "모험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다른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마르크스는 "의지의 힘" 따위로 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망상이며, 경제적 요소야말로 필수적인 필요조건이라고 여겼다. 1852년 미국 불황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혁명활동에 대한 낙관론을 주었다. 물론 이 정도 경제는 아직 자본주의 혁명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미숙했다. 미국의 사회불안정은 서부의 빈 땅 개발 바람으로 희석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 일어나는 경제위기가 유럽 대륙의 경제에 혁명적 확산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유럽의 각 국가들은 국경선을 경계로 철저한 폐쇄경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최초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57년 공황]]이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일어난 공황이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친 최초의 "글로벌 경제위기"로서, 그전까지의 경제이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ref>Jonathan Sperber, ''Karl Marx: A Nineteenth-Century Life'', p. 32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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