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 (193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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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데이터 속성 추적}}
{{황족 정보
| 이름 = 이구
| 원래 이름 = 李玖
| 그림 =
| 휘
| 시호 =
| 작위
|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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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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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임자
| 작위2 =
| 재위2
| 전임자2 = [[의민태자|의민황태자]]
| 후임자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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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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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
'''이구'''(李玖,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는 [[대한민국]]의 건축가, 공학자, 교육자, 사업가이다. 아호(雅號)는 산남(山南)이고, 구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대한제국 황실]] 제3대 수장인 영친왕 [[의민태자|이은]]과 [[이방자]] 여사의 둘째 아들이다. [[일제강점기]]의 [[이왕가]]의 이왕세자(李王世子)이기도 했으며, 신적강하로 이왕세자직을 상실하고 [[일본]]에 체류하였다. 한때 [[미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고, [[대한민국]]에 귀국,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생전에 [[건축사]]와 대학강사 등으로 활동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 종묘제례 봉행위원회 총재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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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출생과 이왕세자 시절 ===
[[1931년]] [[12월 29일]] [[의민태자]]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의 딸 [[이방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이진이 일찍 죽어 그가 영친왕의 잠정상속자가 되었다. 국내에서의 그의 지위는 이왕(李王)이었던 아버지 [[영친왕]]의 이왕세자였다. 정확한 세자 책봉일은 알 수 없으나, 1933년에는 이미 왕세자 신분이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30402002091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3-04-02&officeId=00020&pageNo=2&printNo=4417&publishType=00010
그러나 [[1945년]]에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 [[신적강하]]가 일어나면서 [[영친왕]]이 평민으로 신분이 격하되자 이구 역시 이왕세자라는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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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혼과 일본 출국 ===
종친들의 종용에 못 이겨 대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그는 [[줄리아 멀록]]과의 결혼생활을 20여 년간 유지했다. 그러나 1977년 별거에 들어가고, [[1979년]] 이구는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1982년]] 이구는 부인이었던 [[줄리아 멀록]]과 이혼하게 되었는데, 이혼하게 된 원인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머니 이방자는 줄리아가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하며 안타까워했다.<ref>그러나 이방자 역시 일본계 여성으로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일 수 있었다.</ref> [[줄리아 멀록]]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주변의 거듭된 반대와 비판에 시달렸다. 줄리아는 실내장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며 시어머니 이방자의 명휘원 사업을 돕고 열심히 시어머니를 부양하였으나, 일부 종친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1984년]] 이구는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다.<ref>"詐欺 혐의로 李玖씨 日서 被訴", 동아일보 1984년 6월 19일자 7면, 사회면</ref> [[1989년]] 어머니마저 잃고 여러 번 종약원과 종친들의 귀국 종용이 계속 있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1996년]] 영구 귀국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를 맡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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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55&aid=0000049579&
|출판사=SBS TV
|날짜=2005년 7월 19일}}</ref> 호텔 종업원이 수일 간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방문을 열어보자 화장실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객실 화장실에서 발견된 그의 시신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일자와 사망 시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일본 경찰 측에서 입수한 자료도 단편적이고, 그 단편적인 자료조차 공개하기를 꺼려하여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공교롭게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자리는 [[1931년]]에 그가 태어난
이구의 [[시신]]은 [[2005년]] [[7월 20일]]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운구되었으며, [[2005년]] [[7월 21일]] [[성복제]]에서 입관 전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공개된 뒤, [[2005년]] [[7월 24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및 문화재청장 등 각계 인사들과 시민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창덕궁]] [[희정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ref>{{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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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세자 대우 ===
이구는 [[1945년]] 이후에나 부왕 [[영친왕]]의 사후에 직접적으로 한국의 왕위나 황제위를 요구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동안 한국 사회는 그를 왕세자로 대우하였다.<ref>자유신문 1950년 3월 31일자 기사</ref> 자유신문 1950년 3월 31일자 기사에는 그를 왕세자로 칭한 바 있다. 그밖에 [[경향신문]]의 3월 31일자 기사 2면에도 "舊王世子李玖 外人商店店員"이라 하여 이구를 왕세자로 보았다.
== 가족 관계 ==
▲* 부인: [[줄리아 멀록]](한국식 이름: 이주아,李珠亞)([[1923년]] - [[2017년]]), 이혼.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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