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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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dolmen) 또는 '''지석묘'''(支石墓,<ref>석붕묘; 石棚墓,</ref>)는 고인의 시신을 넣은 관을 묻는 크고 평평한 바위를 몇 개의 바위로 괴어 놓은 [[고대]]의 [[거석]](Megalith) 구조물을 말한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6만개정도가 분포하며, 숫자상으로 [[한국]]에 남·북한을 합쳐 4만기 정도로 가장 많다.<ref>[http://www.segye.com/content/html/2008/11/19/20081119003587.html 세계일보, 2008년 11월 19일 기사,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ref><ref>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연구원의 주장으로 학자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다. 고인돌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자칫 한자어로 오해하기 쉽지만 괸돌, 고임돌이란 뜻이다. 큰 돌 아래에 작은 돌을 괴어놓은 돌 전체를 말한다. 한자식 표현으로는 지석묘(支石墓)라고 한다. 전 세계에 분포하는 청동기시대 거석문화(巨石文化, 거대한 돌에 대한 믿음, 신앙, 표식 따위의 의도적인 돌로 만든 형상을 말함)의 한 가지이지만 아시아와 유럽에 많이 분포한다. 현재 한국의 경우, 남북한 학계에 보고된 고인돌의 수가 무려 2만 5,000~3만 5,000개로 추정되고 있다. 전 세계 고인돌이 약 7만개 정도로 보고되었으니 한국에 약 절반이 있는 셈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창, 화순, 강화도 고인돌이 대표적이다.</ref> 고인돌은 윗부분이 평평하며, 내부에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세워진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000년,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추정된다. 유럽의 고인돌들은 주변에 흙이나 작은 돌로 덮어 무덤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엘붕이는 사실 쉘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쉘리는 이미 브록하고 사귀고 있다
== 기원과 명칭 ==
그레서 엘붕이는 슈퍼셀의 힘으로 브록을 죽였다 그러나 쉘리는 엘붕이가 브록을 죽인것을 알고 헐크로 변신하여 싸커킥을 날렸다
고인돌은 계급 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돌화살촉]]이나 [[마제석검|간검돌]], [[민무늬토기]], 청동 제품 등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된다. 많은 고인돌에서 부장품이 아예 출토되지 않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이차장(二次葬) 또는 세골장(洗骨葬 1차로 가매장하여 살을 썩혀 없애고 뼈만 추려 묻는 장례) 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추측된다.
그러하여 엘붕이의 뼈로 고인돌을 만들었다...
 
고인돌은 납작한 판석이나 덩이돌 밑에 돌을 괴여 지상에 드러나 있는‘괴여 있는 돌’이란 뜻이다.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형태의 차이가 있으나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받침돌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린 탁자 모양이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는데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며, 북한에서는 ‘고인돌무덤’으로 표현된다. 이들은 같은 의미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석묘’의 명칭은 ‘고인돌(支石)’이 있는 ‘무덤(墓)’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에서는 고인돌을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부른다. [[켈트어파|켈트어]](북아일랜드 언어)로는 탁자란 뜻인 ‘Dol’과 돌이란 뜻인 ‘Men’이 합쳐져 ‘돌멘(Dolmen)’이라 하고, 영어로는 ‘Table Stone’이라고 한다.
 
한반도의 민간에서는 고인돌의 덮개돌 모양이나 군집의 형태 그리고 남겨진 전설에 따라 특별한 이름들이 붙여졌다. [[방언]]에서 거석을 ’독’이나 ‘바우’라 하는 데서 ‘독바우’바우바우, ‘바우배기’, ‘독배기’ 같은 이름이 나왔으며, 군집된 모습이 장기알 같다고 해서 ‘장기바우’라고도 불렀다.
 
'고인돌' 이름을 논문에 맨 처음 쓴 사람은 한흥수(韓興洙, 1909∼?)다. 한흥수는 일제강점기 때 유럽에 건너가 고고학을 전공한 우리나라 1세대 고고학자다. 그는 도유호(都宥浩, 1905∼1982), 손진태(孫晋泰, 1900~?)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인돌을 연구한 학자다. 손진태는 민속학자이고, 한흥수와 도유호는 유럽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전문 학자인데, 두 사람은 해방 뒤 월북해 북한 고고학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 name=":0">{{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6001|제목='고인돌'은 왜 '고인돌'이라 하는 걸까?|날짜=2018-04-19|확인날짜=2018-12-03}}</ref>
 
한흥수는 1935년 〈조선의 거석문화 연구〉 논문에서 우리나라 거석문화를 선돌, 고인돌, 칠성바위, 독무덤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가 왜 돌무덤을 고인돌이라 했는지는 논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뒤 학자들은 고인돌이란 이름을 자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여전히 일본 학자들이 쓰는 지석묘(支石墓) 이름을 더 많이 썼다. 그러다 1984년 한국고고학연구소가 낸 <한국고고학개정용어집>에서 '지석묘'를 '고인돌'로 하자고 해 이 이름을 두루 쓰고 있다.<ref name=":0" />
 
 
현재는 ‘지석묘’가 일본식 명칭이라는 인식과 고인돌이 무덤의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지적으로 인해 ‘고인돌’이라는 명칭이 학계에서 보편적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ref>《고인돌 이야기》, 《세계유산 강화고인돌》</ref>
 
 
 
 
 
엘붕이의 인생생활 링크
https://search.pstatic.net/common/?src=http%3A%2F%2Fcafefiles.naver.net%2FMjAxOTA5MjNfNzYg%2FMDAxNTY5MjIwMTc5MTU5.HTxxet3frTvMXjF3ogiHMqh6F2qsYwtXvNqz2Td_YCEg.r1A0ZWIwWUKDhIefYjBHLIjaCRPzq_M27HxogDhYQiQg.JPEG%2FexternalFile.jpg&type=sc960_832
 
== 동아시아의 고인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