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화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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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7세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의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1931년]] 조선미술대전에 출품하여 [[1940년]]까지 6회 입선, 특선 3회를 기록했다. 광복 전의 활동은 주로 일제의 내선일체 사상을 정당화하는 친일 활동으로 점철되었으며점철되었다. 광복1957년 후에는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주최 교 한국 현대작가전에 초대 출품했다. 1960년 국전 초대작가가 되어 국전 심사위원이심사위원을 되었고역임하고, [[홍익대학교]]대북(台北)과 홍콩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 출품했고 이어 도쿄(東京)·마닐라에서 열린 한국미술전에도 출품했다. 1962년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교직을 옮겼고 문화자유전에 출품했다. 1963년에 5월문예상 미술본상을 수상했고,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한국 대표로 출품했다. 1964년 미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渡美), 1969년에 재차 도미하여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다.<ref name="글로벌">{{글로벌세계대백과2|제목=한국미술 - 한국미술의 흐름 - 한국 현대미술 - 김기창}}</ref> [[수도여자사범대학홍익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한 적이 있다.
 
==작품세계작품 세계==
그의 화풍은 자유롭고 활달한 필력으로 힘차고 동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고시적인 풍속화에서부터, 형태의 대담한 왜곡을 거쳐 극단적인 추상에 이르기까지 구상, 추상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폭넓은 작가적 역량을 구사했다.
또한 [[복음서]]의 [[예수]] 전승(傳承)을 한국적으로 해석, 예수를 한복을 입은 [[한국인]]으로 묘사한 [[동양화]]를 그렸는데 이는 예수를 한국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기독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신학적인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는 [[로마 제국]], [[헤롯]] 왕실, [[예루살렘 성전]]의 착취를 받는 가난한 [[농촌]]공동체요,'신통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곳', '이방인의 갈릴리'라고 불릴만큼 무시와 소외를 받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변변치 않은 [[직업]]인 목수로 살아간 [[민중]]이었는데<ref>《예수 운동과 갈릴리》/황성규 지음/한국신학연구소, 《갈릴래아의 예수》/안병무 지음/한국신학연구소</ref>, 김기창 화백의 그림에서는 [[양반]]의 옷을 입고 있는 모순이 있다.
대표작으로 <세종대왕 초상> <군마도> <청산도> <소와 여인> 등이 있다.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평의원으로 있던 이당 김은호의 제자로, 그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해 그린 <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 < 완전군장의 총후병사 > 등은 [[1943년]] [[8월6일8월 6일]]치 < [[매일신보]] > 에 실렸다.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