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녀투강(八女投江)은 1938년 10월 20일에 중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느니 죽자며 무단장시에서 투신 자살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5군 부녀단 소속 여전사 8명을 이른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항일 투쟁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린커우현팔녀투강기념지가 있다.

무단장시의 팔녀투강비.

인물자료 편집

성명 출생일 직무 비고
렁윈(冷云),
원명 정즈민(郑志民)
1915년 대대지도원 헤이룽장성 화촨현 열래진(悦来镇) 출신.[1] 1934년 중국공산당 입당. 1937년 저우웨이런(周维仁)과 함께 항일연군 입대, 이후 저우웨이런과 결혼. 1938년 초 남편 사망. 렁윈도 자살한 뒤 슬하의 딸은 행방불명.
후슈즈(胡秀芝) 1918년 반장 헤이룽장성 린커우현 조령진(刁翎镇)하 마제촌(马蹄村) 출신.[1] 중국공산당원.
양구이전(杨贵珍) 1920년 11월 반장 헤이룽장성 린커우현 동류수 하자둔(东柳树河子屯, 현 연화향(莲花乡) 동흥촌(东兴村)) 출신.[1]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과부가 되자 시댁에서 그를 인신매매하려 함에, 도망쳐 항일연군에 입대, 양구이전이라는 이름은 입대 후 지어 붙였다. 중국공산당 당원. 부친 양징춘(杨景春)은 1962년 10월에야 자기 딸이 팔녀투강의 영웅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궈구이친(郭桂琴),
유명 궈쥐화(郭菊花)
1922년 헤이룽장성 보리현 출신. 린커우현 조령진 사함촌(四合村) 사합둔(四合屯)의 조부 댁에서 성장.[1] 1936년 항일연군 입대. 희생하기 전 제5군 교도단 분대장 펑원리(冯文礼)와 약혼. 펑원리는 60여년 뒤에야 궈구이친의 희생을 알았다.
황구이칭(黄桂清) 1918년 전사 헤이룽장성 린커우현 조령진 남위자하(南围子河, 현 하심둔(河心屯)) 출신.[1] 집안이 항연보루호(抗联堡垒户)로서, 일가족이 모두 항일투쟁 참여.
왕후이민(王惠民) 1925년 항일연군 제5군 군부부관 왕시원(王希文)의 딸.[1] 12세 때 부친을 따라 항일연군에 입대. 그 직후 부친 사망. 1938년 투신 당시 불과 13세로 팔녀투강 가운데 가장 어렸다.
안순푸(安顺福),
원명 장푸순(张福顺)
1915년 피복엄엄장 헤이룽장성 무링현 목릉진(穆棱镇) 신안둔(新安屯) 출신.[1] 조선족. 중국공산당 당원. 19세 때 항일연군 입대. 남편 퍄오더산(朴德山)은 항일연군 제4군 제4단 정위(정치장교)였으며 그 역시 전사.
리펑산(李凤善) 1918년 전사 헤이룽장성 린커우현 용조진(龙爪镇) 출신.[1] 조선족. 투신 당시 20세.


참고 문헌 편집

  1. “像水一样离去 ——谨以此文纪念东北抗联“八女投江”七十周年” (중국어 간체). 中国龙志网. 2012년 6월 18일. 2015년 11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11월 16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