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정계비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1] 또는 선춘령비(先春嶺碑)는 예종 3년 (1108년) 동북 9성의 최북단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석비이다. 동북 9성의 최북단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북 9성의 위치에 관한 연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으나, 실물이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위치 등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배경
편집예종 2년 (1107년) 고려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서, 윤관과 오연총을 중심으로 여진을 공격하여 영토를 점령한 후, 점령지에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윤관은 새로 점령한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으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이 비의 위치가 동북 9성의 최북단인 공험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3]
위치
편집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고려정계비의 정확한 위치가 함경도 거양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떨어진 선춘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정계비는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는 동북 9성의 두만강 이북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5] 하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공험진과 선춘현의 위치는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공험진과 고려정계비가 두만강 북쪽이 아니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6]
동북 9성 위치 추정과의 연관성
편집고려정계비는 동북 9성의 최북단에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동북 9성의 위치를 추정할 때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나, 고려정계비의 실물은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세종은 1439년 김종서에게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를 포함해 동북 9성의 위치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으나,[7] 그 결과는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 중기 한백겸은 함경남도 마운령에 있는 돌단을 고려정계비의 흔적으로 보아, 동북 9성의 위치를 길주 이남으로 보았으나, 1929년 최남선은 이 비석이 사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로, 고려정계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5]
내용
편집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비석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존재한다. 이 이외에 전해지는 고려정계비의 내용은 없으며, 세종 시기 비석을 찾아 비문을 옮기려고 시도하기도 했으나[7] 전해지는 결과물은 없다.
고려정계비의 비실존 주장
편집고려정계비를 찾으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정확한 위치나 일말의 흔적조차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고구려의 옛 비석'을 가리키는 말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비를 세웠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변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주장은 동북 9성의 두만강 이남 가설과 관련이 있다.[8][9]
각주
편집- ↑ “고려정계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용어 시소러스》. 2024년 2월 2일에 확인함.
- ↑ “윤관이 여진 평정을 하례하는 표문을 올리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데이터베이스》, 2024년 2월 2일에 확인함,
무신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새로 6성을 쌓았으므로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였다.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 ↑ “윤관이 표를 올려 칭하하고 공험진비를 세우다”,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 데이터베이스》, 2024년 2월 2일에 확인함,
윤관이 여진을 평정하고 6성을 새로 쌓았다 하여 표를 올려 칭하하였고, 도검할 좌부승선 예부낭중 임언으로 하여금 기문을 지어 공적을 칭송하게 하여, 영주 남청에 걸었다. 또 공험진에 비를 세워 계의 끝으로 삼았다.
- ↑ 가 나 “세종실록 155권, 지리지 함길도”,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4년 2월 2일에 확인함
- ↑ 가 나 이인철 (2017). “고려 윤관이 개척한 동북9성의 위치 연구”. 《仙道文化》 23: 247-292. doi:10.35573/JKSC.23.7.
- ↑ 김훈 (2023). “公嶮鎭과 先春嶺碑의 위치 재검토”. 《전북사학》 69: 63-93.
- ↑ 가 나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2024년 2월 2일에 확인함.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 북록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에 옛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에 비갈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구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 하였다.
- ↑ 윤경진 (2019). “고려말 東北面 영토개척과 영토의식: 公嶮鎭 두만강북설의 출현 배경” (PDF). 《한국문화》 88: 127-164. doi:10.22943/han.2019..88.005.
- ↑ 윤경진 (2016년 11월). “고려 동북 9성의 범위와 ‘公嶮鎭 立碑’ 문제”. 《역사와실학》 61: 16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