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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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濟衆院)은 조선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병원이다.[1] 본래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나, 같은 해 4월 26일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취소되고 제중원(濟衆院)이라 명명되었다.[2] 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의 이관된 이후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조선 (서울, 대구, 광주, 평안남도 선천 등)에 설립한 병원은 어느곳에서나 제중원이라고 불렸다.

목차

설립 배경 및 설립 과정편집

미 공사관 의사로 활동하던 선교사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게 되는데 다른 서양 문물들과 함께 서양 의료의 필요성에 대해 탐색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게 이는 외과술을 통한 서양의학의 장점을 잘 보여준 사건이 되었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의 필요성에 대해 건의하게 되고[3] 고종의 승인을 거쳐, 1885년 4월[4]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홍영식(洪英植)의 집에서[5]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을 개원하게 된다. 조선 정부와 알렌은 이 곳에 진찰실, 수술실, 대기실 등을 갖추었다.[6] 제중원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오늘날의 외교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오늘날의 장관) 또는 협판(오늘날의 차관)이 제중원 당상(濟衆院堂上)이 되어 정부 파견 관리로서의 직무를 수행했고 알렌 등 선교부 의사들이 병원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았다. 이 후 1886년 10, 11월경 제중원은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서 명동성당 방향 일대)로 자리를 옮겼다.

인력편집

알렌(한국명 안련)이 제중원의 초대 의사로 부임했으며 그 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헤론(John W. Heron), 하디(Robert A. Hardie), 빈턴(Cadwallader C. Vinton), 에이비슨(Oliver R. Avison, 한국명 어비신)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차례로 부임하여 제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했다. 또한 제중원에는 정부에서 파견된 제중원 당상(堂上)이란 직제가 존재했으며 이는 독판(督辦, 지금의 장관)이나 협판(協辦, 지금의 차관)이 겸직했다. 제중원 초창기에 주사로서는 관립 영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同文學) 출신 인사들이 배치되었다.

진료편집

1886년 알렌과 헤론이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 본부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개원 이래 첫 1년 동안 10,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치료받은 환자들의 주요 질환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많았다. 소화 불량, 각종 피부병, 성병(매독)도 많은 편이었다. 그 밖에도 결핵, 나병,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있었다.[7]

의학 교육편집

병원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게 되자 병원과는 별도로 의학 교육 기관 설립에 관한 논의가 1885년 12월 시작되었다. 그 결과 1886년 2월 8일 외아문이 8도 감영에 관문을 내려, 각 도에서 3, 4명씩, 14세에서 18세의 총명한 청년을 발탁하고자 했고 이듬해인 1886년 3월 26일에는 제중원의학당을[8] 세워 선발된 학생 16명의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나 1890년경 조선 정부의 재정난으로 말미암은 예산 부족과 알렌의 외교관 전직에 따른 학생들의 이탈로 제중원 의학당의 의학 교육은 중단되었고, 에비슨이 부임한 후에야 비로소 재개된다. 정확한 재개시점은 알 수 없으나 연세대학교 학적부에 의하면 박서양이 1900년 8월 30일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있어 박서양이 2학년일때 5학년이었던 전병세의 경우에 대입해보면 최소한 1897년부터는 제중원에서의 의학 교육이 재개되었다고 추측된다.[9] 이후 1899년 안식년을 맞은 에비슨이 미국의 대부호 L. H. 세브란스로부터 교육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여 1900년 9월 제중원의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고,[10] 보다 본격적으로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임상각과 의학서적을 번역하고 각과목을 강의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내과 외과의 진찰부터 수술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그 결과 박서양 등 7명의 학생들은 8년 이상의 의학 교육을 마치고 1908년 6월 3일, 중도에 세부란시(세브란스)병원 의학교로 명칭이 변경된 제중원의학교를[11] 제1회로 졸업하였다.[12] 이후 1911년에 6명의 2회 졸업생, 1913년에 5명의 3회 졸업생을 배출했다.[13]

미국북장로회 선교부로의 제중원 운영권 이관편집

1894년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 대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특히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에게는 치명타였다. 고종은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조선 정부는 일본인 수중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 선교사 에비슨의 요청을 수용하여 미국북장로회에 제중원을 이관했다.[14][15] 이관 후 진료 공간의 확장의 필요성을 느낀 에비슨은 1899년 미국 사업가인 세브란스(L. H. Severance)로부터 거액의 기금을 기증받아 숭례문 밖 복숭아 골(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 재단 빌딩 자리)에 세브란스병원을 신축, 1904년 완공했고 이에 약 1년 후인 1905년 4월 미국북장로회 선교부는 대한제국 정부와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를[16] 체결해 사용하던 기존의 건물 및 대지를 완전히 반환했다. 의료진과 의료기구 및 의료기록은 모두 “남문(남대문)밖에 새로짓는 제중원”, 즉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17] 별다른 공백없이 진료가 지속되었으며 조선정부가 돌려받은 기존의 제중원 터와 건물은 이후 개조되어 친일파인사와 일본인간의 사교모임인 대동구락부가 사용하게 되었다.[18] 세브란스병원 완공 후 제중원의 명칭은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대한제국 정부에서도 여전히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이라 칭하였으며[19] 1920년대 신문 등에서도 여전히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으로 칭하였다.[20]

사진편집

각주편집

  1. 국내 최초 서양식 의료 기관을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기관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부산 거주 일본인들을 위해 설립된 관립 제생의원이 된다. 부산 의료원에서 1938년 7월 마쓰오 고헤이(松尾 孝平)라는 일본인이 편찬한 《부산부립병원사(釜山府立病院史)》에 따르면 "부산 부립병원의 전신인 관립 제생의원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해인 1876년 11월13일 설립됐다"고 한다. 관립 제생의원은 일본 정부에 의해 세워졌고 공식 개업은 이듬해 2월 11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국제신문 2003년 6월 17일 기사 참조
  2. 개칭이 아니라 원천무효화 방식에 해당되는 '개부표'를 사용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za_12203012_001
  3. Allen, Horace N. (1991).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4. 제중원 개원 날짜가 1885년 4월인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각각의 근거에 따라 4월 3일, 9일, 10일, 14일 설이 있다.
  5. 서울의 재동(齋洞,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
  6. 조선정부병원(제중원) 제1차년도 보고서(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7. 박형우, “제중원” 몸과 마음 2002, 103-127쪽
  8. 朝野新聞 明治19년(1886년) 7월 29일자의 기사에 나온 명칭이다.
  9. 박형우, 박윤재, 여인석, 김일순 (1999년 8월). “제중원에서의 초기 의학교육(1885-1908)” (PDF). 《대한의사학회지》 8 (1): 25–44. 
  10. 이만열. “한말 미국계 의료선교를 통한 서양의학의 수용”. 국사편찬위원회. 
  11.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 개원 이후 교명도 제중원의학교에서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로 자연스럽게 변경되었다.
  12. 기창덕 (1994년 6월). “의학교육의 현대화 과정” (PDF). 《대한의사학회지》 3 (1): 72–129. 
  13. 이때부터 꾸준히 졸업생들이 배출되어 2010년 국내 의과대학 최초로 100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4. 제중원을 일본에 빼앗기는 것보다는 미국북장로회에 이관하는 것이 제중원의 보호는 물론 정치 외교적으로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15.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4년 8월 26일자 및 11월 20일자 편지
  16. 외부대신 李夏英, 미국장로교 해외선교부 C. C. Vinton (1905년).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 
  17. 여인석, 박윤재, 이경록, 박형우 (1998년). “구리개 제중원 건물과 대지의 반환과정” (PDF). 《대한의사학회지》 7 (1): 23. 
  18. 왕현종, 이경록, 박형우 (2001년 12월). “구리개 제중원의 규모와 활동” (PDF). 《대한의사학회지》 10 (2): 135. 
  19. 《대한제국 관보》. 의정부 관보과. 1906년 6월 4일. 
  20. “확장(擴張)할 제중원(濟衆院)”. 동아일보. 1920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