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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4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어머니 마르가레테 힘러와 책을 읽는 구드룬 부르비츠 (오른쪽)

구드룬 마르가레테 엘프리데 에마 아나 부르비츠(혼전성 힘러(Himmler), 독일어: Gudrun Margarete Elfriede Emma Anna Burwitz, 1929년 8월 8일 ~ 2018년 5월 24일)는 독일신나치주의 운동가로 나치 독일SS게슈타포의 지휘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부인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태어났다.

목차

초기 생애편집

1929년 8월 8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구드룬은 어머니 마르가레테와 함께 뮌헨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는 수시로 아내와 딸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였고 매일같이 가족에게 전화를 하고 매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힘러는 집무 중에도 딸을 곁에 두었고 '내 강아지(Püppi)' 라고 부르며 아꼈다. 구드룬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아버지가 승진할 때마다 축하하며 ' 사랑스런 아빠가 라이히의 내무 장관이라니 기뻐서 미칠 것 같아. 그렇게나 명성이 높은 아빠 ' 라는 일기를 쓰며 경탄했다고 한다. [1]

1945년 5월(16세 무렵) 그녀와 어머니 마르가레테는 오스트리아 서부 티롤 주에서 미군에게 붙잡힌다. 힘러의 옛 참모장인 카를 볼프가 볼차노의 별장에서 체포되면서 '나를 독일로 돌려보내준다면 당신들에게 힘러의 아내와 딸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겠다'고 거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각지의 수용소를 전전했는데, 혹시 대중이나 당원들이 일으킬지 모르는 폭력 사태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호위대가 따라다녔다. 피렌체의 영국 심문센터의 한 경비원은 "만약 당신들이 힘러의 처자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갈가리 찢겨져 죽을 겁니다'라고 했다니 말 다했다. 구드룬이 아버지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이때였다.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하인리히 힘러1945년 5월 23일 자살했지만 구드룬은 한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힘러의 아내이자 그녀의 어머니인 마르가레테가 미국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아 거의 3주 동안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고열에 시달렸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구드룬은 그가 청산가리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녀에게 아버지가 자살한다는 것은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때까지의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다가 갑자기 부유한 생활에서 수용소 감금생활로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거기다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져병을 얻은 어린 소녀라는 실로 가련한 존재다. 하지만 구드룬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를 관리하고 있던 영국군 지휘관에게 구드룬은 하루라도 빨리 떼어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며, 쓸모도 없는데다 보호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슈미트'라는 가명을 부여했지만 후술하듯 오래가지는 못했다.[2]

구드룬은 수감 중 음식이 초라한 데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결국 협상에서 승리하여 어머니와 함께 장교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뉘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이때 "이제부터 제 성은 힘러예요. 더 이상의 가명도 연극도 필요 없어요."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1946년 11월, 전쟁범죄와 전혀 연관이 없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석방되기 전까지 구드룬은 어머니와 함께 탈나치화 과정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마르가레테는 석방될 때 오히려 떠나기를 거부했다. 무일푼인 데다 린치를 당할까 두려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한 수도원에 '정신박약자들'이라는 명목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1952년까지 그곳에서 지낸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안정되지 못했다. 기독교인 여성들이 구드룬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해보았지만 그녀는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나는 아빠처럼 되고 싶어요.'라며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한다. 힘러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3]

성인이 된 이후편집

구드룬은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불프 디터 부르비츠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 그녀는 신나치주의자들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고 1951년 이후부터는 징역을 살고 있거나 도주 중인 SS 단원들을 구원하는 모임인 '슈틸레 힐페(Stille Hilfe)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수십 년 간 구드룬은 '슈틸레 힐페' 의 상징으로 활동했고 모임을 주최하거나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나치의 공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전쟁포로와 수감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책임지고 제공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치의 남미 도주에도 관여했고 아돌프 아이히만, 요제프 멩겔레도 이곳의 네트워크에 도움을 받았다. 이 조직은 옛 나치 당원들하고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오나치 운동을 위한 비자금을 공식적으로 모으기까지 했다.[4]

구드룬은 SS 상사이자 힘러의 측근이고, 수용소 수감자들이 가장 두려워했으며 가장 잔인했던 관리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전범 안톤 말로트가 2001년에야 유죄 판결을 받고 무기징역을 받았을 때 주요 지지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슈틸레 힐페는 말로트가 최고급 양로원에 거처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 양로원이 세금으로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많은 비판이 일었지만 그녀는 자신에게도 쏟아지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2년에 말로트가 죽을 때까지 꾸준히 면회를 갔다. 1952년에는 나치의 유겐트를 모방한 '비킹 유겐트'를 설립하는데 일조했다.(이 조직은 1994년 활동이 금지된다.) 전후 네오나치 활동의 주축인 '블랙 위도우'의 플로렌틴 로스트 반 퇴닝엔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

구드룬은 한때 뮌헨 근교의 고급 요양원에서 생활하였으며 근래에도 나치전범을 구원하고 원조하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예를 들자면 2010년에 슈틸레 힐페가 네덜란드 나치 전범 클라스 카렐 파버가 본국으로 인도되는 걸 막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심지어는 네오나치가 관여한 적이 있다는 뮌헨 올림픽 참사에도 구드룬의 개입이 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또 극우정당 NPD를 지지한다고 한다.[6]

2018년 5월 24일 자신이 생활하던 요양원에서 향년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7]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Andersen 2007, 165쪽.
  2. Helm, Siegfried (1998). “Himmlers Tochter hilft den alten Gefährten”. 《Berliner Morgenpost》 (독일어). 2008년 10월 5일에 확인함. 
  3. Katrin Himmler, The Himmler Brothers, Pan Macmillan, 2012, p.275
  4. “Gudrun Burwitz, ever-loyal daughter of Nazi mastermind Heinrich Himmler, dies at 88”. 《WashingtonPost》. 2018년 7월 1일. 2018년 7월 1일에 확인함. 
  5. Fabian Leber: Gudrun Burwitz und die „Stille Hilfe“: Die schillernde Nazi-Prinzessin; in: Der Tagesspiegel, 10 June 2001 (In German)
  6. Sanai, Darius (1999). “The sins of my father”. 《The Independent (London)》. 2008년 10월 5일에 확인함. 
  7. Germany, SPIEGEL ONLINE, Hamburg,. “Tod von Gudrun Burwitz: Heinrich Himmlers Tochter, Nazi bis zuletzt - SPIEGEL ONLINE”. 《M.spiegel.de》. 2018년 6월 30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편집

  • Andersen, Dan H. (2007). 《Nazimyter—blodreligion og dødskult i Det Tredje Rige》 (덴마크어). Aschehoug. ISBN 978-87-11-1184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