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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집사(鬼室集斯, ? ~ 688년[1] 음력 11월 8일)는, 7세기 백제의 왕족 출신 귀족으로, 백촌강 전투 이후에 일본에 망명했다. 백제 부흥 운동으로 활약한 귀실복신의 친척 또는 아들로, 후손으로 귀실미성(鬼室美成)이 있다.

백제에서는 달솔좌평을 역임했고, 일본 망명 후에는 소금하(小錦下)와 학직두(學職頭)를 역임했다. 761년 그의 후손들은 백제공(百済公)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귀실집사는 백제의 왕족으로 부여복신의 근친자라고 생각되지만, 정확한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복신의 아들 혹은 그의 친척이라 하며 구체적인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660년 이후 백제 부흥에 참여하였다. 집사(集斯)의 백제 위계는 달솔이었다. 《일본서기톈지왕 4년(664년) 2월조에는 귀실집사의 본래 관위가 달솔이었다고 하였고, 《일본서기》 톈지왕 8년조에는 관위가 좌평(佐平)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서기》는 귀실집사가 백제가 백강 전투에서 패하기 1년 전인 662년 백제 남녀 유민 400여 명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서, 오오미국(近江國) 가마에군(神前郡)-후의 가마자키군(神崎郡)-에 정착했다. 그해 음력 3월에 가마에군(神前郡)의 백제인들에게 논이 주어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5년 음력 2월에 톈지왕은 귀실집사를 12위 관품인 소금하(小錦下)에 임명하였다. 좌평(佐平) 복신(福信)의 공에 따라서 받은 직책이라는 설이 있다. 669년, 좌평(佐平) 여자신(餘自信)-본명은 부여자신(夫餘自信)이라고 추정-과 좌평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00여 인들이 오오미국(近江國) 가모우군(蒲生郡)에 옮겨졌다(오늘날의 일본 시가 현 가모 군 히노(日野) 정). 이때 정착한 백제 망명자는 모두 1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후손이 스즈카 산맥 류오산 아래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귀실집사를 모시는 귀실신사(기시쓰 신사)를 관리한다고 한다.[1]

671년 정월, 교육부 장관 격인 학직두(學職頭)에 임명되었다.[2] 쿠키 유키오(久木幸男)는 귀실집사가 가모우군(蒲生郡)에 옮겨지고 나서, 서임된 후 약 1년 남짓 동안에 일본의 대학료(大學寮)의 원형이 성립했고, 귀실집사가 그 장이 되었다고 하는 가설을 주장했다.

《일본서기》는 귀실집사가 일본에 이주하여 26년 동안 살다가 688년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1]

사후편집

761년 그의 후손들은 백제공(百済公)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일본 에도막부 시기, 오오미국(近江國) 가모우군(蒲生郡) 오노무라(小野村)-현재의 시가현(滋賀縣) 히노쵸(日野町) 오노(小野) 시-의 니시노미야(西宮) 신사에서, 팔각 석주가 발견되었다.

귀실집사묘(鬼室集斯墓)라고 그 오른쪽의 면에 ‘주오3년 무자 (음력) 11월 8일 조(殂)-귀인(貴人)의 사망을 말함-하시다(朱鳥三年戊子十一月八日殂).’, 왼쪽에는 '서손 미성(美成)이 세웠다(庶孫美成造)'라고 기재되어 있다.

주오(朱烏) 3년은, 지통(持統) 여왕 2년에 해당된다. 현재 이 신사는 귀실신사(鬼室神社)로 이름이 바뀌었다. 덧붙여 1994년에는 같은 히노쵸(日野町) 지역의 오오오자테라(大字寺) 터에 있는 노다미치(野田道) 유적(7세기 후반)으로부터, 온돌과 잘 닮은 정원석의 배치 화기 통로의 한국식 건축의 잔존물을 수반하는 수혈 주거자취가 출토되었다.

기타편집

귀실집사와 비슷한 무렵에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귀족 귀실집신(鬼室集信)이 있었다. 귀실집신은 그와 어떤 관계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하정민 (2015년 7월 22일). “한국에선 잊혀진 백제 왕족… 日서 1500년간 조상신 추모”. 동아닷컴. 2015년 10월 11일에 확인함. 
  2. 학식두(學職頭)는 일본의 율령제에서 대학두(大學頭)의 전신이라고 고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