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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전투(錦山戰鬪)는 임진왜란 당시 음력 7월 9일~음력 7월 10일, 음력 8월 18일에 걸쳐 금산에서 의병관군들이 싸운 전투로 의병들의 대표적인 혈전으로 꼽힌다.

목차

배경편집

당시 충청도 금산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이곳을 점령했다. 이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정암진, 웅치, 이치, 우척현 등 여러 전투에서 패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게 되었고 각지의 의병들이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1차 금산 전투편집

제1차 금산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고경명† 의병장
곽영 전라도 방어사
유팽로
안영
고인후
강희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
의병 7000명 1만 5700명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으로 막내 아들 고인후와 지금까지 모은 의병 7000명을 이끌고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8월 7일(음력 7월 1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연락해 금산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곳을 지키는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권율과의 이치 전투를 한창 벌이고 있었는데 고경명의 의병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중지하고 금산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고경명전라도 방어사 곽영과도 합류해 금산성을 공격했고 왜군은 조총으로 대항했다. 고경명은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와 30명의 특공조까지 편성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저녁이 되어 첫 전투가 끝나고 곽영이 철수를 하라는 했으나 고경명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해 다음 날 다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곽영의 관군이 싸울 뜻이 없는 것을 안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곽영의 진을 공격해 곽영이 후퇴하고 관군이 무너지자 의병들까지 무너졌고 고경명의 부하 유팽로안영이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고경명도 결국 전사했고 아버지의 목이 일본군의 창 끝에 걸린 것을 본 막내 아들 고인후가 나섰으나 그도 역시 전사해 창 끝에 목이 걸렸다. 전투가 종결되고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아버지와 동생의 목 없는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제2차 금산 전투편집

제2차 금산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조헌† 의병장
영규† 승병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병력
조헌 의병 700명
영규 승병 600명
총 군사력 1300명
1만 명
피해 규모
모두 전사함.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막대한 피해.

고경명이 전사한 뒤에도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금산을 탈환하려 했었는데 왜군은 금산을 탈환하려 북진하려던 보성남평의 군대를 공격해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는 등 기세를 꺾지 않았다.

이에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던 의병장 조헌이 나서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충청도순찰사 윤선각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군사만 축낼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전라도관찰사 권율경상도의 의병장 곽재우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권율은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 거절하고 곽재우도 금산 외에도 중요한 요지가 더 많다고 하여 거절했다.

결국 조헌은 혼자 출발했고 충청도관찰사 허욱이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나 이마저도 무시했다. 그리고 윤국형이 이끄는 관군의 방해로 1000명의 의병이 700명으로 줄었으나 전 청주 전투에서 함께 싸웠고 영규 대사가 와 승병 600명과 합류해 총 1300명의 군사가 되었다.

조헌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1차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청주성 탈환을 계획했다. 관군 및 영규대사가 이끄는 1000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7백 의병을 거느리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1만 5천 왜군과 2차 금산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아들인 조극관과 영규의 800 승군을 비롯한 전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리고 금산성 평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화살이 떨어지고 왜군과 육박전을 벌여야 할 상황이 오자 주변 사람들이 조헌에게 피신하라고 말했으나 조헌은 이를 거절하고 직접 불을 치며 군사에게 독전하다가 결국 전사했고 승병을 이끌던 영규 대사도 전사했다.

야사에 의하면 비록 패했지만 이들이 죽기살기로 저항했기에 왜군도 수천여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커서 우두머리를 난도질했는데, 아들인 조극관을 우두머리로 알고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 이들의 분전으로 왜군은 피해를 추스려야 했기에 호남 곡창 지대 방어에 큰 기여를 했다.

의병과 승병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역시 피해도 막대해 시체를 옮기는 데 3일이 걸렸으며 이후 700명의 시체들을 모아 금산에 '칠백의총' 이란 무덤을 만들었다.

결과 및 영향편집

금산에 주둔하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 제6군단은 결국 이치 전투웅치 전투에 이어 고경명의 의병과 조헌영규의 연합군과의 전투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음력 9월 7일 무주의 군사를 불러들이고 음력 9월 16일 옥천으로 철수했다.

전투 종합 인구 손실편집

조선은 5,000여명, 일본은 1,500여명의 손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