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망(金公望, 1482년 ~ 1528년 7월 1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위수(渭叟),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영후(金永煦)의 8대손이다.

생애 편집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일찍 아버지 상을 당한 후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06년(연산군 12)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주서(注書), 전적(典籍), 교검(校檢),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좌랑(刑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차례로 거쳤다.[1]

1511년(중종 6)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가[2], 이후 강원도사(江原都事), 공조정랑(工曹正郞),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쳤다.[1]

1515년(중종 10) 채세걸(蔡世傑)과 함께 지평(持平)으로 임명되자, 강릉(江陵)의 품관(品官)들이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금하도록 아뢰었다.

1518년(중종 13)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으나, 다른 사헌부(司憲府) 관원들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이후,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쳤다가 1521년(중종 16)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옮겼으나, 사헌부의 청으로 잉임(仍任)되었다.[2]

같은 해 자신의 청원으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으나, 어머니 상을 당했으므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상(執喪)했다.

1523년(중종 18) 삼년상을 마치고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을 거쳤으며, 이후 사도시정(司導寺正)으로서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이 때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5년째 되던 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1528년(중종 23) 47세로 졸했다.[1]

가족 관계 편집

본인의 묘갈명에 근거했다.

  • 증조 - 김환(金丸) :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영후(金永煦, 1292년 ~ 1361년)의 5대손
    • 조부 - 김종손(金宗孫) : 감찰(監察),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 아버지 - 김성(金城) : 충무위중부장(忠武衛中部將), 증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 어머니 -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
        • 형 - 김공량(金公亮, 1472년 ~ 1544년) :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안원군(安原君), 김주(金澍, 1512년 ~ 1563년)의 아버지
        • 형 - 김공석(金公奭, 1477년 ~ 1553년) : 청홍도수군절도사(淸洪道水軍節度使)
        • 부인 -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이복형(李復亨)의 딸 경주 이씨
          • 장남 - 김순(金淳) :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 차남 - 김이(金洢, 1515년 ~ 1580년) : 당진현감(唐津縣監)
          • 3남 - 김운(金沄)
          • 4남 - 김준(金浚)
          • 사위 - 조섬(趙銛)

각주 편집

  1. 『김공망 묘갈명』
  2. 『중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