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동
김명동(金明東, 1902년 /1903년 11월 25일[1] ~ 1950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헌·제2대 국회의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만(聖萬), 호는 이호(伊蒿)다.
김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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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헌·제2대 국회의원 | |
임기 | 1948년 5월 31일~1950년 6월 25일 |
군주 | 이승만 대통령 |
의장 | 신익희 국회의장 |
총리 | 이범석 국무총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03년 11월 25일 |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공주 |
사망일 | 1950년 6월 25일 | (46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학력 | 한문사숙 |
경력 | 신간회 중앙상무집행위원 홍성노동조합조직위원장 공주치안유지회위원장 대한중앙협의회 총본부 총무 반탁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조직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조선유교대동사 조직, 중앙집행위원 제헌 국회의원(대한민국/제1공화국) 제2대 국회의원(대한민국/제1공화국) |
본관 | 안동(安東) |
종교 | 유교 |
생애
편집1903년 11월 25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공주군에서 아버지 김복한(金福漢, 1860. 7. 24. ~ 1924. 5. 4.)과 청주 이씨(1882 ~ 1905. 2. 6) 이주찬(李周讚)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한문사숙(漢文私淑)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정1품)으로 강화도에서 농성하다가 순절한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 2. 16.) 우의정의 후손으로 조상들이 대대로 현감(縣監:종6품)으로부터 군수(종4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전라도 관찰사(종2품), 이조 참판(吏曹參判:종2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직에 출사(出仕)한 명문가의 자제였다. 8.15 광복 후 우익(右翼) 정치인으로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상무집행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공주지회 회원, 민족통일총본부 공주군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공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제헌 국회의원 직위에 재임하였다. 이후 국회에서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6월 4일 국회법 기초위원에 선임되며 국회법을 만드는데 기여하였고 같은 해 8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위원에도 선임되었다.
1949년 대전, 충남지역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위원을 지내며 김갑순을 기소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해 8월 업무상 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가, 제헌 국회에서 그에 대해 임기 말까지 형집행정지를 시키기로 하는 석방결의안이 가결되어 10월 4일 석방되었다. 1950년 1월 업무상 횡령 및 뇌물수수, 공갈죄, 협박죄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에서 공소를 제기하였다. 임기 중 6.25 전쟁이 생기면서 9명의 비서들과 45명의 경호대들로부터 보좌를 받으며 피신하였으나 향년 4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약력
편집역대 선거 결과
편집실시년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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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 총선 | 1대 | 국회의원 | 충남 공주군 갑 | 무소속 | 10,676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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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초선 | |||
1950년 | 총선 | 2대 | 국회의원 | 충남 공주군 을 | 대한국민당 | 6,518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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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재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