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열직공)
생애
편집젊어서 학문에 힘써 문과에 급제했다.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1107년(예종 2) 전라주도안무사(全羅州道安撫使) 최위(崔渭)가 수령들의 성적을 조사할 때 김진을 최고로 꼽았다.
이후 우보궐(右補闕),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 비서소감(秘書少監)을 거쳤는데, 청주에서도 역시 선정을 베풀었다.[1]
1111년(예종 6) 전중감(殿中監)으로서 요에 사신으로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이듬해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서 다시 요에 사신으로 가서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했다.
1119년(예종 14) 호부시랑(戶部侍郎)으로 재직 중 동북면병마부사(東北面兵馬副使)로 나갔으며[2], 이후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 어사대부(御史大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차례로 거치고 1125년(인종 3)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명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척준경(拓俊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숙직하다가 궁궐이 불타는 것을 보고 이렇게 탄식했다.
“ | 나는 평생에 졸직(拙直)하고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아 이자겸·척준경과 틈이 있었으니, 나가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자진(自盡)하는 것이 낫다. | ” |
그러고는 종자를 시켜 문을 닫게 하고 불에 타 죽었는데, 향년 5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