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근 (야구인)
김호근(1960년 6월 29일 ~)은 KBO 리그의 전 야구 선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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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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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
생년월일 | 1960년 6월 29일 | (63세)|||
출신지 | 대한민국 | |||
신장 | 175cm | |||
체중 | 75kg | |||
선수 정보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수비 위치 | 포수, 지명타자 | |||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 |||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롯데 자이언츠) | |||
첫 출장 | KBO / 1983년 | |||
마지막 경기 | KBO / 1993년 | |||
경력 | ||||
선수 경력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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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83년 고향 팀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나 국가대표 출신 심재원에게 밀려 같은 해 12월 15일 2대 1 트레이드를 통해 삼미 유니폼을 입어 고향을 떠났지만[2] 이적 첫 해인 1984년에는 주전 포수 김진우의 그늘에 가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뒤, 1985년에는 김진우의 부상, 3년생 박명운의 부상 등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포수진이 붕괴되어[3] 시즌 초 주전 포수를 맡았지만 김진우의 복귀와 함께 백업으로 밀려났고 같은 해 말 공격형 포수의 보강을 위한 OB의 요청에 따라 1대 2 트레이드를 통해OB 유니폼을 입었으나[4] 이적 첫 해인 1986년 두자릿수 홈런(10개)을 기록했을 뿐 그 이후에는 이렇다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1990년에는 단 두 경기만 출전한 채 4월 27일 쌍방울로 현금 트레이드됐으며[5] 1993년을 끝으로 은퇴한 뒤 한동안 프로야구계 복귀와 거리가 멀었다. 그 뒤, 쌍방울 시절인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감독으로 인연을 맺었던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6년 5월 3일 한화 2군 배터리코치를 맡으면서 프로야구계로 돌아왔는데[6] 2009년 6월 22일 분위기 쇄신을 위해 1군 배터리코치로 보직이 변경됐으며[7] 같은 해 말 한대화 감독이 부임하면서 생긴 개편에 따라 팀을 떠났고 2013년부터 감독을 맡았던 우경하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8]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2017년 감독대행을 맡았다가 2018년부터 감독으로 재직[9] 중이다.
출신 학교
편집각주
편집- ↑ http://www.statiz.co.kr/player.php?opt=0&name=%EA%B9%80%ED%98%B8%EA%B7%BC&birth=1960-06-29
- ↑ “자이언츠 金鎬根(김호근)-金德烈(김덕열)선수 슈퍼스타즈 李光吉(이광길)과 맞교환”. 조선일보. 1983년 12월 16일.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박희송 (1985년 4월 18일). “「슈퍼스타」왜이름값도 못하나”. 조선일보.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OB 鄭善斗(정선두)·姜哲元(강철원) 靑寶(청보) 金鎬根(김호근) 맞바꿔”. 경향신문. 1985년 11월 25일.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OB포수 金(김)호근 쌍방울로”. 경향신문. 1990년 4월 27일.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프로야구소식> 한화, 2군 배터리 코치에 김호근씨”. 연합뉴스. 2006년 5월 3일.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김영환 (2009년 6월 22일). “한화, 코치진 물갈이로 반전 꾀한다”. 이데일리.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박창규 (2015년 12월 15일). “고려대 야구도 입시비리 정황…감독 출국금지 조치”. JTBC.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
- ↑ 김홍남 (2018년 5월 2일). “[2018년 4월호] 열정맨 김호근 감독, 그가 논하는 야구지도철학”. SPORTS KU. 2021년 6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