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 반란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09년 9월) |
니카 반란(그리스어: Στάση του Νίκα, 영어: Nika riots)은 532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 일주일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고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수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진압으로 약 수만 명(3만 명 이상)이 죽었다.
배경
편집고대 로마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경주가 상당히 발달했고 인기를 끌었다. 제국 전역에 큰 도시는 대부분 히포드롬이라고 부르는 원형경기장이 있었다. 또한 각 전차경주는 4개의 팀으로 나뉘어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색깔의 유니폼을 입어 서로를 구분했는데 각각 적색, 청색, 녹색, 백색이었다. 로마 제국에서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4개의 전차경주팀은 2개로 줄어 녹색당과 청색당이 남았는데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각각 큰 파벌을 이루고 현대의 정당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 당시 청색당은 주로 대지주와 그리스-로마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고 그래서 전통 기독교인들이 많았는데 반해 녹색당은 상인, 기술자 등 중간 계층이 주로 후원했고 종교적으로는 단성론에 가까웠다.
양 파벌은 마치 정당처럼 조직을 이루고 지도자를 선출했으며 황제는 중요한 공공사업을 그들을 통해서 벌였고 심지어 각각 사병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양측은 서로 빈번히 충돌했는데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의 시기인 493년, 501년, 511년에 충돌했고 특히 511년에는 황제가 직접 나서서 황제의 직을 걸고 폭동을 해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할 당시 청색당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지에 입는 바가 컸는데 점차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지자 녹색당뿐만아니라 청색당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거기에 트리보니아누스와 카파도키아의 요한 등 휘하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로 시민들의 불만이 점차 팽배해졌다. 532년 1월 10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벌어진 전차경기가 끝난 후 청색당과 녹색당이 서로 충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황제는 즉각 군대를 투입해 질서를 회복했는데 이것이 니카 반란의 발단이 되었다.
반란의 경과
편집1월 10일의 충돌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지도자를 처형하고 감금했는데 이에 반대하는 양 세력이 서로 힘을 합쳐 시위를 벌였다. 사흘 뒤 전차경주가 재개되었으나 성난 군중은 편을 갈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두 황제를 향해 승리를 의미하는 "니카!"를 외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황제는 피신하고 경주를 중단시켰다. 군중은 더욱 화가 나서 경기장을 뛰쳐나와 폭동을 일으켰고 감옥을 부수고 관리들의 집에 무차별 방화를 하였다. 이때 발생한 화재로 원로원 의사당, 하기아 소피아 성당까지 불에 타버렸다.
폭동은 다음날과 그 다음날도 계속되었고 황제는 군중의 요구대로 관리들을 경질했으나 군중은 전임 황제의 조카인 노인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경기장에서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황궁으로 피신했다. 황제와 측근들은 도망갈 채비를 하고 막 도피를 논의 했다.
그 때 황후 테오도라가 회의장에서 황제를 꾸짖으며 당당히 맞서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도망쳐서 안전할 수 있다하더라도 도망가서는 안되며 황제로서 부끄럽게 도망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은 끝까지 황궁을 지키겠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을 듣고 황제와 측근들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란진압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라는 장군을 불러들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벨리사리우스와 문두스는 몰래 군대를 이끌고 히포드롬으로 가서 동시에 무차별로 군중을 학살했다. 또 다른 장군인 환관 나르세스는 군중들이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막았고 경기장 안에서만 약 3만 명의 군중이 학살당했다. 군중들로부터 얼떨결에 황제로 추대된 노인 히파티우스도 황제 앞에 잡혀왔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가 자신의 의사에 반해 황제로 추대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용서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황후 테오도라가 제지하며 처형을 주장했다. 한번 군중에 의해 제관을 받은 몸이니 나중에라도 반란의 핵심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결국 히파티우스도 처형되었고 이로써 반란은 모두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