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도지 아야코
다이도지 아야코(일본어:
구성은 고마자와 아야코(일본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반에 참가하여 미츠비시중공 폭파사건 등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4] 미츠비시 사건 때는 시한폭탄 설치현장에서 망을 보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직 내에서의 코드네임은 “아사카와”. 아사카와 마키의 팬이었기 때문이었다.[5]
1975년 5월 19일, 폭발물취체벌칙 위반 혐의로 남편과 함께 긴급체포되었다.[1] 체포 직전 청산가리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수사관들에게 저지되었다. 수려한 용모와 주변의 평판으로 인하여, 처음 체포된 후 수사과정 및 언론보도에서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과격사상에 끌려들어간 종범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동정론이 있었다.[6][7] 그러자 아야코는 오히려 그런 목소리에 반발하여 에키다 유키코 등과 함께 격렬한 옥중투쟁・법정투쟁을 벌였다.[6][8][9]
1977년 일본적군이 다카 사건을 일으키자 후쿠다 내각의 “초법적 조치”로써 에키다와 함께 석방・출국하여 일본적군에 합류했다. 1985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지원자들에게 투쟁을 계속하자는 호소문을 발표했다.[10] 1994년 6월, 사문서위조 혐의로 인터폴을 통해 국제수배되었다.[11] 1999년 홍콩에서 마츠다 히사시・시게노부 후사코와 회동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12]
2001년 시게노부 후사코가 옥중에서 일본적군의 해산을 선언하자 남미에서 반도 쿠니오와 함께 「일본적군 해산선언 무효선언」을 발표했다.
2022년 현재 생사 불명이며, 여전히 국제수배 중이다.
각주
편집- ↑ 가 나 “第075回国会地方行政委員会第20号”. 衆議院. 1975년 5월 22일. 2010년 7월 16일에 확인함.
- ↑ 「あや子が勤務していた会社の社長は、彼女を評して、『日本女性の美徳をすべて備えた女性だった』と、爆破犯と判った今もいっているほどだ」週刊サンケイ、1975年6月12日号
- ↑ 「あたしゃあ、あの若夫婦がひいきでしたからネ(中略)できれば警察が張り込んでることをあの二人に教えてあげたいと思いましたよ」(大道寺夫妻の住んでいたアパートの大家談)週刊ポスト、1975年6月6日号
- ↑ “東京・丸の内で三菱重工ビル爆破事件”. 朝日新聞. 2009년 4월 28일. 2009年5月1日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5월 17일에 확인함.
- ↑ 連続企業爆破事件 北海道庁爆破事件
- ↑ 가 나 「男の従者」という解釈と戦った女兵士-「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もうひとつの闘争サイゾーウーマン、2013年5月7日
- ↑ 「尾行した刑事さんも逮捕後『彼女が一生懸命生活しているのがよくわかるんで、何かとっても哀れだ』といっていましたね」(大道寺夫妻の住んでいたアパートの大家談)、「彼女が夫を愛していただけに、ずるずると従った。そう思えて、ならないんです」(かつて勤務していた病院の医師談)ヤングレディ、1975年6月9日号
- ↑ はじめに――獄中のたたかいの経過「呼び声は獄舎を越えて 荒井まり子獄中書簡集」、1980年7月10日
- ↑ 雑報「呼び声は獄舎を越えて 荒井まり子獄中書簡集」、1980年7月10日
- ↑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闘いの軌跡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資料室
- ↑ “5 国際テロ (2) 日本赤軍”. 《平成7年 警察白書》. 警察庁. 2022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読売新聞、2001年4月3日付朝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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