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쿠안 소호(일본어: 澤庵宗彭, 1573년 12월 1일 ~ 1645년 12월 11일)는 일본 에도 시대의 승려이다. 잇큐 소슌과 함께 임제종 다이도쿠지 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1] 1609년 다이도쿠지의 제153대 지주가 되었고[1], 고미즈노오 천황을 비롯하여 고노에 노부타다(近衛信伊), 가라스마루 미쓰히로, 고노에 노부히로(近衛信尋) 등 유력한 조정의 신하들과 교류하였고, 호소카와 유사이 등과도 참선 및 와카를 통하여 교류하며 와카, 다도, 일본식 조경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1]

1627년 7월, 다쿠안은 "자의 사건"에 연루된다.[2] 이 사건은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반포한 "다이도쿠 제법도"에 명시된 내용과 관련되어 발생한 것으로, 천황의 허가를 받고 다이도쿠지 주지로 취임할 때 보라색 옷, 즉 자의를 입는 것이 사전에 막부에 고지되어야 한다는 조항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법도가 제정된 이후 승려가 된 자의 자격을 무효로 하고 자의의 착용을 정지하였다.[2] 이러한 조치 이후 막부는 다이도쿠지의 승려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다쿠안과 고게쓰 (江月) 등 북파 승려들은 법도의 부조리성을 지적한 글을 막부에 올렸다. 그러나 막부에서 상소의 내용이 승록[주 1]곤치인 스덴과 막부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아, 대승정 덴카이 쇼닌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데와국 가미노야마성 성주인 도키 요리유키에게로 유배되었다.[2]

그러나 다쿠안은 도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으며 2년 동안 가미노야마에서 생활하다 에도로 다시 소환되어, 1634년에 사면되었다. 그 후 다쿠안은 다이도쿠지의 출가 복구 운동을 진행하였다.[2] 그러다 도쿠가와 이에미쓰검술 사범으로 일하던 야규타지마노가미 무네노리(柳生但馬守宗矩)의 중개로 이에미쓰와 대면하였다.[3] 이에미쓰는 다쿠안을 점점 가까이하게 되었으며, 1637년 10월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면서부터 다쿠안은 막부의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3] 난이 기독교도의 집단 봉기 양상을 띈데다 장기화되어가자 전문 지식을 가진 종교인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결국 다쿠안이 난의 처리를 위임받게 되었다.[3][주 2] 이에미쓰는 에도 인근의 무사시시나가와도카이지를 건립하여 이 사건에 대응하려 했는데, 도카이지 창립 이후 다쿠안을 절의 개조(開祖, 첫 주지)로 임명하여 막부가 제공한 500석의 영지를 근거로 해 지주 신분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종교 행정의 고문으로 활동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3][4] 다쿠안은 곤치인 스덴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거부했지만 절의 첫 주지가 되는 것은 승낙하였다.[4]

이후 이에미쓰는 도카이지를 자주 드나들었고, 사카이 다다카쓰호리타 마사모리의 측근이 절 내에 작은 암자를 운영하고, 고보리 엔슈가 정원을 조영하는 등 다쿠안은 막부 사람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4] 1641년에는 다이도쿠지의 출가가 부활하였으며, 1645년 12월 다쿠안은 "몽"(夢)이라는 한 글자를 남기고 사망했다.[4]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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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승려에 관한 모든 기록을 맡은 사람
  2. 다만 이는 이에미쓰와의 사적 관계에 의한 것으로, 다쿠안에게 공식적인 신분이나 직위가 제수된 것은 아니다. (고미, 237쪽)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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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 235쪽
  2. 고미, 236쪽
  3. 고미, 237쪽
  4. 고미, 238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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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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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미 후미히코 씀, 한은미 옮김, 《2천년 일본사를 만든 일본인 이야기》 (2003년), 이손사, ISBN 89-87095-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