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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핵무기 개발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진되었다.

역사편집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차 시도

1939년 4월 최초의 핵개발을 시작했다. 1938년 12월 핵분열 현상이 발견된 지 한달 뒤였다. 그러나 한달간 연구하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명한 물리학자들이 베어마흐트에 징병되었기 때문에 연구가 종료되었다.

2차 시도

2차 핵개발은 1939년 9월 1일 시작되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날이다. 프로그램은 원자로, 우라늄과 중수 생산, 우라늄동위원소라는 3가지 목표로 점차 확장되었다.

전후편집

세계 대전에 패전한 독일은 핵무기 개발은 하지 않았지만 실질상 핵무기 개발이 가능한 기술력을 보유한 국가다. 세계 대전 당시 간교한 나치는 하이젠 베르크라는 과학자 등을 동원하여 나치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우라늄 클럽'을 만들게 하여 핵개발을 연구하였다.(일설에 의하면 그 시기는 1939년 때 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세계 대전중에 독일은 핵무기 개발을 하지 못하였고 하이젠 베르크는 세계 대전이 끝난후 핵무기 재무장 등의 계획을 반대하였다. 그러한 독일 학자들의 주장은 이른바 '괴팅엔 선언'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현재 독일은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터키와 NATO(북대서양 방위 조약 기구)가입국가다. 독일은 세계 대전 당시에도 원자폭탄 제조에 사용되는 우라늄 등의 물리학, 화학 연구가 진행되었기에 핵무기 개발의 관한 경제적, 제반적 능력이 있었다면 어쩌면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을지도 모르는 역사가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막고자 하는 노력은 영국의 스릴라드라는 물리학자가 진행한 사실이 있다. 그는 독일 베를린 대학의 스승 아인슈타인과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위해 벨기에 대사에게 나치 독일에게 핵무기 개발 원소인 우라늄이 옮겨지는 일을 막는 일들을 이행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비공식 고문인 작스의 제의로 직접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1939년 8월 2일에 보내질 편지를 작성하였다. 아인슈타인이 서명한 이 편지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지만 아인슈타인은 대량살상무기 규모의 막대한 인명의 피해를 주는 형태로 자신의 노력이 이루어진것에 후회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을 독일보다 먼저 하여 세계 대전의 승전보를 이루고자 하였고 결국 세계 대전은 연합국가의 승리로써 끝이 난다.

1962년편집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미사일 방어가 없었다. 소련 ICBM이나 SLBM은 미국의 조기경보레이다에 포착되어, 미국도 동시에 맞발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쿠바에 배치된 SS-4는 1,800 km 떨어진 워싱턴 DC와 너무 가까워서, 조기경보가 되기 전에 핵공격을 완료할 수 있어서, 미국이 크게 위협받았다.

1964년편집

1964년 미국의 MGM-31 퍼싱 I 핵미사일이 서독, 한국에 배치되었다.

1969년편집

일본은 1960년대 서독 정부에 핵무기 개발을 함께 추진하자고 제의를 했었다가, 서독 정부로 부터 거절을 당했다.[1] 당시 일본 외무성 당국자는 "국제적으로 감시해도 핵분열 물질의 5% 정도의 추출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핵탄두 생산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2] 보통 원전 연료용 저농축 우라늄의 수출입 과정에서 많은 오차가 생기곤 한다.[3]

1983년편집

1983년 미국의 퍼싱 II 핵미사일이 독일에 배치되었다. 독일 사민당(SPD)의 국방전문가였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는 원래 유럽의 나토국가 내의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의 선제공격 목표가 되기 때문이며, 같은 이유로 아데나워 수상이 시도했던 서독의 독자 핵무기 소유 역시 반대하였다. 그러나 슈미트 수상은 1977년 런던에서 ‘소련이 바르샤바조약 국가에 배치한 신형 중거리핵미사일 SS-20이 유럽의 군사균형을 결정적으로 깨뜨렸다’는 연설을 함으로써 1979년 나토는 이중전략을 결의하였다. 그것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SS-20을 철거하도록 만들 수 없다면 4년 후인 1983년 말부터 미국은 신형 중거리핵미사일 퍼싱 II를 나토국에 전면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퍼싱 II의 배치를 놓고 당시 서독에서는 시민, 지식인과 학생 심지어 군인들도 참가한 거대한 평화운동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정확도가 극히 높아져 폭발력이 낮아진 퍼싱II는 적의 지휘부와 벙커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선제공격무기이며, 따라서 소련의 재래식 침공에도 나토가 핵전쟁을 먼저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나토의 이중전략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으로 하여금 군비경쟁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1987년 INF 조약으로, 유럽에서 모든 중거리핵미사일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았다.[4]

당시에는 미사일 방어가 없었다. 미국 ICBM이나 SLBM은 소련의 조기경보레이다에 포착되어, 소련도 동시에 맞발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독에 배치된 퍼싱 II는 1,800 km 떨어진 모스크바와 너무 가까워서, 조기경보가 되기 전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어서, 소련이 크게 위협받았다. 워싱턴에서 1,800 km 떨어진 곳은 쿠바이다.

2017년편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일의 과도한 무역흑자를 지적하며, 막대한 주독미군 주둔비를 요구했다. 유럽에는 유럽 최강대국 독일에 미군이 가장 많이 배치되어 있다. 2017년 3월 17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방위비 분담금 명목으로 3740억 달러(419조8000억원)을 요구했다.[5] 이러한 과도한 요구에, 독일 주류 언론과 정치권은 독자 핵무장론을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이미 생산된 프랑스의 핵폭탄을 독일, 이탈리아 등에 배치한 뒤 'EU 총사령부'와 같은 기구를 신설해 여기서 관리하자는 것이다.[6]

각주편집

  1. 日, 1960년대에 핵무기 개발 시도..서독과 접촉, 파이낸셜뉴스, 2010-10-04
  2. 40년전 日 정부 "핵보유 능력 있다", 연합뉴스, 2010-11-30
  3. 수입 천연.농축우라늄 어디로 갔지?, 노컷뉴스, 2005-10-06
  4. ‘북핵 실제 반대’ 중국환상과 우리의 대북정책 실패, 데일리NK, 2016-09-19
  5. 트럼프, 정상회담때 獨에 420조원 방위비 청구서, 문화일보, 2017-03-27
  6. [남정호의 시시각각] 독일 핵무장론, 우리 운명 가른다, 중앙일보, 2017-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