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홍하(杜洪夏){{일반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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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홍하'''(杜洪夏, [[1841년(현종7)]][9월 14일]]∼[[1927년]][5월 6일]] 전라도 옥구현)은 [[조선말기]]의 [[군산]] 지역(옛 옥구현) 출신 유학자이며, 품계는 정3품 통정대부이다. 본관은 [[두릉(杜陵)]]이고, [[군산시( 옛 옥구현)]] 회현면 금광리에서 출생하였다.[1]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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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홍하(杜洪夏)은 두릉두씨 시조 두경령(杜慶寧)의 25세손이고, 고려 명종조에 김보당난과 조위총난을 평정한 공으로 삼한후벽상공신에 봉해지고 문하시중을 역임한 경승공의 19세손이고, 가선대부에 증직된 효자 세준공의 14세손이며 통훈대부로 비인현감 및 강령현감을 역임한 사순공의 12세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옥구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웅치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 순절한 의병장 두정란장군의 11세손이다. 조선말기 군산지역 자선가인 두필규 (杜必奎)공의 아들이다.[2]


두홍하의 가문의 연원은 두릉두씨(杜陵杜氏)의 족보와 중앙일보사(中央日報社)에서 발행한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과 『한국인의 족보(韓國人의 族譜)』등의 문헌에 따르면, 시조(始祖) 두경녕은 중국 송(宋)나라의 두릉인(杜陵人)인데 송의 태종(太宗) 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그는 진종(眞倧)의 옹립은 반대하다가 실패하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죄천되자, 이에 아들인 중서사인(中書舍人) 두지건(杜之建)과 우습유(右拾遺) 두지봉(杜之逢) 형제를 데리고 정처없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1004년(목종 7)우리나라의 궁지현(宮池縣: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읍,만경현(萬頃縣)에 있는 궁지도(宮池島)라는 지금의 고군산도(古群山島)에 표착하게 고려에 귀화하였다[1,2]. 당시 고려의 조정에서는 이 사실의 알고 목종(穆宗)이 두경녕에게 좌사관(左史官)이란 벼슬을 내리고 궁지현(宮池縣)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두릉군(杜陵君)에 봉했다.[1,2].


==활동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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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성하(成夏) 재휘(再諱) 경하(敬夏) 자는 화연(華蓮) 호는 신재(愼齊) 1841년(현종7) 9월 14일 회현면 금광리 출생하였다. 1899년(고종36) 7월 선원전(창덕궁) 참봉을 지냈으며, 품계는 정3품 통정대부이다. 천성온후(天性溫厚)하고 항상 조심(杰於勤愼)하며 가정전통 작위이어 가정이 화목했다. 선친은 필규공이고 어머니 제주고씨는 부녀자로 덕행이 훌륭하였다. 어려서 재주가 뛰어나고 기질이 특이하여 뭇 아이들과 노는 것이 다르고 서당에 나가서 수학할 때 스승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며 재주가 남에게 못 미치는 것처럼 겸손하여 보는 사람이 노숙에 감탄했다. 부모님 섬김에 주무실 때마다 방이 따뜻한지 여부 살폈고 몸이 아프면 손가락의 피를 내어 부모 입에 흘려 병을 고치려고 효도하며 살림이 부족하지 아니할 때나 부모상 당하거나 묘가 훼손되면 산에 가서 돌을 다듬어 묘를 돌보는 정성 다하고 손님을 공경하며 집안일을 돕는 사람을 믿음과 은혜와 의지로 다스리고 근검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처신하며 이웃을 돕고 어려움을 닥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아 가산을 썼다. 길손이나 떠도는 사람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가르침으로 느끼게 하고 형제와 공부하는 마을에 정사(집) 건립하고 유명한 스승을 초빙하여 학숙하며 자녀와 마을 아이를 가르쳤고 공부 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공부할 수 있게 하여 성공한 자가 많았다. 항상 아이들 훈육에 “하늘 응용하는 이치는 땅의 이로움으로 인하니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물자 절약하고 부모님을 효도로 봉양하며 선조 위한 일에 힘쓰고 숭상하며 마음에 새겨 잊지 말라”고 했다. 1927년 5월 6일 질병으로 87세 사망했다.[3][4]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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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 회현 원당 두릉두씨 납골당(시제;원당 崇慕齋 가족제)[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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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아이들 훈육에 “하늘 응용하는 이치는 땅의 이로움으로 인하니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물자 절약하고 부모님을 효도로 봉양하며 선조 위한 일에 힘쓰고 숭상하며 마음에 새겨 잊지 말라”고 했다. 공의 훌륭한 것이 많으며 세월이 오래되어 공이 이룩한 공적이 다소 없어지고 빠진 부분이 있고 아쉬운 점이 있어서 한스럽지만 대략을 적었다. 공의 공적을 잊지 않고 길이 보존하기 바라노라.[6]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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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13권 두경승편

* 『신증동국여지승람』

*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 『옥구 군지』(옥구 군지 편찬 위원회, 1963)

* 『옥구 군지』(옥구 군지 편찬 위원회, 1990)

* 『옥구인물지』(옥구 문화원, 1991)

* 『전라 문화의 맥과 전북 인물』(전북 대학교 전라 문화 연구소, 1990)

* 『두릉 두씨 세보』(1898)

* 『두릉 두씨 세보』(1925)

*『杜陵杜氏 世譜』1961년(辛丑)

* 『두릉 두씨 세보』(1986)

*『청백 교직자 청담 두진열 선생』( 청담 두진열 선생 추모문집발간위원회, 대학서림, 2019)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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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841년(현종7) 9월 14일]]

[[분류:1927년 5월 6일]]

[[분류:전라도 옥구현(현 군산시)출신]]

[[분류:조선말기 유학자]]

[[분류:정3품 통정대부]]

[[분류:두릉 두씨]]

  1.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2. 『옥구 군지』(옥구 향교, 1924)
  3. 『청백 교직자 청담 두진열 선생』( 청담 두진열 선생 추모문집발간위원회, 대학서림, 2019)
  4. 『杜陵杜氏 世譜』1961년(辛丑)
  5. 『두릉 두씨 세보』(1986)
  6. 『杜陵杜氏 世譜』1961년(辛丑)
  7. 『청백 교직자 청담 두진열 선생』( 청담 두진열 선생 추모문집발간위원회, 대학서림,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