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돌칼
반달돌칼은 청동기 시대에 사용한 석기이다. 그 생김새가 대체로 한쪽이 곧고 다른 한쪽이 둥근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반달돌칼이라고 한다. 형태에 따라 어형(魚形)·주형(舟形)·즐형(櫛形)·장방형(長方形)·삼각형(三角形)으로 세분된다.[1] 랴오허강 유역에서부터 한반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전역에 걸쳐 분포한다.[2]
경상남도 창원시 외동의 성산마을에 있는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시기의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사적 제240호이다.[3] 청동기시대에 곡식의 낟알을 거두어들이는 데 쓰던 농기구이다.[4] 이칭 반월 형석도이며 선사/청동기 시대에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5] 소장처는 국립경주박물관이며 제작 시기와 일시는 청동기 시대이다. 재질은 돌이다.[6] 반달 돌칼은 한쪽은 곧고, 다른 한쪽은 반달 모양이라고 하여 반달 돌칼이라고 하며, 반달 모양이 일반적이지만 긴 네모 모양이나 삼각형 모양인 것도 있다.[7]
개요
편집주로 점판암계통의 석재를 이용해 타원형이나 반월형 등의 편편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중앙부에 한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8] 그 생김새가 대체로 한쪽이 곧고 다른 한쪽이 둥근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반달돌칼이라고 한다.[9] 수확구(收穫具)의 일종이며 한반도 전역에 걸쳐 출토되고 있다.[10] 청동기시대의 곡식의 이삭을 따는 도구로 몸체에 구멍이 뚤려 있고 이 구멍에 끈을 꿰어 손에 걸어서 사용하였다.[11] 반달돌칼이 처음에는 밭작물의 수확용구로 쓰였지만 서남부의 삼각형석도는 벼 수확 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2] 반달돌칼은 수확 도구로서의 용도 외에도 물질을 자르거나 베는 칼의 기능과 함께 삼의 껍질을 벗기는 삼칼로서도 이용되었다.[13]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14]
역사
편집반달돌칼은 원래 중국 화북지방 농경문화의 수확도구로 출발한 것이나, 신석기시대 말부터 중국 동북 지방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여 청동기 시대의 수확 용구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15] 반달돌칼은 농경의 도구임이 분명하나 농경의 시작과의 관계는 명확하지가 않다. 반달칼 사용 이전인 황해도 지탑리 지층에서 탄화된 조와 함께 곰베괭이가 발견되어 반달칼 이전으로 농경이 소급될 증거가 있다.[16] 게다가 반달칼은 수확의 도구이지 재배하는 도구는 아니라는 점에서 반달칼과 농경의 관계는 아직 불분명하다.[17] 다만 삼각형돌칼이 남한지역과 일본의 도작의 증거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18] 이러한 돌칼은 돌낫과 함께 청동기시대 후기까지 주요 수확구로서 계속 사용되었으나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러 철제 반달칼 ·철제 낫 등으로 대체되었다.[19] 한국에서 이처럼 반달칼이 많이 드러나는 사실은 그때 사람들의 생산 활동에서 농업의 비중이 컸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이 칼은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20]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삼각형과 단주형(短舟形)의 돌칼이 발견되는데, 이들 모두는 한반도에서는 가장 늦은 시기의 것이고 남부지방에서 성행한 것으로 일본에의 농경 전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1]
우리나라의 주형석도를 창강유역의 그것과 결부시키는 학설도 있으나, 우리나라의 주형은 요동반도의 어형에서 자체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22] 반월형석도의 전파는 중국 화북농경문화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잡곡농사와 관련된 수확구로 쓰이다가 벼농사와 본격적으로 결부된 것은 단주형석도와 삼각형석도가 성행한 시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생각된다.[23] 반달돌칼은 농경의 도구임이 분명하나 농경의 시작과의 관계는 명확하지가 않다.[24] 반달칼 사용 이전인 황해도 지탑리 지층에서 탄화된 조와 함께 곰배괭이가 발견되어 반달칼 이전으로 농경이 소급될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25] 게다가 반달칼은 수확의 도구이지 재배하는 도구는 아니라는 점에서 반달칼과 농경의 관계는 아직 불분명하다.[26] 이러한 돌칼은 돌낫(石鎌)과 함께 청동기시대 후기까지 주요 수확구로서 계속 사용되었으나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러 철제반달칼, 철제낫 등으로 대체되었다.[27]
분류
편집전체적인 형태와 날부분과 등부분의 형상, 즉 외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28] 대체로 물고기 모양[魚形] ·배 모양[舟形] ·장방형 ·삼각형으로 분류되는데, 직사각형과 반달형이 기본형이며 후기에는 삼각형이 출현한다.[29]
반월형석도
편집반월형석도는 형태상 어형(魚形)·주형(舟形)·즐형(櫛形)으로 분류되며 여기에 일반적으로 장방형 및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도 첨가된다.[30] 장방형석도는 등과 날이 모두 곧은 형태로 날은 대부분 양인(兩刃)이다.[30] 주로 동북지방에 집중분포하고 있으며 압록강 중·상류유역에도 상당수 발견되었다.[30] 신석기시대 말기와 청동기시대에 다량 출토되고 있다.[30]그리고 동북지방은 반달돌칼문화가 전파되었지만 농경이 어려워서인지 반달칼이 널리 쓰이지 않았으며, 장방형의 돌칼이 많이 쓰였다.[30] 반월형석도는 중국의 황하 중·상류유역에서 양사오(仰韶)시기에 발생해 이후 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다.[31] 중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형태는 양측결구(兩側缺口)의 타제장방형도이며 마제의 장방유공도(長方有孔刀)는 전자보다 약간 늦은 양사오 중기부터 출현하였다.[32] 이후 장방단공(長方單孔)은 황하 중류(黃河中流)에서, 장방쌍공(長方雙孔)은 황하 하류에서 성행하였다.[33]
즐형석도
편집즐형석도는 외만배(外彎背)에 직인(直刃)이 붙은 형식으로 대부분 양인이다.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압록강 중·상류유역과 동북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34] 초기철기시대에 보이는 철제반월도도 대부분 이 형식이다.[35] 어형석도는 날과 등이 모두 외만한 것으로 단인(單刃)이 많다.[36] 신암리·용연리(龍淵里)·서포항(西浦項) 등에서 신석기 말기부터 출현해 압록강 하류에서는 청동기시대에도 계속 주류를 이룬다.[37] 대동·재령강유역 및 중남부지방에서도 일부 출토된다.[38] 어형석도는 날과 등이 모두 외만한 것으로 단인(單刃)이 많다.[39] 신암리, 용연리(龍淵里), 서포항(西浦項) 등에서 신석기 말기부터 출현해 압록강 하류에서는 청동기시대에도 계속 주류를 이루동재령강강유역 및 중남부지방에서도 일부 출토된다.[40] 주형석도는 등이 곧고 날이 외만한 형태로 단주형(短舟形)과 장주형(長舟形)으로 다시 구분된다.[41] 장주형은 대동·재령강유역의 팽이형토기 유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42] 청동기 전기에는 길이 20cm 안팎에 장폭비(長幅比) 3.5:1에서 4:1 사이가 주류를 이루고, 후기에 들어가면서 장폭비가 5:1이 넘는 특대화(特大化)된 형태도 나타나며, 한편으로는 3:1에서 3.2:1 사이로 장폭비가 줄어드는 경향도 보인다.[43] 장주형(長舟形) 돌칼은 한국 서북지방의 고인돌 및 팽이형토기문화와 결합하여 쓰였다는 것이 통설이다.[44] 장방형돌칼은 대부분 양날[兩刃]로 동북지방과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서 상당수 발견되며, 남하하여 여주 흔암리에서도 쓰이게 되었다.[45] 가장 일반적인 형식으로 등이 곧고 날이 휜 주형(舟形)은 대동강유역, 한강유역 등 중서부지방에서 성행하였으며, 장방형은 동북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었다.[46] 반면 금강 이남의 서남지역에서는 양변에 엇날을 단 삼각형석도가 크게 유행했다.[47]
단주형석도
편집단주형은 장주형이 장폭비가 줄어들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길이 15cm 전후에 장폭비 2.5:1에서 3:1 사이가 많고, 주로 중부지방 이남에서 청동기시대 중기와 후기에 성행하였다.[48] 단주형(短舟形)은 장주형에서 발전한 형식으로 남한의 전지역에서 쓰여지며, 삼각형 돌칼은 영암 월송리, 부여 송국리, 대평리와 같이 남한만의 지역성이 심화된 것이다.[49] 삼각형석도는 삼각형의 양변에 날을 세운 것으로 양변의 날을 서로 반대되도록 간 엇날인 것이 특징이고단주형석도와 공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청동기시대 중기와 후기에 서남부지방에서 성행하였다.[50]
어형석도
편집어형석도는 요서(遼西)의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처음 출현해 이후 요동반도에서 성행하였다.[51] 즐형 및 주형은 하남 용산문화(河南龍山文化)에서 주로 조개를 이용한 형태로 나타나 이후 특히 창강(長江)유역에서 주류를 이뤘다.[52]
사용법
편집중앙부에 한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사용하였다.반달칼의 한복판에나 혹은 등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는 보통 한 개 내지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 구멍 사이에 끈을 꿰어 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 넣어 사용하였다.[53] 반달 돌칼의 구멍에 끈을 꿰어서 사용하였으며, 주로 이삭을 자르는 데 이용하였다.[54]
반달 돌칼의 사용 3단계[55]
- 먼저 가운데 뚫린 두 개의 구멍에 줄을 끼운다.
- 줄을 손에 걸고 반달 돌칼을 쥔다.
- 이제 벼 이삭을 자른 후 목을 꺾는다.
각주
편집- ↑ 반달돌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 반달돌칼 두산백과
- ↑ 《반달돌칼》. 두산백과,doopedia.
- ↑ “반달돌칼”.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
- ↑ “반월 형석도”.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생방송 한국사1》.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7년 1월 20일.
- ↑ “두산백과”. 《반달돌칼》. 교육부 공식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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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박호석 (2001년 6월 25일). “한국의 농기구”. 어문각.
- ↑ 박호석 (2001년 6월 25일). “한국의 농기구”. 어문각.
- ↑ 《생방송 한국사1》.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7년 1월 20일.
- ↑ “반달돌칼”. 《두산백과》. doopedia.
- ↑ “반달돌칼”. 《두산백과》. do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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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년 12월.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반달돌칼”. 《두산백과》. doopedia.
- ↑ 《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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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가 나 다 라 마 “반달돌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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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돌칼”.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반달돌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 ↑ “반달돌칼”.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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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돌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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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농기구》. 어문각. 2001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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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돌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6.
- ↑ “반달돌칼”. 《e뮤지엄》 (국립중앙박물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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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 “반달돌칼”. 《두산백과》. doopedia.
- ↑ 《생방송 한국사1》.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7년 1월 20일.
- ↑ 《생방송 한국사 1》.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7년 1월 20일.
참고 문헌
편집- 「한도선사시대출토(韓半島先史時代出土) 곡류(穀類)와 농구(農具)」(지건길·안승모, 『한국(韓國)의 농경문화(農耕文化)』, 경기대학출판부, 1983)
- 「한국(韓國)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에 대한 일고찰(一考察)」(김원룡, 『사학지(史學志)』 6, 1972)
- 「한국(韓國) 적수석도(摘穗石刀)의 연구(硏究)」(최숙경, 『역사학보(歷史學報)』 13, 1960)
- 「日本稻作の系譜」 下-石危丁について-(石毛直道, 『史林』 51-6, 1968)
- 반달돌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산백과 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
- 생방송 한국사 1 : 한국사 더 쉽고 재밌고 생생하게!, 선사 시대 · 고조선 2017.01.20.http://tv.naver.com/owlbooknews
- 한반도 선사시대출토 곡류와 농경(지건길·안승모, 한국의 농경문화, 경기대학교출판부, 1983년)
- 한국반달돌칼에 관한 일고찰(김원용, 사학지 6, 단국대학교, 19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