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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라교(碧羅橋)는 해방 전 평양에 있었던 다리로, 능라도(綾羅島, 릉라도)의 수원지에서 평양 시내에 수도물을 공급하는 대형 수도관을 부설한 다리이다. 통칭 수도국 다리로 불렸다.

역사편집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모란봉(牡丹峰) 쪽에서 능라도(綾羅島)와 연결하는 다리가 나오는데,[1] 능라도 수원지에서 정제된 물을 평양시내에 공급하기 위해 대형 수도관을 부설한 다리였다.

다리의 정확한 건설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능라도 수원지에서 물을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1910년부터이므로[2] 그때 처음 부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 신문기사에 벽라교(碧羅橋)라는 명칭이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 다리가 청류벽(淸流壁)과 능라도(綾羅島)를 연결하는 다리라서 벽라교(壁羅橋)라고 했다고 하나,[3] 해방 전 신문기사들에는 벽라교(碧羅橋)로 나오므로,[4] 부벽루(浮碧樓)와 능라도(綾羅島)에서 따온 이름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일반에서는 통칭 수도국(水道局) 다리로 불렸으며,[3][5] 수도교(水道橋)라고도 했다.[6] 차량 통행은 불가능했고, 수도국 직원들이 능라도를 출입하던 통로로도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다리는 미군이 작성한 1946년 지도와[7] 1949년 사진에도 나와 있으나, 오늘날에는 없다. 당시는 벽라교가 서평양에서 능라도로 출입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지금은 능라도와 대동강 양안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1988년에 준공된 능라교, 1995년에 준공된 청류교가 있다. 수원지 정수장은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갤러리편집

각주편집

  1.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작가 하반영(河畔影) 화백을 만나다 ohmynews 2012.02.16 : 하반영 화백이 1940년 9월에 찍었다는 평양 사진에 나온 다리는 양각도를 지나는 경의선의 대동강철교가 아니라 벽라교이다.
  2. 雜報 / 水道測量 皇城新聞 1906년 10월 19일 02면 05단
    雜報 / 水道及島嶼測査 皇城新聞 1907년 01월 23일 02면 04단
    雜報 / 可謂慈航 皇城新聞 1909년 08월 07일 03면 02단
    불원간 수통물 분급 대한매일신보 1910년 08월 07일 03면 05단
    雜報 / 西道旅行記 (續) 皇城新聞 1910년 06월 22일 03면 01단
  3. 평양시민회와 발자취 평양고보 동문 카페
  4. 大同江 一部 解氷, 오는 6일경에는 다 풀려 每日申報 1918년 02월 08일 03면 04단 : 벽라교(碧羅橋)
    各支局通信欄: 浿城을 一週하고 每日申報 1920년 04월 26일 04면 02단
    三十隻の屋形船で大同江の舟遊び, 出林大會一行を迎へて 朝鮮新聞 1926.10.15 3면
  5. 이태준(李泰俊, 1904~?), "패강냉(浿江冷)" 삼천리문학 제1집 1938-01-01 삼천리사(三千里社)
    이태준, 해방전후: 이태준 단편전집 2 (한국문학을 권하다 18) : "패강랭(浿江冷)" 애플북스, 2014.09.22
  6. 水道橋에서 추락 자살, 무슨 까닭으로 죽어, 주소 성명도 모른다 每日申報 1923년 03월 09일 03면 3단
    衛戍院看護兵(위수원간호병) 飮毒(음독)하고投身(투신) 1927.10.21동아일보 2면
    醉兵卒暴行(취병졸폭행) 자동차를습격 1929.04.03동아일보 5면
    大同江(대동강)을縱橫遠泳(종횡원영) 젊은朝鮮意氣衝天(조선의기충천) 1932.08.27 동아일보 3면
    綾羅島(능라도)에서 大同橋(대동교)까지 1932.09.15 동아일보 3면
    大同江上(대동강상)의 하로 : 평양 정동규 1933.08.13 동아일보 5면
    觀櫻會(관앵회)에 風波(풍파) 現役(현역) 將校暴行(장교폭행) 1936.05.09동아일보 2면
  7. 미군이 1946년 작성한 평양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