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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富國强兵)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여, 군사력 증강을 촉구하는 정책을 말한다.

목차

중국편집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제후의 나라가 실시한 정책을 ‘부국강병’이라고 말하며, 《전국책》(戰國策)의 진책(秦策)에 용례가 보인다.[1] 이 시대에는 각 나라들이 《제자백가》라는 사상가들로부터 인재를 등용하고 기마 전술이나 전차 등의 신무기를 도입하면서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또한 《오서》(呉書) ‘육손전’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메이지 정부의 국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사용의 역사는 에도 시대 중기에 다자이 슈다이(太宰春台)가 저서 《경제록》(経済録)에서 부국강병을 ‘패자의 설’이라고 비판하는 유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국가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을 빠뜨릴 수 없다고 역설했다.

또한 막말에 들어가면서 쇄국으로 인해 구미 열강과의 국력에서 큰 격차를 내었고, 이것이 〈안세이 5개국 조약〉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당하는 등 많은 고난을 맛보는 동시에 부국강병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막부 말기 단계에서 개국파, 양이파를 막론하고 부국강병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양이론’(攘夷論)의 이론적 지주가 된 미토 번의 ‘미토가쿠’(水戸学)에서는 이미 19세기 초기의 후지타 유코쿠에 의해 부국강병을 통해 외국과 경쟁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귀족인 이와쿠라 도모미도 1867년에 저술한 《제시책》(済時策)에서 부국강병을 황위 선양을 위해 필요한 정책으로 말하고 있다.

개국파 사이에서도 1856년에 나온 해안방어 관리[2] 이와세 다다나리의 의견서에서 해외 무역을 진흥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각료 아베 마사히로도 이와세의 아이디어를 채택하는 정책을 세웠다. 또한 1860년에 요코이 쇼난이 저술한 《국시삼론》(国是三論)도 《부국론》(富國論), 《강병론》(強兵論), 《사도》(士道) 세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메이지 정부의 성립 후에 부국강병이 채용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메이지 정부는 과거의 존왕양이파 주도로 세워진 정권이었지만 성립 전후 개국 화친 정책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만국 병립, 만국 대치를 내걸고 열강에 국력과 군사력 모두를 따라 잡기 위해 협약 개정과 국가의 보전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서양 문명의 적극적 도입 (‘문명개화’)을 추진하여 토지세 개정과 ‘식산흥업’으로 경제력을 일으키고(=부국), 징병제와 군제 개혁으로 군비를 증강(=강병)함으로써 국가 자립 유지를 도모했다. 육군은 프랑스를, 이후에는 독일을 모범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해군은 영국을 본받았다.

곧 일본의 국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자, 조약 개정과 함께 열강과 마찬가지로 식민 제국 건설을 목표로 하여 청나라, 조선, 남방에 경제적, 군사적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조약 개정의 달성과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의 승리가 지금까지 국가 지도자나 지식인의 이론적 목표에 불과했던 ‘부국강병’을 일반 국민에게도 현실로 인식시키고, 메이지 초기 이후 ‘부국강병’, ‘문명개화’ 사관을 정착시키게 된다.

참고자료편집

  • 田村貞雄「부국강병」(『일본사대사전 5』(平凡社, 1993년) ISBN 978-4-582-13105-5
  • 永井秀夫「부국강병」(『일본역사대사전 3』(小学館, 2001년) ISBN 978-4-09-523003-0
  • 鈴木淳「부국강병」(『歴史学事典 13 所有と生産』(弘文堂, 2006년) ISBN 978-4-335-21042-6

각주편집

  1. 戰國策 권3 秦一
  2. 해안방어 어용괘(海岸防禦御用掛),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감독관 직책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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