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7권 > 2. 결택분(決擇分) ⑤ > 139 - 148쪽
K.572(16-157), T.1605(3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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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집론 제7권
무착보살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2. 결택분(決擇分) ⑤
3) 득품 ②
현관(現觀)의 건립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열 종류가 있으니, 법현관(法現觀)ㆍ의현관(義現觀)ㆍ진현관(眞現觀)ㆍ후현관(後現觀)ㆍ보현관(寶現觀)ㆍ불행현관(不行現觀)ㆍ구경현관(究竟現觀)ㆍ성문현관(聲聞現觀)ㆍ독각현관(獨覺現觀)ㆍ보살현관(菩薩現觀)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법현관입니까?
여러 진제의 증상법(增上法)에서 이미 상품의 청정한 신승해(信勝解)를 성취하고 그것에 대한 신심에 따라 행하는 것[隨信行]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의현관입니까?
여 러 진제의 증상법에서 이미 상품의 청정한 제찰법인(諦察法忍)을 성취하여 그 신심에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인혜(忍慧)로써 순결택분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세 종류의 여리작의(如理作意)에 연유하여 그 인식이 가능해지기[顯發] 때문이다. 또 세 가지 품(品)을 이루게 되니 상연품(上軟品)ㆍ상중품(上中品)ㆍ상상품(上上品)이다.
어떠한 것이 진현관입니까?
견 도위의 열여섯 가지 심찰나의 지위에 있는 모든 성도를 이미 성취한 것을 가리킨다. 또 견도위 가운데에서는 현관변(現觀變)을 체득하여 진제를 안립하기에 세속지(世俗智)가 현전하지 않으나, 수도위에서 이 같은 세속지가 다시금 현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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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후현관입니까?
일체의 수도를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보현관입니까?
부처님을 증정(證淨)하고, 정법을 증정하고, 스님들을 증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불행현관입니까?
이 미 무작율의(無作律義)를 증득하였기에, 비록 유학(有學)의 지위에 머물러 있더라도 “내가 지금 나락가도(那落迦道)를 이미 다하였고, 방생도(傍生道)를 이미 다하였고, 아귀도(餓鬼道)를 이미 다하였다. 악취(惡趣)로 거꾸로 떨어지는 업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가 다시 악취업(惡趣業)을 지어 악취의 이숙(異熟)을 받지 않겠다”라고 다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구경현관입니까?
도제 가운데에서 구경도를 해설한 것과 같다.
어떠한 것이 성문현관입니까?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을 다른 사람의 음성을 통해 듣고 나서야 증득하기 때문에 성문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독각현관입니까?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을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도 증득하기 때문에 독각현관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보살현관입니까?
여 러 보살이 앞에서 해설한 일곱 종류의 현관 가운데에서 인혜(忍慧)의 수습을 일으켰으나 이를 증득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보살도의 극희지(極喜地) 가운데에서 모든 보살도의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들어가는 것을 보살현관이라 이름한다.
성문현관과 보살현관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습니까?
간략하게 해설하면 열한 종류가 있으니, 경계차별(境界差別)ㆍ임지(任持)차별ㆍ통달(通達)차별ㆍ서원(誓願)차별ㆍ출리(出離)차별ㆍ섭수(攝受)차별ㆍ건립(建立)차별ㆍ권속(眷屬)차별ㆍ승생(勝生)차별ㆍ생(生)차별ㆍ과(果)차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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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과보의 차별에는 또 열 가지가 있으니, 전의(轉依)차별ㆍ공덕원만(功德圓滿)차별ㆍ5상(相)차별ㆍ삼신(三身)차별ㆍ열반(涅槃)차별ㆍ증득화합지용(證得和合智用)차별ㆍ장청정(障淸淨)차별ㆍ화합작업(和合作業)차별ㆍ방편시현(方便示現)차별ㆍ성등정각입반열반(成等正覺入般涅槃)차별ㆍ5종발제(種拔濟)차별과 여러 무량(無量) 등의 가장 수승한 공덕이다.
어떠한 현관에서 후현관(後現觀)을 수렴하게 됩니까?
구경현관이다.
구경현관을 수렴하는 것에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무 량(無量)ㆍ해탈(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ㆍ무애해(無礙解)ㆍ신통(神通)ㆍ상수호(相隨好)ㆍ청정(淸淨) ㆍ역(力)ㆍ무외(無畏)ㆍ염주(念住)ㆍ불호(不護)ㆍ무망실법(無忘失法)ㆍ영단습기(永斷習氣)ㆍ대비(大悲)ㆍ불공불법(不共佛法)ㆍ일체종묘지 (一切種妙智)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같은 공덕은 여러 계경 가운데에서 거듭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무량이란 4무량(無量)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무량(慈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에게 즐거움을 여의지 않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비무량(悲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을 괴로움에서 벗겨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바가 구족한 가운데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희무량(喜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이 즐거움을 여의지 않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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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량(捨無量)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의요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여기서 해탈이란 여덟 가지 해탈을 가리킨다.
‘유색(有色)에서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 려에 의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그 보는 것을 굴복시키지 못한 자의 색상(色想)이거나 또는 현재 그 소견되는 것에 안립한 자의 색상이다. 그 소견되는 색을 관찰해서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것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이는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장(變化障)이다.
‘무색상(無色想)에서 외부의 여러 가지 색을 관찰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 려에 의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그 보는 것을 이미 굴복시킨 자의 색상이나 또는 현재 그 소견되는 것에 안립한 자의 색상이다. 그 소견되는 색을 관찰해서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정해탈(淨解脫)을 신작증(身作證)하여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정 려에 의지해서 내적으로 청정하고 부정한 갖가지 색에 처해서 전전상대상(展轉相待想)ㆍ전전상입상(展轉相入想)ㆍ전전일미상(展轉一味想)을 이미 성취한 까닭이다. 그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이니,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청정과 부정함이 변화해서 번뇌가 생겨나고 일어나는 장애이다.
무변공처해탈(無邊空處解脫)이란 무엇입니까?
해 탈에 순응해서 무변공처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무변공처의 해탈에서처럼 무변식처(無邊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해탈도 이와 같다. 해탈에 이르기까지 장애에 걸리지 않고 적정(寂靜)해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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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想)과 수(受)가 멸하는 해탈[想受滅解脫]’이란 무엇입니까?
비상비비상처의 해탈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진(眞)해탈에 엇비슷하게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심ㆍ심소가 소멸돼서 상과 수가 소멸된 그러한 장애[想受滅障]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승 처란 여덟 가지 승처를 가리킨다. 앞의 네 가지 승처는 이분해탈(二分解脫:二解脫)에 기인하여 건립되고, 나중의 네 가지 승처는 일분해탈(一分解脫:一解脫)에 기인해서 건립된다. 여기서의 해탈이란 그 소연(所緣)을 사량(思量)으로 해탈하는 것[意解]이고, 승처는 그 소연을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것으로, 자유로이 전향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유정수법(有情數法)과 비유정수(非有情數)에 의지해서 그 색의 적고 많음을 말하는 것이고, 청정하고 부정한 것에 의지해서 그 색의 좋고 나쁨을 말하는 것이고, 인간계와 천상에 의지해서 그 색의 열등함과 우수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 밖의 것은 해탈 가운데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그 소연을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까닭에 승처라고 이름한다. 변처란 열 가지 변처를 가리킨다. 그 소연이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변처라고 이름한다. 그 두루 가득함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것에 상응하는 심ㆍ심소를 변처라 이름한다.
어째서 변처에 지위(地位) 등을 건립하게 됩니까?
이 같은 변처에 기인해서 소의색(所依色)과 능의색(能依色)이 모두 두루 가득함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해탈을 해설한 그대로이다. 모두 이 같은 변처에서 해탈을 온전하게 이루게 되는 것이다.
무쟁(無諍)이란 정려에 의지해서 다른 사람이 일으키는 번뇌를 잘 방어하는 것이다. 그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원지(願智)란 정려에 의지하여 그 소지(所知)를 깨닫고자 하는 서원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무애해(無礙解)란 네 가지 무애해를 가리킨다.
법무애해(法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일체법의 명수(名數)에 관한 차별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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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애해(義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여러 상(想)과 의취(意趣)가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훈사무애해(訓詞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여러 지방의 말소리와 여러 가지 제법의 언설을 새겨 풀이하는 것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변재무애해(辯才無礙解)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제법의 차별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신통이란 무엇입니까?
여섯 가지 신통을 가리킨다.
신경통(神境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신변(神變)의 위덕(威德)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천이통(天耳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갖가지 음성을 듣는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심차별통(心差別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다른 유정의 심행(心行)에 대한 차별을 인식하는[入]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숙주수념통(宿住隨念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전제(前際)에서 행한 바를 회상하는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사생통(死生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유정이 죽고 사는 차별의 관찰이 걸림 없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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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진통(漏盡通)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누(漏)가 다하는 지혜의 위덕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상수호(相隨好)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모양을 아름답게 꾸며서 나타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 및 그곳에서 일어난 이숙을 가리킨다.
청정이란 무엇입니까?
네 가지 청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의지청정(依止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의지하려는 바에 따라 취하고 머무르고 버리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경계청정(境界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바라는 경계에 따라 변화하는 지혜가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심청정(心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삼마지문(三摩地門)의 자재를 강구하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지청정(智淸淨)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그 다라니문(陀羅尼門)의 임지(任持)를 간구하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역이란 여래의 10력(力)을 가리키는 것이다.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일체의 온갖 합당하고[處] 합당하지 못한 것[非處]을 가려내는 지혜가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모든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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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업지력(自業智力)이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하여 일체의 온갖 업의 이숙을 가려내는 지혜가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그 밖의 역(力)은 그에 따라 숙지하면 된다.
무애란 무엇입니까?
네 가지 무애를 가리킨다.
정등각무애(正等覺無礙)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자리문(自利門)에 연유한 일체종소지(一切種所知)의 경계를 바르고 평등하게 깨우쳤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德號)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에 상응하는 심ㆍ심소를 가리킨다.
누진무애(漏盡無礙)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자리문에 연유한 일체종(一切種)의 누(漏)가 다했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 및 그 밖의 앞에서 해설한 것을 가리킨다.
장법무애(障法無礙)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이타문(利他門)에 연유한 일체종의 장애법(障礙法)을 연설한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출고도무애(出苦道無礙)란 무엇입니까?
정려에 의지해서 이타문에 연유한 일체종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도법(道法)을 연설한다고 자칭하는, 그 덕호의 건립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염주란 바로 삼념주(三念住)를 가리킨다. 대중을 거느리는 때에 일체종의 잡염(雜染)이 현행(現行)하지 않음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불호란 바로 3불호(不護)를 가리킨다. 그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방편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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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망실법(無忘失法)이란 대중을 거느리는 때에 일체종에 처해서 그 행위나 언사를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영단습기(永斷習氣)란 일체지자(一切智者)가 일체지(一切智)의 소작(所作)이 아닌 것의 불현행(不現行)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대비(大悲)란 바로 무간지옥의 괴로움 경계를 연해서 그 한량없는 연민에 머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불 공불법(不共佛法)이란 열여덟 가지의 불공불법을 가리킨다. 공통되지 않은 신ㆍ어ㆍ의, 3업이 청정하게 구족한 가운데에서나, 소의 및 그 과근(果根)이 성취하지도 퇴보하지도 않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나, 또 공통되지 않은 업의 현행이 구족한 가운데에서나, 또 공통되지 않은 지혜에 머무르는 것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일체종묘지(一切種妙智)란 온ㆍ계ㆍ처에 있어 일체종묘지의 성품이 구족한 가운데에서의 정이나 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밖의 것은 앞에서 해설한 그대로이다.
이 같은 공덕을 인발(引發)하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청정한 제4정려에 의지해서 외도나 성문이나 보살 등이 4무량(無量)과 5신통(神通)을 인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대부분은 제4정려의 변제정(邊際定)에서 성문이나 보살 등이 인발시키는 그 밖의 공덕이다.
어떠한 원인에서 이와 같은 공덕이 인발됩니까?
정 려에 의지하여 사유를 되풀이하는 것이니, 그 건립된 법에 따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따위의 공덕에는 간략하게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현전에서 스스로 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 자성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다. ‘현전에서 스스로 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란 세간을 벗어난 후에 얻어지는 세속지를 그 바탕으로 삼는 것이고, ‘자성에 안정되게 머무는 것’이란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의 쓰임새로 그 바탕을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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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소치장(所治障)을 버리게 하는 동정심에 머무는 까닭에, 복덕의 자량을 속히 원만하게 해서 유정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싫증나지 않도록 성숙시키는 것이다.
해탈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일의 변화를 인발시켜서 청정하거나 부정한 변화에 처해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하여 적정해탈에 어려움 없이 제일가는 적정의 성스러운 머무름에 능히 머물게 되는 것이다. 승해(勝解)에 기인해서 사유하는 까닭이다.
승처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앞서의 해탈에 소연하는 경계를 자유로이 전향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그 소연을 수승하게 굴복시키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변처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해탈의 소연을 잘 처리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두루 가득함이 널리 퍼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쟁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그 말을 듣고는 모두 설득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른 이를 아끼고 보살피는 마음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이고, 또 그 감응하는 바에 따라 말을 하기 때문이다.
원지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과거ㆍ미래ㆍ현재의 3세(世)를 잘 기별(記)하기에 일체 세간이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체의 중생을 멀리하는 것에 기인해서 도리어 중생에게 추앙받기 때문이다.
무애해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좋은 설법으로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체의 의심 내는 그물을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통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신업과 어업으로 그 마음을 기별해서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정의 모든 심행 및 그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잘 숙지해서 그 감응하는 바에 따라 가르쳐 영원히 출리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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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호(相隨好)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마음속에 깨끗한 신심을 내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청정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이 것의 세력이 기인하여 생유(生有)를 취하는 것에서 그 즐기는 바에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또 1겁을 머물기도 하고, 또 겁이 끝난 다음에까지 머물기도 하고, 또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행하기도 하고, 또 제법에 처해서 자유로이 전향하기도 하고, 또 여러 정에 처해서 전향하기도 하고, 또 모든 부처님의 정법을 다시 임지하기도 한다.
역(力)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인 과가 없다거나 인과를 거부하는 논리를 배척하고자 논리를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 전도되지 않도록 자세히 해설해서 도가 생겨나도록 증상시키고, 일체 유정의 심행이 깨달음에 들어가도록 법품(法品)을 바로 설법하고, 수면경계(隨眠境界)의 자량을 의요케 해서 미래세에 출리하게 하고, 또 그 감응하는 바에 따라 결정된 수승한 도를 자세히 설하여 모든 마군을 항복받고 일체의 문답을 잘 분석하는 것이다.
무외(無畏)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대중 가운데 처해서 스스로 자신이 큰 스승임을 일깨워 일체의 삿된 외도를 물리치는 것이다.
염주(念住)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능히 불염오(不染汚)로써 대중을 수렴하여 거두는 것을 가리킨다.
불호(不護)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끊임없이 가르치고 훈계해서 따르는 대중을 교화하는 것이다.
무망실법(無忘失法)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일체의 불사(佛事)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영단습기(永斷習氣)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모든 번뇌를 여의었기에 그 번뇌에서 만들어진 일의 업이 엇비슷하게라도 드러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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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大悲)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낮과 밤의 여섯때에 세간을 두루 관찰하는 것을 가리킨다.
불공불법(不共佛法)은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신ㆍ어ㆍ의, 3업이 청정함에 연유해서 이미 성취한 것이 퇴보하지 않는 것으로, 행하거나 머물거나 일체의 성문도(聲聞道)와 독각도(獨覺道)를 지혜로 비춰서 엄폐시키는 것이다.
일체종묘지는 어떠한 업을 짓게 됩니까?
능 히 일체 유정의 모든 의심 내는 그물을 끊어서 바른 법안(法眼)을 오래도록 머물게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유정으로서 미처 성숙하지 못한 자는 성숙하게 하고, 이미 성숙된 자는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해설한 현관위(現觀位) 가운데에서 증득한 다음에 다시 수승한 품도에 나아가는 때에는 앞서 성취한 열등한 품지의 도를 버리게 된다. 또 이 같은 때에 고집(苦集)을 끊고 무여의열반계의 지위(地位)에서 증득을 이루는 것이다. 성문이나 연각은 일체의 성도에 있어서 그 버려야 할 바를 잠깐 사이라도 버리지 않는 바가 없기에 보살도(菩薩道)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보살 등을 ‘선근이 가없는 분’ 또는 ‘공덕이 가없는 분’이라고 일컫게 된다.
어째서 여러 가지 무기사(無記事)를 건립하게 됩니까?
그가 질문한 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질문한 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까?
인과를 벗어나서 그 선악[染淨]에만 감응하는 사량처(思量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연에서 보살이 초승이생위(超昇離生位)에 이미 들어갔더라도 예류(預流)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머무는 바 없이 도를 성취하는 것이 기인해서 줄곧 예류과로 향하는 행을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연으로 일래(一來)도 아니게 됩니까?
모든 유(有) 가운데에서 한없는 생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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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인연으로 불환(不還)도 아니게 됩니까?
정 려에 안주해서 욕계에 환생(還生)하기 때문이다. 또 여러 보살들은 제현관(諦現觀)을 이미 성취하였더라도 십지의 수도위에서 소지장(所知障)의 대치도(對治道)만을 닦고 번뇌장(煩惱障)의 대치도는 닦지 않는다. 만약 보리를 성취하였을 때 번뇌장과 소지장을 잠깐 사이에 끊는다면, 바로 잠깐 사이에 아라한이나 여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여러 보살이 일체의 번뇌를 영구히 끊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같은 번뇌는 마치 주문이나 약으로 굴복된 여러 독사처럼 일체 번뇌의 허물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도 같고, 일체지(一切地) 가운데에서 마치 아라한이 번뇌를 이미 끊어버린 것과도 같은 것이다. 또 여러 보살이 소지경(所知境)에 있어서 선교(善巧)를 닦아야 하고, 여러 방편에 있어서 그 선교를 닦아야 하고, 허망분별(虛妄分別)에 처해서 선교를 닦아야 하고, 무분별에 있어 선교(善巧)를 닦아야 하고, 때때로 연근(練根)을 닦아야 한다.
소지경(所知境)이란 무엇입니까?
간 략하게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러운 것[迷亂]이고, 두 번째가 그 소의에 미혹하여 어지러운 것[迷亂所依]이고, 세 번째가 그 소의에 미혹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不迷亂所依]이고 네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럽거나 미혹하여 어지럽지도 않는 것[迷亂不迷亂]이고, 다섯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不迷亂]이고, 여섯 번째가 미혹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의 등류[不迷亂等流]이다.
선교의 방편이란 무엇입니까?
간 략하게 네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유정을 성숙시키는 방편선교이고, 두 번째가 불법을 원만케 하는 방편선교이고, 세 번째가 속히 신통과 지혜를 증득하는 방편선교이고, 네 번째가 그 도를 닦는 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편선교이다.
허망분별이란 무엇입니까?
간 략하게 열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근본에 대한 분별이고, 두 번째가 그 모양에 대한 분별이고, 세 번째가 그 모양이 드러난다는 분별[相顯現分別]이고, 네 번째가 그 모양이 변해서 달라진다는 분별[相變異分別]이고, 다섯 번째가 그 모양의 드러남이 변해서 이숙된다는 분별[相顯現變異分別]이고, 여섯 번째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분별[他人分別]이고, 일곱 번째가 실답지 않은 분별[不如理分別]이고, 여덟 번째가 실다운 분별[如理分別]이고, 아홉 번째가 집착하는 분별[執着分別]이고, 열 번째가 산란분별(散亂分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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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열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성품이 없다는 분별[無性分別]이고, 두 번째가 성품이 있다는 분별[有性分別]이고, 세 번째가 차츰 늘어난다는 분별[增益分別]이고, 네 번째가 줄어든다는 분별[損減分別]이고, 다섯 번째가 성품이 동일하다는 분별[一性分別]이고, 여섯 번째가 성품이 각각 다르다는 분별[異性分別]이고, 일곱 번째가 자성분별(自性分別)이고, 여덟 번째가 차별분별(差別分別)이고, 아홉 번째가 수명의분별(隨名義分別)이고, 열 번째가 수의명분별(隨義名分別)이다.
무분별이란 무엇입니까?
간 략하게 세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지족무분별(知足無分別)이고, 두 번째가 무전도무분별(無顚倒無分別)이고, 세 번째가 무희론무분별(無戱論無分別)이다. 이와 같은 세 종류의 이생과 성문과 보살은 그 차제에 따라 그 모양을 숙지해야 한다.
‘무 희론무분별’은 다시 다섯 가지 모양을 여의는 것이니, 첫 번째가 무작의(無作意)가 아니기 때문이고, 두 번째가 초과작의(超過作意)가 아니기 때문이고, 세 번째가 적정이 아니기 때문이고, 네 번째가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다섯 번째가 소연에 있어서 가행을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소연에 있어서 가행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일컫는 경우에, 만약 여러 보살의 성품이 이근기라면, 어떻게 다시 연근행(練根行)을 닦는다고 하겠습니까?
이근기 가운데에서의 연근기(軟根機)에 의지하기에 다시 이근기 가운데의 중근기를 인발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또 이근기 가운데의 중근기에 의지하기에 이근기 가운데의 이근기를 인발시키기 때문이다.
4) 논의품(論議品)
논의결택(論議決擇:논의를 통한 의혹의 해결)이란 무엇입니까?
간략하게 해설하면 일곱 종류가 있으니, 의결택(義決擇:이치를 통한 의혹의 해결)ㆍ석결택(釋決擇:경전 연구를 통한 의혹의 해결)ㆍ분별현시(分別顯示)결택ㆍ등론(等論)결택ㆍ섭(攝)결택ㆍ논궤(論軌)결택ㆍ비밀(秘密)결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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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의결택입니까?
여섯 가지 이치에 의해서 결택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여섯 가지 이치입니까?
본질적 이치[自性義]ㆍ원인 성립의 이치[因義]ㆍ과보 성립의 이치[果義]ㆍ업의 이치[業義]ㆍ상응의 이치[相應義]ㆍ전향의 이치[轉義]를 가리킨다.
본 질적 이치란 세 가지 자체적인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고, 원인 성립의 이치란 세 가지 이유[因]를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생인(生因)이고, 두 번째가 전인(轉因)이고, 세 번째가 성인(成因)이다. 과보 성립의 이치란 다섯 가지 과보[果]를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이숙과(異熟果)이고, 두 번째가 등류과(等流果)이고, 세 번째가 증상과(增上果)이고, 네 번째가 사용과(士用果)이고, 다섯 번째가 이계과(離繫果)이다. 업의 이치란 다섯 가지 업을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취수업(取受業)이고, 두 번째가 작용업(作用業)이고, 세 번째가 가행업(加行業)이고, 네 번째가 전변업(轉變業)이고, 다섯 번째가 증득업(證得業)이다. 상응의 이치란 다섯 가지 상응을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취결상응(聚結相應)이고, 두 번째가 수축(隨逐)상응이고, 세 번째가 연철(連綴)상응이고, 네 번째가 분위(分位)상응이고, 다섯 번째가 전변(轉變)상응이다. ‘
전향의 이치’란 다섯 가지 전향(轉向)을 가리키는 것으로, 첫 번째가 상전(相轉)이고 두 번째가 안주전(安住轉)이고, 세 번째가 전도전(顚倒轉)이고, 네 번째가 부전도전(不顚倒轉)이고, 다섯 번째가 차별전(差別轉)이다.
어떠한 것이 섭결택입니까?
여러 경전의 종지를 능히 풀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다시 어떻게 설명합니까?
간 략하게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소변지사(所遍知事)이고, 두 번째가 소변지의(所遍知義)이고, 세 번째가 변지인연(遍知因緣)이고, 네 번째가 변지자성(遍知自性)이고, 다섯 번째가 변지과(遍知果)이고, 여섯 번째가 피증수(彼證受)이다. 또 열네 가지 문변석결택(門辯釋決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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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그 열네 가지입니까?
섭 석문(攝釋門)ㆍ섭사문(攝事門)ㆍ총별분문(別分門)ㆍ후후개인문(後後開引門)ㆍ차지문(遮止門)ㆍ전변자문(轉變字門)ㆍ괴불괴문(壞不壞門)ㆍ안 립보특가라문(安立補特伽羅門)ㆍ안립차별문(安立差別門)ㆍ이취문(理趣門)ㆍ변지등문(遍知等門)ㆍ역무력문(力無力門)ㆍ별별인문(別別引門)ㆍ인 발문(引發門)이다.
어떠한 것이 분별현시결택입니까?
온 등을 해설하는 제법 가운데에서 그 대응되는 바에 따라 한 단락의 순전구(順前句)ㆍ순후구(順後句)와 두 구절, 세 구절, 네 구절의 술가구(述可句)와 차지구(遮止句) 등을 짓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등론결택입니까?
여덟 가지에 의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그 여덟 가지입니까?
만 약 언어를 사용하여[之詞] 문답하는 때에, 일체의 옳고 그름을 결택하는 것이다. 다시 네 종류의 등론결택의 도리가 있으니, 첫 번째는 능파(能破)이고, 두 번째는 능립(能立)이고, 세 번째는 능단(能斷)이고, 네 번째는 능각(能覺)이다.
어떠한 것이 섭결택입니까?
10처(處)에 기인해서 모든 결택을 수렴하는 것을 가리킨다.
어떠한 것이 그 십처입니까?
첫 번째가 성소작결택(成所作決擇)이고, 두 번째가 취입결택처(趣入決擇處)이고, 세 번째가 승해(勝解)결택처이고, 네 번째가 도리(道理)결택처이고, 다섯 번째가 논(論)결택처이고, 여섯 번째가 통달(通達)결택처이고, 일곱 번째가 청정(淸淨)결택처이고, 여덟 번째가 인발(引發)결택처이고, 아홉 번째가 구차별(句差別)결택처이고, 열 번째가 공용에 연유치 않고 잠시 작의하는 때에 일체 이치가 성립되는 결택처[不由功用暫作意時一切義成決擇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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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논궤결택입니까?
간 략하게 일곱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논체(論體:토론의 성격)이고, 두 번째가 논처(論處:토론이 진행되는 장소나 상대방)이고, 세 번째가 논의(論依:논제의 성립 근거)이고, 네 번째가 논장엄(論莊嚴:완전 무결한 변론)이고, 다섯 번째가 논부(論負:토론에서의 패배)이고, 여섯 번째가 논출리(論出離), 일곱 번째가 논다소작법(論多所作法:다수의 대론자와 전개하는 토론)이다.
첫 번째의 논체에는 다시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언론(言論:각종 언어의 수사학적 문제)이고, 두 번째가 상론(尙論: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논제)이고, 세 번째가 쟁론(諍論:반대적인 주장의 전개)이고, 네 번째가 훼론(毁論:인신 공격)이고, 다섯 번째가 순론(順論:바른 지혜로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토론)이고, 여섯 번째가 교론(敎論:정법을 인식시켜 주는 토론)이다. 언론이란 일체의 세속 언어를 가리킨다. 상론이란 모든 세간에서 그 배운 바에 따라 세속지를 논의해서 중생에게 존중받는 것에 기인한다. 쟁론이란 서로 그 소립(所立)된 언론을 반대하는 것이다. 훼론이란 다시 서로 분노해서 추악한 말을 내뱉는 것이다. 순론이란 청정한 지견에 따라 결택되는 언론이다. 교론이란 유정을 교도하여 그 마음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자로 하여금 그 마음이 정해지도록 하는 것이고, 그 마음이 이미 정해진 자는 해탈을 얻도록 하는 모든 언론을 가리킨다.
두 번째의 논처란 왕가에서나 또는 대신의 처소에서나 또는 상인을 상대하거나[淳質] 좋은 도반을 상대하거나 법의 이치를 잘 터득하는 사문이나 바라문 등과 논단(論端)을 일으키는 것이다.
세 번째의 논의란 그 성립 근거에 의지해서 토론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가 소성립(所成立:근거의 간접적인 성립)이고, 두 번째가 능성립(能成立:근거의 직접적인 성립)이다. 소성립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자성(自性)이고, 두 번째가 차별(差別)이다. 능성립에는 여덟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입종(立宗:주제의 근거 확립)이고, 두 번째가 입인(立因:성립 이유에 관한 합리성의 확립)이고, 세 번째가 입유(立喩:성립 근거의 사실적인 확립)이고, 네 번째가 합(合:설득 근거의 제시)이고, 다섯 번째가 결(結:진리에 관한 합리적인 설명)이고, 여섯 번째가 현량(現量:존재의 지각을 통한 직접 인식)이고, 일곱 번째가 비량(比量:추리에 의해 증명되는 인식)이고, 여덟 번째가 성교량(聖敎量:올바른 믿음에서 확립되는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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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성립의 자성이란 아자성(我自性)이나 법자성(法自性)을 가리키고, 차별이란 아차별(我差別)이나 법차별(法差別)을 가리킨다. 입종이란 그 근거에 대응해서 스스로 확인한 이치를 다른 사람에게 자세히 제시해서 그가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입인이란 비록 소성립되었으나 직접적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이치를 그 현량의 성립[可得]과 불성립[不可得]을 올바르게 설명해서 이를 믿고 이해하게 하는 정황 근거[相]이다.
입유란 어떤 것을 인정하는 쪽과 인정하지 않은 쪽 모두가 수긍하도록 올바르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합이란 다른 종류의 이치로 끌어 가고자 이 같은 법에 나아가도록 그 이치를 바로 해설하는 것이다. 결이란 구경의 이치에 다다르게 되는 일체의 올바른 설명이다. 현량이란 자신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깨달아서 더 이상 미혹되어 어지럽지 않다는 뜻이다. 비량이란 그 밖의 인식 근거[量]를 제시해서 믿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성교량이란 현량ㆍ비량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네 번째의 논장엄이란 정리(正理)를 논의하는 것으로써, 그 논단(論端)을 전개하되 그 이치가 깊고 훌륭하기에 논장엄이라 이름한다. 이것에는 다시 여섯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선자타종(善自他宗)이고, 두 번째가 언음원만(言音圓滿)이고, 세 번째가 무애(無礙)이고, 네 번째가 변재(辯才)이고, 다섯 번째가 돈숙(敦肅)이고, 여섯 번째가 응공(應供)이다.
다 섯 번째의 논부(論負)는 사언(捨言:자신의 주장을 포기하는 언행)ㆍ언굴(言屈: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비굴한 언행)ㆍ언과(言過)를 가리킨다. 여기서 사언이란 자신이 논증하려던 주장[言]에 논증될 만한 근거가 없음을 자인하고서 상대방의 논증이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언굴이란 다른 일을 핑계 대는 방법 등으로 슬그머니 물러나거나, 논의와는 관계 없는 일을 거론하여 원래의 화제[宗旨]를 바꾸거나, 또는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고집을 부려서 자신의 실수를 숨기려는 등이니, 이것은 경전에서 자세히 설명한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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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과에는 간략하게 아홉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가 조리가 없는 언행[雜亂]이고, 두 번째가 상스러운 언행이고, 세 번째가 그 논의의 주제가 불명확한 언행[不辯了]이고, 네 번째가 그 비유가 한이 없는 것[無限量]이고, 다섯 번째가 이치에 어긋나는 언행[非義相應]이고, 여섯 번째가 합리적이지 못한 언행[不應時]이고, 일곱 번째가 결론 없는 논의의 전개[不決定]이고, 여덟 번째가 그 뜻이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언행[不顯了]이고, 아홉 번째가 논리가 이어지지 않는 것[不相續]이다.
여 섯 번째의 논출리(論出離)란 거론할 만한 근거가[論德] 없어진 것을 관찰하고서 더 이상의 논의를 회피하거나 계속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대론자가 올바르게 법을 거론할 만한 자격[器]이 없는 때에, 그 청중조차도 자질[德]이 부족하고 또 스스로도 이를 잘 대처할 수 없다면, 다시 논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 대론자가 올바르게 법을 논할 만한 자격이 있는 때에, 그 청중들도 자질이 충분하고 스스로도 잘 대처할 수 있다면, 계속 논의를 진행할 수가 있다.
일 곱 번째의 논다소작법(論多所作法)이란 간략하게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 거론하려는 논제를 충분히 파악하는 것’으로, 이로 인해 두루 논단을 전개하더라도 능히 감당해 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외(無畏)’이니, 이로 인해 모든 사람을 능히 대처할 수 있기에 바로 논단을 전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변재’이니, 이로 인해 갖가지 어려운 질문[問難]들을 모두 능숙하게 답변해 내는 것이다. 또 다시 만약 스스로의 이익과 안락을 구하고자 한다면 여러 논궤(論軌)에 잘 통달하되 다른 사람과의 논쟁을 함부로 일으켜서는 안 된다. 박가범께서 대승아비달마경 가운데에서 “만약 여러 보살이 정진에 힘써 여러 성품을 닦아 나가거나, 진실한 법을 행하고자 법에 따라 행하거나, 일체의 유정을 잘 거두어 이롭게 하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속히 증득하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12처법(處法)을 올바르게 관찰하되 다른 사람과 더불어 논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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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12처법입니까?
첫 번째가 위없는 이치가 미묘한 법의 증득을 자세히 설명하는 때에, 이를 믿고 이해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두 번째는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청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세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청중이 현명하여 그 논의할 만한 근거가 없어진 것을 관찰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네 번째는 모든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능히 여섯 가지 오류를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 여섯 가지 오류입니까?
잘못된 논제에 집착하는 오류[執着邪宗失]이고, 답변의 순서가 어지러운 오류[矯亂語失]이고, 고집 부리는 언사의 오류이고, 언행이 거치른 오류이고, 마음 속으로 분노하게 되는 오류이다.
다 섯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원한을 품지 않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여섯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다른 사람을 잘 애호하는 마음을 갖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일곱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정심(定心)을 잘 보호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여덟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패배를 자인하여 그 상대방의 승리를 인정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아홉 번째는 논의를 일으키는 때에, 자신이 패배하고 상대방이 이겼을 때, 이를 번민하지 않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열 번째는 마음속으로 이미 번민하는 때에, 편안하게 머물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열한 번째는 이미 안주하지 못하는 때에, 늘 평상시처럼 선법(善法)을 닦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열두 번째는 여러 선법을 이미 일관되게 닦지 못하여 그 마음이 정에 들지 못한 때에, 속히 정을 얻거나 마음이 이미 정에 들었을 경우 해탈을 속히 성취하기가 참으로 힘든 것이다.
어떠한 것이 비밀결택입니까?
그 밖의 이치를 해설하고자 명신ㆍ구신ㆍ문신을 은밀하게 전변시켜 그 밖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과도 같다.
부모와
임금 및 세간의 현인을 거역하고
국토와 그 축생조차도 박멸하는
이 같은 이를 청정하다고 이르네.
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7권 > 2. 결택분(決擇分) ⑤ > 159 - 159쪽
K.572(16-157), T.1605(31-663)
[159 / 159] 쪽
또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과도 같다.
신의도 은혜도 모두 저버리고
담벼락 아래 으슥한 곳에서
남이 토해 놓은 것을 먹는다면
이 같은 이는 가장 뛰어난 대장부일세.
또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는 것과도 같다.
깨달음이 굳지 않아도 굳은 것으로 삼고는
거꾸로 된 세상에 어질게 살면서
지극한 번뇌에 고뇌하면서
가장 훌륭한 보리를 이루도다.
계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이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보시바라밀다가 속히 원만함을 얻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인색함이 늘어나게 하는 법의 성품이고, 두 번째는 보시에 싫증내는 것이고, 세 번째는 보시하라는 요청을 염증 내는 것이고, 네 번째는 약간의 보시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보시를 아예 멀리하는 것이다. 또 계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이 이 같은 다섯 가지 법을 성취하면 범행자(梵行者)라 이름하게 되니, 제일가는 청정한 범행을 이루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떠한 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언제나 욕심을 여의기를 바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욕법(欲法)을 끊어 내는 것이고, 세 번째는 욕탐(欲貪)이 이미 생겨나면 바로 이를 단단히 붙잡는 것이고, 네 번째는 조심스럽게 욕법을 다스리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세 가지와 두 가지를 끊임없이 탐하는 것이다.
어째서 이 논(論)을 『대승아비달마집(大乘阿毘達磨集)』이라 합니까?
대략 세 가지 뜻이 있으니, 편집이 평등하기 때문이고, 편집이 세밀하기 때문이고, 편집이 정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