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4권 > 8. 계경품(契經品) > 102 - 111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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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담심론 제4권
법승 지음
승가제바ㆍ혜원 공역
김 재천 번역
8. 계경품(契經品)
이미 「정품(定品)」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계경품(契經品)」을 설명하겠다.
일체지(一切智)께서 말씀하신
계경의 미묘한 뜻
이것을 나는 이제 말하노니
응당 선한 마음으로 들으라.
비록 온갖 아비담 계경의 뜻이 있지만, 모든 계경을 자세하게 분별해서 이제 설명하겠다.
세존께서는 삼계를 말씀하셨으니,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이다.
[문] 이는 무엇인가?
[답] 욕계에 열 가지 거처가 있고
색계에는 열일곱 곳이 있으며
무색 중에 넷이 있으니,
3유(有)도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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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계에 열 가지 거처가 있다’고 함은 이 욕계에는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과 사왕천ㆍ삼십삼천ㆍ염마(炎摩)ㆍ도사다(兜師哆)ㆍ화락천ㆍ타화자재천의 6욕천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중생은 바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 처소들 중에서 물건을 얻을 수 있다면 모두 다 음욕의 소유를 원망하니, 그 때문에 욕계라고 말한다.
[문] 색계는 무엇인가?
[답] 색계는 열일곱이라고 말한다. ‘색계는 열일곱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범신(梵身)1)ㆍ범부루(梵富樓)2)ㆍ광소광(光少光)ㆍ무량광ㆍ광요(光曜)ㆍ소정(少淨)ㆍ무량정(無量淨)ㆍ변정(遍淨)ㆍ무괘애(無罣礙)3)ㆍ수복(受福)ㆍ과실(果實)ㆍ무상중생(無想衆生)ㆍ불번(不煩)ㆍ불열(不熱)ㆍ선견(善見)ㆍ선현(善現)ㆍ색구경(色究竟) 등이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처소에서는 욕애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다만 극히 묘한 색을 이루어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모습이다. 그러므로 색계인 것이다.
‘무색 중에 넷이 있다’고 함에서 ‘무색의 넷’이란 무량공처(無量空處)ㆍ무량식처(無量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들 처소에는 색이 없고 색욕을 여의었다. 그러므로 무색계라고 말한다.
[문] 세존께서는 세 가지 유(有)인 욕유ㆍ색유ㆍ무색유를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무엇인가?
[답] 세 가지 유도 또한 그러하다. 말하자면 앞의 삼계의 분별이 곧 세 가지 유이다.
[문] 세존의 말씀인 일곱 가지 식주(識住)란 무엇인가?
[답] 선취(善趣)4)는 욕계와
1) 범어로는 Brahmakāyika. 범중천(梵衆天)이라고도 한다.
2) 범어로는 Brahmapurohita. 범보천(梵輔天)이라고도 한다.
3) 범어로는 Anabharaka. 제4선의 첫 번째 천으로, 복애천(福愛天)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 하늘 이상에서는 신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운천(無雲天)이라고도 한다.
4) 범어로는 sugati. 악취(惡趣, durgati)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른바 인간ㆍ신의 둘, 혹은 아수라ㆍ인간ㆍ신의 셋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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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계에 세 곳[三地]이 있고
무색계도 역시 이와 같으니
지혜로써 모든 식주를 알아야 한다.
이 욕계 중의 취(趣)로서 선(善)에 속하는 것은 사람과 6욕천과 색계 앞의 세 가지 경지와 무색계 앞의 세 가지 경지, 즉 초선지 위에 2선지(禪地)가 셋이고 2선지 위에 3선지가 셋이고 3선지 위에 4선지는 아홉인데, 그 중에서 앞의 세 가지 지와 무색계 앞의 세 가지 지를 일곱 가지 식주라고 한다. 왜냐하면 식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취(惡趣) 중에서는 고통으로 파괴되므로 식주를 세울 수 없고, 제4선은 무상정(無想定)으로 파괴되므로 역시 식주를 세울 수 없으며, 비상비비상처는 멸진정으로 파괴되므로 식주를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다.
제일유(第一有)와 무상(無想)을 합하여
중생거(衆生居)를 아홉이라고 한다.
모든 유루의 네 가지 음(陰)은
네 가지 식주(識住)라고 말한다.
‘제일유와 무상을 합하여 중생거를 아홉이라고 한다’고 함은 이들 일곱 가지 식주와 무상중생과 비상비비상처가 아홉 가지 중생거라는 것이며, 그곳에 중생이 거처하므로 중생거(衆生居)라고 말한다.
‘모든 유루의 네 가지 음은 네 가지 식주라고 말한다’고 함은 유루의 색ㆍ통ㆍ상ㆍ행은 식이 상속하면 이들이 동반하므로 식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는 열두 갈래의 연기를 말씀하셨으니, 이 모습에 대해서도 또한 설명해야 한다.
[답] 모든 번뇌와 업과
유체(有體)는 점차로 생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유지(有枝)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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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모두에게 생겨난다.
그 중에서 번뇌는 무명과 애(愛)와 수(受)이다.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행과 유요, 체라 부르는 것은 나머지 지분[枝]을 말한다. 일체의 중생에게 점점 생겨나니, 체에 의지하여 번뇌를 세우고, 번뇌가 만드는 것은 업이며, 업으로써 만드는 것은 체이다. 그러므로 열두 가지로 분별하는 것이다.
[문] 이 가지는 일시에 행하는가, 점점 행하는가?
[답] 일시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열두 가지 고음(苦陰)을 12지(枝)라고 하는데, 무명이 우두머리가 된다.
그것들이 차례로 세워지면
생사 중에서 받게 되니,
과거와 미래와
그 중간에 여덟 가지를 말한다.
저들 유지는 차례로 세운다. 그 중에서 전생시의 일체의 번뇌와 함께 하고 동반하는 것을 무명이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업을 만들고 업은 과보를 만드는데 그것은 곧 행이다. 그것이 종자심을 만드니, 이것이 식이다. 그것과 함께 생하는 네 가지 음(陰)이 상속하는 것이 명색이요, 그 중에서 소의(所依)의 눈을 첫째로 하는 모든 근(根)이 6입(入)이다. 근과 경계와 심이 화합하는 것이 갱락(更樂)이다. 갱락이 만드는 느낌이 통(痛)이요, 통에 집착하는 것이 애(愛)이다. 통과 함께 번민하고 근심하는 것이 수(受)이고, 그 근심하는 업을 만드는 것은 유이다. 그 중에서 다시 과보를 받는 것이 생이며, 그 생 중에서 무량으로 일어나는 재앙과 근심이 노사(老死)이다. 이와 같이 이들 유지는 일체의 생 가운데에 있다. 두 가지5)는 과거세에 속하고, 두 가지6)는 미래, 여덟 가지7)는 현재 생 가운데에 속한다.
5) 무명과 행을 가리킨다.
6) 생과 노사를 가리킨다.
7) 식에서 유까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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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 계(界)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답] 모든 요소[大]에는 네 가지가 있으며
그리고 유루식과
또한 색계 중간임을 알아야 하니
이들 세계를 생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모든 요소에는 네 가지가 있으며, 그리고 유루식과 또한 색계 중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4대(大)인 지ㆍ수ㆍ화ㆍ풍과 유루식 및 물질의 중간으로서 알 수 있는 곳8), 이들 여섯 가지 법을 계(界)라고 한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수많은 법 중에서 여섯 가지 계를 말하는가?
[답] ‘이들 계는 생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이들 여섯 가지 법은 생사의 근본으로서, 이 가운데 사람들의 생각이 있다. 그 중에서 몸은 땅이 생하는 것이고, 물은 적시는 것이고, 불은 익혀서 썩은 냄새를 제거하고, 바람은 일어나는 것이다. 빈 중간9)에서 먹고 마시고, 바람의 출입으로 해서 식이 성립하나니, 이 가운데서 사람의 생각을 일으킨다. 이 죽고 사는 성질 때문에 계라고 한다.
[문] 세존께서는 네 가지 성제(聖諦)를 말씀하셨는데, 그 모습은 무엇인가?
[답] 모든 행은 과(果)가 있는 것으로서
유루인 것을 고(苦)라고 한다.
인(因)이 있는 것은 습(習)이며,
고(苦)를 다하는 것을 멸이라고 한다.
‘모든 행은 과가 있는 것으로서 유루인 것을 고라고 한다’고 함은 일체의 유루행은 원인을 따라 생하고 또한 일체의 고통과 근심을 만들므로 모든 행을 고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8) 허공[空]을 가리킨다.
9) 신체 내의 위나 장 등의 빈 공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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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이 있는 것은 습이다’고 함은 일체의 유루행은 다른 것의 원인이 되므로 일체의 행을 습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 여자를 또는 어머니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여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앞뒤로써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루행도 고제라고 하고 또는 습제라고도 하니, 이미 생한 것과 앞으로 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고를 다하는 것을 멸이라고 한다’고 함은 일체의 유루행이 멸하여 그치는 것을 멸제라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무루행이 있으면
이것을 말하여 도제라고 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니
잘 보면 곧 미세한 것을 안다.
‘만약 무루행이 있으면, 이것을 말하여 도제라고 한다’고 함은 일체의 무루행을 도제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를 그칠 때 이것도 모두 함께 그치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제(諦)라고 말하는가?
[답] 그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을 제라고 말하니, 자상(自相)의 진실로서 뒤집어지지 않는 것과, 그것을 보고 뒤집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문] 앞이 원인이고 뒤가 결과인데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앞에 과를 말씀하시고 뒤에 인을 말씀하셨는가?
[답] 잘 보면 곧 미세한 것을 안다. 성제는 비록 앞이 습이고 뒤가 고이며 앞에서 수도(修道)해서 뒤에 멸을 얻음이 있다고 해도, 다만 먼저 고제를 보고 뒤에 습제를 보며, 마찬가지로 먼저 멸제를 보고 뒤에 도제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는 거칠고 습은 미세하며, 멸은 거칠고 도는 미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먼저 고제를 말씀하시고 뒤에 습제를 말씀하셨으며, 먼저 멸제를 말씀하시고 뒤에 도제를 말씀하신 것이다.
[문] 세존께서 네 가지 성스러운 사문과(沙門果)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몇 가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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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성스러운 과보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가장 뛰어난 것은 아홉 가지 지(地)에 있다.
세 번째는 여섯 가지 지에 있고
두 가지는 모두 미래에 의지한다.
‘성스러운 과보에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함은 여섯 종류로서 네 가지 사문과가 있는 것을 말하니, 무루의 다섯 가지 음(陰)과 수연멸(數緣滅)10)이다.
[문] 네 가지 사문과는 어느 지(地)에 소속되는가?
[답] 가장 뛰어난 것은 아홉 가지 지에 있으며, 가장 뛰어난 것은 무착과(無著果)이다. 아홉 가지 지에 포섭되니, 근본사선(根本四禪)과 세 가지 무색과 미래 및 중간이다.
‘세 번째는 여섯 가지 지에 있다’고 함은 불환과(不還果)는 여섯 가지 지에 포함되어 4선과 미래 및 중간선을 함께 갖춘다는 것이다. 무색은 아니니, 법지가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는 모두 미래에 의지한다’고 함은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사다함과(斯陀含果)는 미래선에 포섭되는 것을 말하니, 아직 탐욕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 세존께서는 네 가지 도를 말씀하셨으니, 고비속통(苦非速通)ㆍ고속통ㆍ낙불속통(樂不速通)ㆍ낙속통이다. 그것은 어떠한 모습인가?
[답] 종신행(從信行)의 모든 법에
번뇌가 없는 것이 지상(遲想)이요
종법행의 모든 법에
번뇌가 없는 것이 속상(速想)이다.
10) 범어로는 pratisaṁkhyā-nirodha. 택멸(擇滅)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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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행의 모든 법에 번뇌가 없는 것이 지상이다’고 함은 종신행의 무루법은 빠르지 않아서 둔근(鈍根)의 무리에 소속된 것은 늦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받는 것으로 신해탈(信解脫)과 시해탈(時解脫)을 알아야 하니 역시 받는 것이 똑같이 둔근이기 때문이다.
‘종법행의 모든 법에 번뇌가 없는 것이 속상이다’고 함은 종법행의 무루법은 이근(利根)의 무리에 소속되므로 빠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받는 것으로 견도(見到)와 불시해탈을 알아야 하니, 역시 받는 것이 똑같이 이근이기 때문이다.
근본선지(根本禪地) 중에는
임시로 낙상(樂想)이라고 부름을 알라.
적고 얻기 어려운 까닭에
나머지는 모두 고상(苦想)이다.
‘근본선지 중에는 임시로 낙상이라고 부름을 알라’고 함은 근본사선 중에 이근과 둔근의 법을 낙도(樂道)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止)와 관(觀)이 동등하기 때문이고 즐거운 행이기 때문이다.
‘적고 얻기 어려운 까닭에 나머지는 모두 고상이다’고 함은 나머지 지(地)가 포섭하는 무루는 고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적기 때문이다. 미래선과 중간선에서는 지도(止道)가 적고, 무색 중에서는 관이 적다. 그러므로 고통이 극심하다. 오로지 얻기도 어렵고 얻어도 그 양이 적으므로 고라고 말한다.
[문] 세존께서는 불괴정(不壞淨)을 말씀하셨으니,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과 법ㆍ승ㆍ성스러운 계(戒)에 대한 불괴정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답] 자각과 성문법과
해탈과 또한 나머지 인(因)의
청정무구한 믿음과
성스러운 계와 그리고 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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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과 성문법과 해탈과 또한 나머지 인의 청정무구한 믿음’이라고 함에서 자각이란 부처님을 말한다. 그 부처님은 무착과에 포섭되고, 무학의 공덕은 곧 불법이다. 이 법에서 무루의 믿음이 있으면 이것을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이라고 말한다. 이미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성문의 학ㆍ무학의 공덕을 성문법이라고 한다. 이 법에서 무루의 믿음이 있으면, 이것을 승(僧)에 대한 불괴정이라고 한다. 열반 중에 무루의 믿음과 나머지 유위법의 고제ㆍ습제의 믿음처럼, 보살의 무루 공덕의 믿음과 학ㆍ무학ㆍ벽지불법의 믿음을 법에 대한 불괴정이라고 한다.
‘성스러운 계’란 무루의 계이니, 이것을 계에 대한 불괴정이라고 말한다.
[문] 무엇 때문에 불괴정은 오로지 무루일 뿐 유루가 아닌가?
[답]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결정된 것이니, 정견(正見)을 따르는 그 가운데에 생하기 때문이다. 무루의 믿음과 무루의 계는 무루라고 결정된다. 유루의 믿음은 믿지 않는 것에 의해 파괴된다고 하고, 유루의 계는 계가 아닌 것에 의해 파괴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무루는 파괴되지 않는 것으로서 후생(後生)에 이르므로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괴정은 오직 무루이다.
[문] 세존께서는 선정을 닦는 데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현법 중에서 낙거(樂居)를 얻는 수정이 있고, 지견(知見)을 얻는 수정이 있고, 분별혜의 수정이 있고, 누진(漏盡)을 얻는 수정이 있다. 이것은 어떠한 모습인가?
[답] 초선이 만일 선(善)이면
현법을 일러 곧 낙이라고 한다.
만약 생사에 대하여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지견이라고 한다.
‘초선이 만일 선이면 현법을 일러 곧 낙이라고 한다’고 함은 정(淨)과 무루의 초선은 능히 현법낙거(現法樂居)를 얻는다는 것이다.
‘만약 생사에 대하여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지견이라고 한다’고 함은 생사지통(生死智通)을 일러 선정을 닦는 지견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모두 5음(陰)에 의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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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하니, 분별하는 지혜로써
모든 공덕을 구하여 얻는다.
금강유(金剛喩)의 4선(禪)을
이름하여 누진이라고 한다.
‘알아야 하니, 분별하는 지혜로써 모든 공덕을 구하여 얻는다’고 함은 방편으로 생한 공덕은 욕계계(欲界戒)ㆍ문(聞)과 사수(思修)의 공덕ㆍ일체 색무색계의 선법(善法)ㆍ일체 무루의 유위법을 가리키고, 이 모두는 수정의 분별혜라는 것이다.
‘금강유의 4선을 이름하여 누진이라고 한다’고 함에서, 금강유는 최후의 학심(學心)ㆍ공상응(共相應)ㆍ공유(共有)를 가리키며 제4선에 소속된다. 이것을 수정의 누진이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는 친히 여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문] 세존께서는 4여의족(如意足)과 4정단(正斷)과 4의지(意止)를 말씀하셨다. 이것도 또한 그 모습을 설명해야 한다.
[답] 선(善)한 유위(有爲)의 법들이
방편을 구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여의족이라고 말했고
또한 정의단(正意斷)을 나타낸다.
‘선한 유위의 모든 법이 방편을 구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여의족이라고 하신다’고 했는데, ‘방편을 구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은 앞의 수정의 분별혜에서와 같이 설명한다. 이 모두가 여의족(如意足)이니, 마음대로 타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단을 나타낸다’고 함은 곧 이 일체의 공덕을 정단(正斷)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4권 > 8. 계경품(契經品) > 112 - 121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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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또한 의지(意止)이며
4성종(聖種)도 역시 그러하다.
은력(恩力)이 있어 생한다는 것이
저 성인의 말씀이다.
‘그것은 또한 의지이다’고 함은 곧 이 법을 또한 의지(意止)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 4성종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답] 4성종도 또한 그러하나니, 즉 이 법을 또한 4성종이라고도 한다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일체의 공덕을 의지ㆍ정단ㆍ여의족ㆍ성종이라고 하는가?
[답] 이른바 세력[恩力]이 있어 생한다는 것은 저 성인의 말씀이다. 이들 모든 법은 이른바 선정의 세력[定恩力]으로 인하여 생겨나서 선정을 말미암아 머문다. 그러므로 여의족이라고 한다. 정진의 세력으로 생하므로 정단이라고 하고 염의 세력으로 생하므로 의지라고 하며, 소욕지족의 세력으로 생하므로 성종이라고 한다.
이미 함께 「도품(道品)」을 분별하였다. 이제 자상(自相)을 설명하겠다.
정신(淨信)과 정진과 염과
희와 혜와 의각(倚覺)과
호(護)와 사유와 계와 정(定)
이 법을 도품이라고 이른다.
이 열 가지 법을 도품이라고 하고 나머지는 도품이 아니다. 그 중에서 ‘신’이란 신근과 신력이요, ‘정진’이란 4정단(正斷)과 정진근ㆍ정진력ㆍ정진각지ㆍ정방편이다. ‘염’이란 염근ㆍ염력ㆍ염각지ㆍ정념이요, ‘희’란 희각지이다. ‘혜’란 4의지(意止)와 혜근ㆍ혜력ㆍ택법각지ㆍ정견이요, ‘의’란 의각지이다. ‘호’란 호각지이고, ‘사유’란 정지(正志)이다. ‘계’란 정어ㆍ정업ㆍ정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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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란 네 가지 여의족과 정근ㆍ정력ㆍ정각지ㆍ정정(正定)이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법은 이와 같이 여러 종류로 분별하는가?
[답] 처(處)와 방편과 일의(一意)와
연둔(軟鈍)과 이근(利根)과
견도(見道)와 사유도로 하여
부처님께서는 서른일곱을 말씀하신다.
‘처’란 정념이 연(緣) 중에 선 것이므로 의지(意止)를 말한다. ‘방편’이란 바른 방편이므로 정단(正斷)11)을 말한다. ‘일의’란 한 가지 뜻을 세우므로 여의족(欲)12)을 말한다. ‘연둔’이란 (연약하고 둔하다는) 뜻을 얻으므로 근(信)13)이라고 말한다. ‘이근’이란 예리한 근이라는 뜻을 얻으므로 역(力)14)이라고 말한다. ‘견도’란 견도를 얻는 것이므로 도지(道支)15)라고 말한다. ‘사유도’란 사유도를 얻는 것이므로 각지16)라고 말한다. 이렇게 일을 분별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서른일곱을 말씀하셨다. 이 열 가지 법의 일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서른일곱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문] 이들 도품은 어떠한 지에 포섭되는가?
[답] 제2선(第二禪)과 미래선에서는
서른여섯 가지를 말하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서른다섯이며
중간선도 역시 그러하다.
‘제2선과 미래선에서는 서른여섯 가지를 말한다’고 함은 제2선에는 정지
11) 율의단(律儀斷)ㆍ수호단(隨護斷)ㆍ수단(修斷)을 가리킨다.
12) 정진ㆍ심ㆍ혜를 가리킨다.
13) 정진ㆍ염ㆍ정ㆍ혜를 가리킨다.
14) 신ㆍ정진ㆍ염ㆍ정ㆍ혜를 가리킨다.
15) 정견ㆍ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정정진ㆍ정념ㆍ정정을 가리킨다.
16) 택법ㆍ정진ㆍ희ㆍ지ㆍ염ㆍ정ㆍ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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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志)가 없고 미래선에는 희각지가 없으며, 나머지는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서른다섯이며 중간선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제3과 제4선과 중간선에는 희각지가 없고 정지가 없으며 나머지는 있다는 것이다.
제1선에서는 일체(一切)라고 말하고
세 가지 공에서는 서른하나를 말하며,
최상은 스물하나이고
욕계는 스물둘이다.
‘제1선에서는 일체라고 말한다’고 함은 초선은 서른일곱 가지 모두를 갖춘다는 것이다.
‘세 가지 공은 서른하나이다’고 함은 세 가지 공 중에는 서른한 가지가 있음을 말하니, 희ㆍ정지(正志)ㆍ정어ㆍ정업ㆍ정명ㆍ신의지(身意止)는 그 중엔 없고 나머지는 있다.
‘최상은 스물하나이다’고 함은 비상비비상처에는 7각지(覺支)와 8정도(正道)와 신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욕계는 스물둘이다’고 함은 각지와 도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있다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는 네 가지 식(食)을 말씀하셨으니, 췌식(揣食)ㆍ갱락식(更樂食)ㆍ의사식(意思食)ㆍ식식(識食)이다. 이는 어떤 모습인가?
[답] 모든 식 중에서 췌식은
욕계의 것으로서 세 가지이다.
식(識)과 사(思)와 갱락의 식은
유루라고 한다.
‘모든 식 중에서 췌식은 욕계의 음식으로서 세 가지이다’고 함은 췌식은 향과 맛과 미끄러움의 세 가지라는 것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제거하므로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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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이라고 한다.
‘식과 사와 갱락의 식은 유루라고 한다’고 함은 유루식ㆍ유루사ㆍ유루갱락을 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뒤에 생하는 상속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식이라고 말한다.
[문] 세존께서는 세 가지 삼마제(三摩提)를 말씀하시니, 공과 무원(無願)과 무상(無相)이다. 이 삼마제는 어떠한 행이고 몇 가지 행이 있는가?
[답] 무원에 열 가지 행(行)이 있고
두 가지 행은 바로 공정(空定)이다.
성스러운 행 중의 네 가지 행은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한다.
‘무원에 열 가지 행이 있다’고 함은 무원삼마제는 열 가지 행을 하는 것을 말하니, 무상행(無常行)과 고행(苦行)과 습제의 네 가지 행과 도제의 네 가지 행이다.
‘두 가지 행은 바로 공정이다’고 함은 공삼마제는 두 가지 행, 곧 공과 무아행이라는 것이다.
‘성스러운 행 중의 네 가지 행은 무상정이라고 한다’고 함은 무상삼마제는 멸제의 네 가지 행이라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는 네 가지 전도(顚倒)를 말씀하신다. 무상(無常)에 대하여 유상(有常)하다는 생각의 심전도(心顚倒)ㆍ상전도(想顚倒)ㆍ견전도(見顚倒)와 고에 낙이 있다는 생각ㆍ깨끗하지 않은 것에 깨끗한 것이 있다는 생각ㆍ내가 아닌 것에 내가 있다는 생각의 심전도ㆍ상전도ㆍ견전도이다. 이것은 어떠한 견해를 끊는 것으로서 어떤 본성이라고 하는가?
[답] 밝게 알아야 하니, 견고단(見苦斷)에
네 가지 전도된 것이 있다.
세 가지 견(見)의 본성의 소유이니,
견을 버리면 정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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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게 알아야 하니, 견고단에 네 가지 전도된 것이 있다’고 함은 네 가지 전도는 일체가 견고단으로, 괴로운 곳에서 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 가지 견의 본성의 소유이니, 견을 버리면 정견이라고 한다’고 함은 전도는 견의 본성으로서 세 가지 견 중에서 최상인 것을 곧 전도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신견(身見)에서는 나를 말한다. 나라고 여기는 것이 아견이기 때문이다. 변견(邊見)에서는 항상하는 것과 끊어지는 것을 본다. 견도(見盜)에서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본다. 이들 일체는 괴로운 곳에서 행하고 견의 본성의 소유이다. 심(心)ㆍ상(想)ㆍ견(見)이 혼란을 만들므로 심전도ㆍ상전도ㆍ견전도라고 말하는 것이지 다만 본성이 전도되는 것은 아니다.
[문] 세존께서는 많은 견을 말씀하셨으니 육십이 가지를 으뜸이라고 한다. 이것은 어떠한 견에 포섭되는가?
[답] 일체의 견은 다섯 가지 견에 포섭되며, 신견이 으뜸이 된다.
[문] 어떻게 아는가?
[답] 진실을 비방하는 것을
사견(邪見)이라고 말한다.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두 가지 견과 지(智)이다.
‘진실을 비방하는 것을 사견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견해를 가지고 진실법은 없다고 비방하는 것이니, 소위 베푸는 것이 없고 재(齋)17)가 없고 말씀[說]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체를 사견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보는 것은 두 가지 견과 지이다’고 함은 5음(陰) 중 진실하지 않은 것에서 나를 보고 내가 실제로 있다고 보는 견을 신견(身見)이라 하며, 진실하지 않은 즐거움과 깨끗함에 즐거움과 깨끗함이 있다고 하는 것을 견도(見盜)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삿된 지(智)의 사유가 끊어야 할 것이 있으니, 마치 밤에 보이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적
17) 범어로는 upoṣadha 혹은 poṣadha. 재계(齋戒)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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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賊)이라고 하는 것과 같고, 마치 서 있는 나무를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견(淨見)을 계도(戒盜)라고 하나니
이것은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변견(邊見)을 받아들인다 함은 이 견을 말함이니
단멸과 유상(有常)에 의지한다.
‘정견을 계도라고 하나니, 이것은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보는 것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여러 법에 있어서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이라고 보는 견을 계도라고 한다는 것이니, 마치 고행으로 해탈에 이른다고 하는 것과 같다.
‘변견을 받아들인다 함은 이 견을 말함이니, 단멸과 유상에 의지한다’고 했는데, 이른바 무상한 일을 항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을 상견이라고 한다면 인연의 상속을 알지 못한 채 이미 끊어졌다고 보는 것을 단견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이것이 수변견이다.
건립과 모든 비방과
인은 두 가지 변(邊)에 의지한다.
만약 일이 움직여 행함이 있으면
이것은 정견으로 끊어야만 한다.
‘건립과 모든 비방’이란 사견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고를 비방하면 이것은 견고단(見苦斷)이다. 만약 습을 비방하면 견습단이요, 만약 멸을 비방하면 견멸단이다. 만약 도를 비방하면 견도단이니, 신견(身見)은 고아(苦我)에 대해 이것을 나라고 건립하니, 이것은 견고단이요, 견도(見盜)는 고를 낙이라고 건립하니, 이것도 견고단이다. 만약 습이라면 이것은 견습단이요, 만약 멸이라면 이것은 견멸단이다. 정법을 받지 못하면 이로 해서 견멸단이고, 도도 또한 그러하다. 계도는 유루처에서 행하면 견고단이요, 무루처에서 행하면 견도단이다. 끊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항상한 것이라고 계교하는 것 역시 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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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이다. 나타난 5음에서 단멸을 느끼거나 항상함을 생각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닐 뿐이다. 이들 중에서 일체의 견들을 분별한다.
[문] 세존께서는 스물두 가지 근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답] 여러 계(界)로서 안에 존재하는 것과
몸의 셋과 그리고 명근(命根)
이들 근은 생사에 의지한다는 것은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다.
‘여러 계로서 안에 존재하는 것’이란 안ㆍ이ㆍ비ㆍ설ㆍ의이다.
‘몸의 셋’이란 신근의 세 종류인 신근ㆍ남근ㆍ여근이요, ‘그리고 명근’이란 아홉 번째 명근을 말한다.
‘이들 근은 생사에 의지한다는 것은 성인께서 하신 말씀이다’고 함은 이들 아홉 가지 근은 생사에 의지하므로 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이들 생사의 생각이다.
통(痛)을 따라 여러 번뇌가 생긴다.
믿음을 첫째로 하는 것은 청정에 의지함이니,
아홉 가지 근이 무루일 경우
이 세 가지로 도에 의지한다.
‘통을 따라 여러 번뇌가 생긴다’고 함은 낙근ㆍ고근ㆍ희근ㆍ우근ㆍ호근(護根)의 모든 통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따라 모든 번뇌가 있으므로 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첫째로 하는 것은 청정에 의지한다’고 함은 신근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에 의해 해탈하므로 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홉 가지 근이 무루일 경우 이 세 가지로 도에 의지한다’고 함은, 믿음을 첫째로 하는 다섯 가지 근과 세 가지 통과 의근이 무루이면 도에 의지하므로 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신행(從信行)ㆍ종법행(從法行)의 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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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섭되는 것은 미지근(未知根)이요, 사유도(思惟道)에 포섭되는 것은 이지근(已知根)이며, 무학도에 포섭되는 것은 무지근(無知根)이다.
[문] 이 중 몇 가지가 욕계에 매이고, 몇 가지가 색계에 매이며, 몇 가지가 무색계에 매이는가?
[답] 욕계는 네 가지이고 선(善)은 여덟 가지이다.
색종성(色種性)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모든 심수(心數)는 열 가지이고
한 가지는 마음이라는 것이 지혜로운 분의 말씀이다.
‘욕계는 네 가지’라고 함은 남근ㆍ여근ㆍ고근ㆍ우근은 오로지 욕계에 매인다는 것이며, 나머지는 「계품」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선은 여덟 가지’라고 함은 믿음을 첫째로 하는 다섯 가지 근과 세 가지 무루를 말한다.
‘색종성에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함은 색의 근에 일곱 가지가 있으니, 다섯 가지 색근과 남근과 여근을 말하며, 나머지는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 몇 가지가 성심(性心)이고 몇 가지가 성심에 속하는 것이며 몇 가지는 성심도 아니고 성심수도 아닌가?
[답] 모든 심수는 열 가지이니, 믿음을 첫째로 하는 다섯 가지 근과 다섯 가지 통이다.
‘한 가지는 마음이라는 것이 지혜로운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의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 근은 성심이 아니고 성심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문] 몇 가지가 과보가 있는 것[有報]이고, 몇 가지가 과보가 없는 것[無報]인가?
[답] 하나와 열은 과보를 지닌다는 것이
지혜로운 분의 말씀이다.
열셋은 시보(是報)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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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실자(見實者)는 분별한다.
‘한 가지’라고 함은 우근(憂根)을 말한다. 일정하게 유보(有報)이니, 오로지 선과 불선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방편으로 일어나니, 이것은 과보에 따라 생하지 않고, 위의(威儀)도 아니며, 공교(工巧)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기(無記)가 아니기 때문에 오직 유보이다.
‘열은 과보를 지닌다는 것이 지혜로운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믿음을 으뜸으로 삼는 다섯 가지 근은 말하자면 유루이면 과보를 지니고, 무루이면 과보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근과 세 가지 통은 무기 및 무루이면 과보를 지니지 않고, 나머지 선과 불선이면 과보를 지닌다. 또 고근은 무기이면 과보를 지니지 않고 나머지는 과보를 지닌다.
[문] 몇 가지가 과보에 따라 생하는 것[是報]이고, 몇 가지는 과보에 따라 생하지 않는 것[非是報]인가?
[답] 열셋은 시보라고 견실자는 분별한다. 열세 가지 근 중에서는 혹은 본성이 시보이거나 혹은 아니다. 색근의 일곱 가지18)와 명근과 의근과 네 가지 통19)의 무기법은 선과 불선 중에서 생하므로 과보이다.
[문] 살아 있을 때에는 몇 개의 근이 최초의 과보를 얻는가?
[답] 둘 혹은 여섯ㆍ일곱ㆍ여덟은
처음에 얻을 수 있다.
욕 중에 과보를 지니는 모습이 있으며
또한 여섯과 위는 하나이다.
‘둘 혹은 여섯ㆍ일곱ㆍ여덟은 처음에 얻을 수 있다’고 함은, 말하자면 점점 근을 이루는 것이다. 난생ㆍ습생ㆍ태생과 같은 것은 제일 처음에 두 가지 근이 생하니, 신근과 명근이다. 화생(化生)의 무형(無形)20)은 여섯 가지 근을
18)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남녀의 근을 가리킨다.
19) 희근ㆍ낙근ㆍ고근ㆍ호근의 넷을 가리킨다.
20) 남녀의 근이 없는 존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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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으니, 다섯 가지 색근과 명근이다. 한 가지 형태는 일곱, 두 가지 형태는 여덟이다.
‘욕 중에 과보를 지니는 모습이 있다’고 함은 이것은 오직 욕계의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여섯과 위는 하나이다’고 함은, 색계는 최초에 여섯 가지 근을 얻고 무색은 하나의 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때 오로지 더러운 마음이므로 오직 더러움을 얻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과보가 아니다.
[문] 목숨이 다했을 때에는 몇 가지 근을 최후에 버리는가?
[답] 넷을 버리고 여덟이나 아홉이기도 하며
혹은 다시 열을 버리기도 한다.
죽을 때에 점점 없어지니,
선한 버림[捨]은 각각 다섯을 더한다.
‘넷을 버리고 여덟이나 아홉이기도 하며 혹은 다시 열을 버리기도 한다. 죽을 때에 점점 없어진다’고 함은 무기심으로서 점차 목숨이 끝날 때에는 최후에 네 가지 근을 버리나니 신ㆍ의ㆍ명ㆍ호근이고, 무형이 일시에 무기심으로서 목숨이 끝나는 것은 여덟 가지 근을 버리고, 한 가지 형태는 아홉, 두 가지 형태는 열 가지라는 것이다.
‘선한 버림[捨]은 각각 다섯을 더한다’고 함은 곧 그것이 선심이라면 믿음을 첫째로 하는 다섯 가지 근을 더한다는 것이다. 색계ㆍ무색계의 근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문] 몇 가지는 견단이고, 몇 가지는 사유단이며, 몇 가지는 무단(無斷)인가?
[답] 두 가지 단(斷)과 무단은 넷이고
두 가지 근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며
세 가지 미묘는 부단(不斷)이니,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4권 > 8. 계경품(契經品) > 122 - 131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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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나머지는 사유단이다.
‘두 가지 단과 무단은 넷이다’고 함은 네 가지 근은 견단ㆍ사유단ㆍ무단이니 의근과 세 가지 통(痛)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근에는 여섯이 있다’고 함은 믿음을 첫째로 하는 다섯 가지 근과 우근을 말한다.
‘세 가지 미묘는 부단이다’고 함은 세 가지 무루는 부단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나머지는 사유단이다’고 함은 아홉 가지 근은 사유단이라는 것이니, 명근의 여덟과 고근을 말한다.
이미 모든 경을 설명하였으니, 이제는 문(門)을 설명하겠다.
[문] 세존께서는 여섯 가지 식을 말씀하시니, 안식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식이다. 이들 식은 어떠한 법을 식별하는가?
[답] 모든 근의 의(義)를 취하는 것은
다섯 가지 심계(心界)이고
일체의 법들을 받는 것은
이를 의식계라고 한다.
‘모든 근의 의를 취하는 것은 다섯 가지 심계이다’고 함에서, 의21)는 다섯 가지 물질[色]을 가리킨다. 이것은 5식(識)이 식별하나니, 안식은 물질을 식별하고 나아가 신식은 세활을 식별한다.
‘일체의 법들을 받는 것은, 이를 의식계라고 한다’고 함은 의식은 일체의 법들을 식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온갖 법을 경계로 한다.
[문] 열 가지 법이 있으니, 욕계의 상응ㆍ불상응과 색계의 상응ㆍ불상응과 무색계의 상응ㆍ불상응과 유위 무루의 상응ㆍ불상응과 무위의 두 가지인 선과 무기이다. 이 중에서는 지(智)를 분별해야 한다. 하나하나의 지는 어떠한 법을 경계로 하는가?
21) 소연의 경계, 즉 대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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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알아야 하니, 다섯 가지 법은
법지(法智)의 경계이다.
미지지(未知智)는 일곱이 되고
타심(他心)은 셋을 경계로 한다.
‘알아야 하니, 다섯 가지 법은 법지의 경계이다’고 함은 다섯 가지 법은 법지의 경계라는 것이다. [다섯이란] 욕계의 상응ㆍ불상응과 무루의 상응ㆍ불상응과 무위의 선이다.
‘미지지는 일곱이 된다’고 함은 미지지는 일곱 가지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니, 색계ㆍ무색계와 무루의 상응ㆍ불상응과 무위의 선이다.
‘타심[지]는 셋을 경계로 한다’고 함은 타심지는 세 가지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니, 욕과 색과 무루의 상응이다.
유루지는 열 가지가 있고
인과 과는 여섯을 경계로 한다.
해탈지는 하나의 법이요
도는 둘이고 나머지는 아홉이다.
‘유루지는 열 가지가 있다’고 함은 유루지는 등지(等智)이고 이것은 일체의 열 가지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다. 일체법을 경계로 하기 때문이다.
‘인과 과는 여섯을 경계로 한다’고 함은 고지(苦智)와 습지(習智)는 여섯 가지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니, 삼계(三界)의 상응ㆍ불상응이다.
‘해탈지는 하나의 법이다’고 함은 멸지는 하나의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니, 오직 무위의 선이다.
‘도는 둘’이라 함은 도지는 두 가지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니, 유위 무루의 상응ㆍ불상응이다.
‘나머지는 아홉’이란 그 밖의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는 아홉 가지 법을 경계로 한다는 것이다. 무위의 무기는 제외된다. 이것을 지해(智解)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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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地)의 번뇌는
반드시 자신의 지를 소사(所使)한다.
일체에 두루하는 것과 이들 종류[種]는
그 유(類)에 따라 존재한다.
‘자신의 지의 번뇌는 반드시 자신의 지를 소사한다’고 함은 욕계의 모든 번뇌는 욕계에 대하여 번뇌를 부리고[所使]하고, 범세(梵世)의 모든 번뇌는 범세에 대하여 번뇌를 부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상비비상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알아야 한다.
‘일체에 두루하는 것과 이들 종류는 그 유에 따라 존재한다’고 함은 일체에 두루하여 통하는 것과 일체에 두루하여 통하지 않는 것의 모든 번뇌는 종류에 따라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일체에 두루하여 통하는 것은 또한 다른 종류도 있다. 마치 신견을 견고로써 끊는 경우, 이 가운데 고제로써 끊어야 할 것으로서 일체의 번뇌에 부림을 받는 것과 아울러 견습으로써 끊어야 할 것으로서 일체에 통하는 것이 있다. 마찬가지로 또한 명근(命根)의 사유단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사유로써 끊어야 할 일체의 것으로서 번뇌에 부림을 받는 것과 아울러 일체에 통하는 것이 있다.
삼계의 번뇌가 정한 것은
반드시 삼계에 있다.
두 가지 계는 마땅히 알아야 하니
하나의 계도 역시 그러하다.
‘삼계의 번뇌가 정한 것은 반드시 삼계에 있다’고 함은 말하자면 법이 삼계에 포섭되는 것은 결정코 삼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삼계는 일체 사(使)의 소사이다. 마치 의근이 반드시 삼계에 있고 이 중에서 일체 사의 소사인 것과 같다.
‘두 가지 계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함은 말하자면 법이 두 가지 계에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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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되는 것은 두 가지 계에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두 가지 계의 일체 사의 소사로서, 계에 따라 얻을 수 있다. 각(覺)ㆍ관(觀)이 반드시 욕ㆍ색계에 있고, 이 중에서 욕ㆍ색계의 일체 사의 소사인 것과 같다.
‘하나의 계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말하자면 법이 결정적으로 하나의 계에 있는 것은 이 중에서 하나의 계의 일체 사의 소사라는 것이다. 마치 우근(憂根)이 반드시 욕계에 있고, [이 중에서] 욕계의 일체 사의 소사인 것과 같다.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계경을 말씀하시어
모든 법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식(識)과 지(智)와 모든 사(使)의
세 가지 문(門)을 분별한다.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계경 중에 모든 법을 말씀하시어 이를 세 가지 문에 응하여 분별하였으니, 식문과 지문과 사문이다. 그것은 마치 욕유 중의 다섯 가지 근(根)의 대상은 6식으로 식별하며, 색계는 네 가지 식(識)으로서 비식ㆍ설식을 제외한 것이고, 상응ㆍ불상응이므로 일곱 가지 지(智)22)로 알고[知], 다섯 가지이므로 욕ㆍ색계의 사(使)의 소사(所使)인 것과 같다.
9. 잡품(雜品)
이미「계경품」을 설명하였으니, 이제「잡품」을 설명하겠다.
이미 상응에 따라
하나하나 법을 분별하여 설명하였다.
위에서의 여러 복잡한 뜻을
이제 간단하게 설명하니 잘 들으라.
22) 열 가지 지에서 미지지ㆍ도지ㆍ멸지를 제외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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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有緣)과 또한 상응과
유행(有行)과 혹은 의(依)와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동일한 의미를 말한 것이다.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그 이름에 차별이 있다. 일체의 행은 하나의 연이므로 유연이라고 한다. 또 서로 상응하므로 상응이라 하고, 경계에서 행하므로 행이라 하며, 의를 연유하여 생하므로 의라고 한다.
연에 따라 생하는 것과 또한 인과
유인(有因)과 유위와
설처(說處)와 유도로(有道路)와
유과(有果)라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유위법 중에 이들 이름의 차별이 있다. 연을 의지하기 때문에 연이라고 하고, 다른 것을 일으키므로 인이라고 한다. 인을 의지하므로 유인이라고 하고, 만드는 것을 의지하고 있으므로 유위라고 한다. 많은 방편의 선한 드러남이므로 처라고 하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길에 의지하므로 도로라고 한다. 과를 움직여 이루는 것이므로 유과라고 한다.
유악(有惡)과 또한 은몰(隱沒)과
예오(穢汚)와 하천(下賤)과 흑이다.
선유위(善有爲)와 습(習)이며
또한 수학(修學)이라고 이름한다.
‘유악과 또한 은몰과 예오와 하천과 흑이다’고 함은 불선과 은몰 무기법에 이들 이름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무리 중에 서므로[立] 유악이라고 하고, 번뇌에 덮이므로 은몰이라고 한다. 번뇌의 때가 더러우므로 예오라고 하고, 평범하고 비천하므로 하천이라고 하며, 지혜가 없이 어둡고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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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러우므로 흑이라고 한다.
‘선유위와 습’이란 선의 유위법에 이들 이름의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혜 중에서 생하므로 선이라고 하고, 행할 때에 능히 공덕을 얻고, 행할 수 있으므로 습과 수라고 한다.
이미 심상응행을 설명하였으니, 이제 심불상응행을 말하겠다.
무사상(無思想)과 두 가지 정(定)과
또한 중생의 종류와
구신(句身)과 미(味)ㆍ명신(名身)과
명근(命根)과 법득(法得)이며
범부 본성의 소유와
모든 법의 네 가지 상(相)으로서
색이 아닌 것의 불상응인 것이 있으니
이를 유위행이라고 말한다.
‘무사상(無思想)’이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서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두 가지 정’이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이니, 무상정은 생사를 싫어하는 해탈상으로서 제4선(第四禪)을 통하여 마음의 상속(相續)이 일시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멸진정은 수고롭고 힘쓰는 것을 싫어하는 식지상(息止想)으로서 비상비비상처를 통하여 마음의 상속이 일시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중생의 종류[衆同分]’란 처에 생한 뒤에 이 처에서 생하는 중생의 의(依)와 마음이 서로 비슷한 것이다.
‘구’란 이름이 모여 말하게 되는 것이니, 마치 행하는 것이 영원하지 못하여 흥하고 쇠하는 법이라는 것과 같다.
‘미(味)’란 구(句)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 자세히 말하면 게(偈)와 계경과 같다.
‘명’이란 자(字)가 모여 뜻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상(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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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근’이란 근(根)과 대(大) 등이 상속하여 끊이지 않는 것이다.
‘득’이란 모든 법을 성취하여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범부의 본성(凡夫性)’이란 바르게 깨달아 여의는 성인의 법을 아직 취하지 않은 것으로, 이는 범부 본성의 소유이다.
‘네 가지 상’이란 생(生)ㆍ주(住)ㆍ노(老)ㆍ무상(無常)이다.
‘색이 아닌 것’이란, 이들 온갖 법으로서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은 색이 아닌 것이고 색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상응’이란 연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유위행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유위가 짓는 것이므로 유위행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문] 이 중 몇 가지가 선이고, 몇 가지가 불선이며, 몇 가지가 무기인가?
[답] 선은 두 가지이고, 다섯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일곱 가지는 마땅히 무기이다.
둘은 색계에 있다고 알아야 하고
하나는 무색지(無色地)에 있다.
‘선은 둘이다’고 함은 무상정과 멸진정을 말한다.
‘다섯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함은 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으로서 선 중에 있는 것은 선, 불선 중에 있는 것은 불선, 무기 중에 있는 것은 무기라는 것이다.
‘일곱 가지는 마땅히 무기이다’고 함은 무상천(無想天)ㆍ중생의 종류ㆍ구(句)ㆍ미(味)ㆍ명(名)ㆍ명(命)ㆍ범부 본성의 소유라는 일곱 가지가 무기라는 것이다.
[문] 이 중 몇 가지는 욕계에 매이고, 몇 가지는 색계에 매이며, 몇 가지는 무색계에 매이는가?
[답] 두 가지는 색에 있고 하나는 무색지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은 색에 있다’고 함은 무상정과 무상천은 색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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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무색지에 있다’고 함은 멸진정은 무색계에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계에는 셋을 말하고
나머지는 삼계에 있다.
유루ㆍ무루인 것은 다섯 가지가 있고
그 나머지는 반드시 유루이다.
‘두 가지 계에는 셋을 말한다’고 함은 구(句)ㆍ미(味)ㆍ명(名)은 욕계에 있고 또한 색계에 있다는 것이다. 무색계에 있는 것은 아니니, 언어를 떠났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삼계에 있다’고 함은 중생의 종류ㆍ명(命)ㆍ득ㆍ범부성의 소유 및 네 가지 상(相)은 모두가 삼계에 있다는 것이다.
[문] 이 중 몇 가지는 유루이고, 몇 가지는 무루인가?
[답] ‘유루ㆍ무루인 것은 다섯이다. 그 나머지는 반드시 유루이다.’ 다섯이란 득ㆍ생ㆍ노ㆍ주ㆍ무상으로서, 유루 중에 있는 것은 유루이고 무루 중에 있는 것은 무루이다.
‘그 나머지는 반드시 유루이다’고 함은 말하자면 나머지 일체는 반드시 유루라는 것이다.
[문] 이들 성인의 법을 여읜 것을 임시로 범부라고 이름하니, 삼계 중의 무기이다. 이것은 어떻게 하여 버리고, 어떻게 하여 끊는가?
[답] 처음 무루심 중에서
성인은 성취하지 않고 버린다.
범부는 모든 세계에서 떠돌다가
욕을 여읠 때에는 모두 멸진한다.
‘처음 무루심 중에서 성인은 성취하지 않고 버린다’고 함은 제일무루심 중에서 성인의 법을 얻을 때 득(得)은 성취되지 않고 버려진다는 것이다.
‘범부는 모든 세계에서 떠돈다’고 했는데, 모든 세계를 떠돌면서 이른바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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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서 목숨이 끊어지면 그 처소를 버리는 것이며, 처소에서 생하면 그 처소에서 얻는 것이니, 무기이기 때문이다.
‘욕을 여읠 때에 멸진한다’고 함은 이른바 경지[地]를 말하는 것으로서, 범부의 소유로서 만약 이 경지에서 욕을 여의면 그때에 범부성을 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심불상응행을 설명했으니 이제 무위를 설명하겠다. 세 가지 무위법이 있으니, 수연멸(數緣滅)23)과 비수연멸(非數緣滅)24)과 허공이다. 그 중에서 수연멸은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수연멸에 의해 유루법은 번뇌를 여의고 해탈한다. 수연력(數緣力)ㆍ지력(智力)은 일을 계교한다 해도 무(無)이니, 이것을 수연멸이라 한다. 걸림이 없는 모습을 이름하여 허공이라고 하니, 말하자면 색을 장애하지 않는 것이 허공이다.
모든 법은 여러 가지 연으로 일어나고
또한 의(依)와 연을 따른다.
갖추지 않으면 생하지 않나니
이러한 멸은 명(明)이 아니다.
일체의 유위법은 여러 가지 연을 따라 생하나니, 연이 없으면 곧 생하지 않는다. 안식이 눈에 의지하고 색에 의지하고 공간[空]에 의지하고 밝음에 의지하고 땅에 의지하고 적연(寂然)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이들 일체가 함께 화합하면 다시 생함을 얻는다. 나머지가 갖춰지지 않으면 다시 생함을 얻지 않나니, 눈의 경우와 같다. 눈이 모든 순간에 생한다 해도 그때 이들 나머지 일이 갖춰지지 않으면 안식은 생함을 얻을 수 없다. 그 안식이 생해야 하는데도 생하지 않으면 눈이 이미 생해도 결국 다시 또 생하지 않으니, 이 연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어도 미래에 다시 당연히 생하지 않으니, 그 갖춰 일어나는 것이 잘못되고 멀어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수연멸이다. 이와 같은 일체의 행을 모두 다 알아야 한다.
23) 범어로는 pratisaṁkhyā-nirodha. 택멸(擇滅)이라고도 한다.
24) 범어로는 apratisaṁkhyā-nirodha. 비택멸(非擇滅)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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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무위를 설명하였으니, 이제 인을 설명하겠다.
[문] 유위법은 인이라고 말한다. 이 중에서 어떻게 하여 인이 되는 것이고, 무엇의 인이라고 하는 것인가?
[답] 앞의 인(因)은 상사(相似)와 증(增)이며
혹은 함께 의지하여 생한다.
두 가지 인과 하나의 연은
오로지 이미 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앞의 인은 상사와 증이다’고 함은 앞에서 생한 법은 뒤에 생하는 것의 상사인과 전증(轉增)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약한 선[軟善]은 자신의 경지에서 연약한 선의 인과 중간의 인, 위의 인이다. 그리고 중은 중간에서의 인이고, 위의 인이며, 위는 오직 위의 인인 것과 같다. 법을 행할 때에는 머무는 것이 있고 더하는 것이 있어도 끝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혹은 함께 의지하여 생한다’고 함은 혹 인이 함께 생하는 것이 상응인과 공유인과 같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인과 하나의 연은 오로지 이미 생한 것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자연인으로서 이미 생한 것은 당연히 인이고 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의 것은 뒤에 것의 인이다. 생하지 않은 것에는 앞뒤가 없다. 만약 있다고 하면 수시로 생하고 인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 다만 그렇지 않으므로 있지 않은 것이다. 일체변인도 또한 이와 같으며 차제연도 역시 [그러하다].
[문] 이들 보(報)는 중생의 범주인가, 비중생의 범주인가?
[답] 보는 중생의 범주이다. 보란 중생에 속한 법 가운데서 말하고 중생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의 범주는 공유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요, 비중생의 범주는 공유이므로 보가 아니다.
[문] 이것의 과법(果法)은 무엇인가?
[답] 유위와 해탈과이다. 일체 유위법의 본성은 과의 소유이니, 인연으로 말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4권 > 9. 잡품(雜品) > 132 - 141쪽
K.959 (28-355), T.1550 (28-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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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기 때문이다. 무위의 해탈과는 또한 도과(道果)라고 말해야 한다.
[문] 유연법(有緣法)은 어떻게 연을 행하는가?
[답] 유연인 것은 함께 갖추는 것이다. 유연법은 상응이고 함께 갖추는 것이니, 하나의 연 중에서 행하여 떠나지 않는 것이다.
[문] 어느 곳에서 행하는가?
[답] 다른 경계에서 행한다. 다른 경계 중에서 행하므로 자성(自性)은 아니다. 자기를 떠나 행하나니 차별을 연하기 때문이다.
[문]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에는 처소가 있다고 하는가, 처소가 없다고 하는가?
[답] 처소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인(普因)이기 때문이다. 보인이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생한다. 두 개의 눈으로 인하여 하나의 식을 생한다. 만약 머무는 곳이 있으면 마땅히 하나의 눈 중에 머물러야 하니, 하나의 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두 번째의 눈은 마땅히 색을 보지 못해야 하지만 본다. 그러므로 하나의 눈 중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일체를 모두 다 알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그 때문에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 설하신 바 심해탈은 무엇인가? 심해탈은 과거라고 하는가, 미래라고 하는가, 현재라고 하는가?
[답] 생겨날 때에 해탈하니, 도가 일어날 때에 해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가 생할 때에 모든 번뇌가 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겨날 때에 해탈한다고 한다.
[문] 도가 생할 때에 번뇌를 끊는 것인가?
[답] 도가 멸할 때에 결박을 멸한다는 것은
밝은 지혜 지니신 분의 말씀이다.
도가 멸할 때에 모든 번뇌를 끊고, 생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왜냐 하면 도가 생할 때란 바로 미래이니, 미래의 도란 일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애도가 멸할 때에 번뇌가 끊어지고, 해탈도가 생할 때에는 해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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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세존께서 유애(有愛)ㆍ무유애를 말씀하셨다. 유애는 몇 가지이고, 무유애는 몇 가지인가?
[답] 유애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며
무유는 오직 하나의 모습뿐이다.
‘유애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유애란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애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섯 가지이니, 견고단ㆍ견습ㆍ멸ㆍ도단ㆍ사유단이다.
‘무유는 오직 하나의 모습이다’고 함은 무유애는 이미 끊음을 보고 끊음을 즐거워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유애라고 하는데 이는 한결같이 사유단뿐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견에 따르는 애는 사유단이기 때문이다. 이는 움직이거나 행하여 상속하지 않는 중의 애이고 애의 견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유단이라는 것이다.
[문] 세존께서는 삼계를 말씀하시니, 단계(斷界)ㆍ무욕계ㆍ멸계이다. 이것은 어떠한 모습인가?
[답] 애(愛)와 처(處)와 나머지 번뇌를 멸하면
삼계를 (벗어난다).
갈애를 끊으면 이는 무욕계이고, 처(處)를 끊으면 멸계이며, 나머지 번뇌를 끊으면 단계이다.
[문] 열 가지 마음[心]이 있다. 욕계의 선(善)ㆍ더러움ㆍ무기와 색계의 선ㆍ더러움ㆍ무기와 무색계의 선ㆍ더러움ㆍ무기 및 무루이다. 이러한 마음은 몇 가지가 더러운 마음 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몇 가지가 선한 마음 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몇 가지가 무기심 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답] 더러운 마음은 열 가지를 얻는다는 것은
바르게 깨달은 분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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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마음 중에서 여섯을 얻으며
무기는 곧 무기이다.
‘더러운 마음은 열 가지를 얻는다는 것은 바르게 깨달은 분의 말씀이다’고 함은 더러운 마음 중에서는 일체 열 가지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계(界)와 지(地)가 돌아올 때에 삼계의 선ㆍ더러움과 무기를 이 마음은 모두 얻으며, 물러갈 때에는 무루를 얻는다.
‘선한 마음 중에서 여섯을 얻는다’고 함은 선한 마음 중에서는 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곧, 욕계에서 선하게 구하고 배워 얻는 것으로, 신(身)ㆍ구(口)의 행과 변화하는 마음인 무기와 색계의 선과 변화하는 마음인 무기와 무색계의 선한 마음과 무루이다.
‘무기는 곧 무기이다’고 함은 무기심은 오직 무기를 얻는다는 것이니, 열등하기 때문이다.
[문] 앞에서 이미 도품의 열 가지 법을 설명했는데, 이 가운데 몇 가지가 근의 본성을 소유하고, 몇 가지는 근이 아닌 것인가?
[답] 도품에 여섯 가지 법이 있으니
이것이 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여섯 가지 법은 근의 본성을 소유하니, 믿음을 첫째로 하는 다섯 가지 근25)과 희(喜)이다. 나머지는 근이 아닌 것의 소유이다.
[문] 모든 법은 자성과 서로 호응하는가, 타성과 서로 호응하는가?
[답] 모든 법에 대하여 서로 호응하나니
이것을 타(他)라고 한다.
모든 법은 타성과 서로 호응하고 자성과는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자성은
25) 신근ㆍ정진근ㆍ염근ㆍ정근ㆍ혜근의 다섯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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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이들의 해탈은 어떠해야 하는가?
[답] 연(緣) 중에서 결박을 푼다는 것이
대선(大仙)께서 하신 말씀이다.
모든 번뇌는 대상에 대한 어리석음이다. 즉 그가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연 중의 결박은 곧 그 가운데에서 풀어진다. 서로 호응하는 것으로는 서로 호응하는 것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문] 만약 끊으면 즉 이는 해탈과 다르다고 하는가?
[답] 이처럼 만약 해탈한다면 곧 그것이 끊어진 것이다.
[문] 끊어도 해탈한 것이 아닌 경우가 있는가, 없는가?
[답] 있다. 끊고 나서도 본래대로 결박인 경우이니, 견도와 사유가 그것이다.
고지(苦智)는 이미 생하고 습지가 아직 생하지 않았으면, 견고에서 끊어야 할 번뇌가 끊어져도 견습에서 끊어야 할 번뇌에 매인다. 이와 같이 사유에서 끊어야 할 일체의 종류도 그러하니, 다시 서로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문] 네 가지 진제를 보고 어떻게 불괴정(不壞淨)을 얻는가?
[답] 둘은 3제(諦)를 이해하고
넷은 바른 도를 봄으로써
깨끗한 믿음을 일으키나니
두 세계에서 닦고 익혀야 한다.
‘둘은 3제를 이해한다’고 함은 고ㆍ습ㆍ멸을 관찰하여 법에서 불괴정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고지(苦智)ㆍ습지ㆍ멸지와 서로 호응하는 믿음이니, 이를 불괴정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이것과 성계(聖戒)를 얻는다.
‘넷은 바른 도를 봄으로써 깨끗한 믿음을 일으킨다’고 함은 도를 볼 때 함께 네 가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문] 어느 세계에서 닦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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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수습은 두 가지 세계에서 [일어난다]. 모든 법은 두 가지 세계에서 닦나니, 현재는 행수(行修)26)이고 미래는 득수(得修)이다.
[문] 마음과 함께 행하는 법은 무엇인가?
[답] 일체의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은,
이를 마음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의 모습과 나머지 법과
작용에 대해서도 또한 알아야 한다.
‘일체의 마음에 속한 법은, 이를 마음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함은 마음에 속한 법은 모두가 마음과 함께 행한다는 것으로, 마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이것의 모습’이란, 이 마음에 네 가지 모습이 있다는 것이니, 생ㆍ주ㆍ노ㆍ무상이며, 또한 마음과 가깝기 때문이다.
‘나머지 법’이란 나머지 마음에 속한 법의 모습도 역시 마음과 함께 행한다는 것이다.
‘작용에 대해서도 또한 알아야 한다’고 함은 무교(無敎)의 계(戒)를 말하니,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 단법(斷法)은 어떤 것인가?
[답] 끊어야 할 것은 모든 유루법이다. 일체의 유루법을 끊어야 하나니, 뒤섞이고 거칠기 때문이다.
[문] 지법(知法)은 어떤 것인가?
[답] 지와 여러 때 묻지 않은 유루 및 무루이니, 이 일체가 지법이다. 온갖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문] 원법(遠法)이란 무엇인가?
[답] 과거와 미래를 멀다고 하니, 사건을 변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 근법(近法)이란 무엇인가?
26) 이본에 의거해 원문의 수행(修行)을 행수(行修)로 고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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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나머지를 근이라고 말한다. 즉 현재는 근이니, 사건을 변별하기 때문이다. 무위는 근이니, 빨리 얻기 때문이다.
[문] 정법(定法)이란 무엇인가?
[답] 무간(無間)의 구제할 수 없는 업과
모든 무루행을, 지혜 있는 분께서
정해졌다고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무간업27)은 결정코 지옥에 이르기 때문이요, 무루행도 역시 결정코 해탈과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문] 견처(見處)란 무엇인가?
[답] 견처란 반드시 유루이다. 일체의 유루법은 견처이니, 다섯 가지 견28)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문] 만약에 근을 성취한다면, 몇 가지 근을 성취하는 것인가?
[답] 열아홉 가지 근이 있다고 말하니,
성취가 가장 많은 것이다.
작은 성취의 최대는 여덟이라는 것이
근을 밝게 깨달은 이의 말씀이다.
‘열아홉 가지 근이 있다고 말하니, 성취가 가장 많은 것이다’고 함은 열아홉 가지 근의 성취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 2형(形)29)과 근을 갖춘 자가 욕을 아직 여의지 못하고 진리를 보는 것과 같다.
‘작은 성취의 최대는 여덟이라는 것이 근을 밝게 깨달은 자의 말씀이다’고 함은, 여덟 가지 근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신근(身根)을 갖추지 못한 자가 선한 근을 끊는 것, 그리고 무색 가운데 생하는 범부와 같다.
27) 살모ㆍ살부ㆍ살아라한ㆍ출불신혈ㆍ파승의 5역죄(逆罪)를 가리킨다.
28) 신견ㆍ변견ㆍ사견ㆍ견도ㆍ계도의 다섯을 가리킨다.
29) 남녀의 근을 동시에 지닌 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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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몇 가지의 갱락(更樂)이 있는가?
[답] 다섯 가지이다.
증(增)과 유대(有對)와 무명과
처중(處中)과 명(明)의 갱락이다.
성도(聖道)에는 모두 두 가지가 있어
능히 흥기하여 과(果)를 이룬다.
의식과 상응하는 갱락은, 이를 증갱락(增更樂)이라고 한다. 5식(識)이 서로 호응하는 갱락은, 이를 유대갱락(有對更樂)이라고 일컫는다. 더러움의 갱락은, 이를 무명갱락(無明更樂)이라고 한다. 무루의 갱락은, 이를 명갱락(明更樂)이라고 한다. 유루의 더럽지 않은 갱락은, 이를 비명비무명갱락(非明非無明更樂)이라고 한다.
[문] 어떠한 도가 과를 얻는가? 무애도인가? 해탈도인가?
[답] 성도에는 모두 두 가지가 있어 능히 흥기하여 과를 이룬다. 두 가지 도는 함께 과를 얻으니, 하나는 결박을 풀고, 둘은 해탈을 얻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도가 과를 이룬다.
[문] 무착은 어떠한 마음에 머물러 반열반하는가?
[답] 무착심 가운데서 무위열반을 얻는다. 무착은 일체의 일에서 만드는 것이 없고 하는 것이 없으며 머무름을 구하는 것이 없으니, 보심(報心)을 따라서 그 가운데서 반열반한다.
[문] 몇 가지 유(有)가 있는가?
[답] 생유(生有)와 사유(死有)와
근본유와 중유[中]이다.
‘생유’란 처음 생할 때의 음(陰)이니, 이것을 생유라고 한다.
‘사유’란 죽을 때의 음이니, 이것을 사유라고 한다.
‘근본유(根本有)’란 생유와 사유를 제외한 그 중간의 음이니, 이것을 근본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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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유(中有)30)’란 유에 이르는 바의 음이니, 이것을 중유라고 이른다.
[문] 싫어함이 있고, 욕을 여읨이 있다고 말하는데, 무엇이 싫어함이고, 무엇이 욕을 떠나는 것인가?
[답] 모든 지혜로서 고와 인에 있는 것과
이것의 인(忍)은 싫어함을 닦는다.
욕을 멸하고 무욕을 얻는 것은
널리 네 가지 중에 있다고 말한다.
‘모든 지혜로서 고와 인에 있는 것과 이것의 인은 싫어함을 닦는다’고 했는데, 지(智)와 인(忍)으로서 고ㆍ습을 연하는 것을 싫어함이라고 하니, 싫어하는 곳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욕을 멸하고 무욕을 얻는 것은 널리 네 가지 중에 있다고 말한다’고 함은 4제(諦) 중의 지와 인을 욕을 여의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능히 욕탐을 끊기 때문이다.
10. 논품
위의(威儀)와 위의가 아닌 것을
만약 여의었어도 다시 획득한다면
이 때문에 승(勝)에 이르지 못함이 [있는가?]
능히 결정될 수 있다면 답하라.
[답] 있다. 무색에 따라 색을 일으킨다.
성과(聖果)를 얻을 때
30) 범어로는 antarā-bhava. ‘중간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140 / 142] 쪽
일체의 모든 악을 떠나
유위의 정선법(淨善法)을
얻고 나서는 닦지 않음이 있는가?
[답] 있다. 물러날 때에 과거를 얻는다.
도가 흥기할 때에
아직 모든 악을 멀리 여의지 못했다면
해탈할 때에는 악을 여의는 일이 [있는가?]
이미 결정된 것이 있으면 대답해 주기 바란다.
[답] 있다. 말하자면 미래의 닦음[修]31)이다.
광요(光曜)의 번뇌는
정해진 때에 흥기하고
청정한 초선 가운데에서
떨어지고 쇠퇴함을 획득하는 일이 [있는가?]
[답] 있다. 무착과의 수행과 훈수(勳修)이다.
견제도 중에서
모든 선한 법을 얻는 데에 이르면
이 법은 역시 연이 있어도
성자는 그 연을 보지 않는 일이 [있는가?]
[답] 있다. 욕계 중에서 수행하는 등지이다.
31) 이본에 의거해 원문의 원(願)을 수(修)로 고쳐 읽는다.
[141 / 142] 쪽
혜의 유루과로서
깨끗한 공덕을 멀리 떠나고
마음에 따라 떠나지 않으면서
이 역시 그것의 과(果)인 것이 [있는가?]
[답] 있다. 욕계의 변화하는 마음이다.
무애도에 머물러
모든 멸을 성취하고
모든 번뇌의 그것에 따르는
무루견과 같은 것에는 아닌 것이 있는가?
[답] 있다. 모든 도를 수학할 때이다.
묶이고 해탈하지 못함을
때 묻지 않은 자는 획득하고
그래도 번뇌를 끊지 않는
이런 때 묻지 않고 다하는 일이 있는가?
[답] 있다. 광요(光曜)로부터 범천에 생할 때이다.
무루의 깨끗한 지(地)를
미증득(未曾得)으로 이미 얻는데
욕을 떠나지 않고 물러나는 것이 아닌
견도에 의하지 않음이 있는가?
[답] 있다. 색욕을 떠나 깨달음을 취할 때에 무루무색의 사유도를 얻는다.
아직 모든 법을 얻지 않고
아비담심론 > 아비담심론 제4권 > 10. 논품 > 142 - 142쪽
K.959 (28-355), T.1550 (28-809)
[142 / 142] 쪽
그래도 이 법을 체득한 채
그것을 버리지 않고 얻지 않는 일이 있는가?
만약 능히 아는 자는 답하라.
[답] 있다. 나머지 초무루심품이니, 범부의 일을 버리는 나머지 무루의 공덕을 얻으며, 나머지 일체는 얻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