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성근영/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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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의 유래 편집

여덟 개의 봉우리가 줄지어 서있는 팔봉산(해발361.5m)은 조선시대에 노지면, 영풍창면 ,문현면 3개면의 경계지점으로 어느 면에도 속하지 않아 특별한 기록이 없었다. 팔봉산을 기록한 최초의 서적은 호산록(1691년)으로 “군의 서쪽 해안에 있는데 여덟 봉우리가 산 위에 나열되어 있으므로 팔봉산이라고 한다.…”가 최초의 기록이다. 현재 팔봉면이란 지명은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개편때 주변지역을 통폐합하면서 팔봉산(八峰山)의 '팔봉(八峰)'에서 명칭을 따 지금의 팔봉면이 되었다.[3]


행정구역 편집

고파도리 편집

고파도리는 면적이 1.01㎢의 작은 섬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작은섬에 2개의 군이 있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서산군 문현면 고파도리와 태안군 북일도면 고파도리로 나뉘어 있다. 나뉘어있던 두 동리가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나로 합쳐져 태안군 북일면 고파도리로 되었다. 199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태안군에서 서산군 팔봉면 고파도리로 되면서 현재까지 서산시 소속이다.[4] 고파도란 지명의 유래는 고려 때 군사 파지도영(波知島營)이 있던 섬으로[5]파지도라고 불리다가 파지도영이 조선 태종 때 팔봉면 호리로 수영을 옮기면서 옛파지도섬 또는 고파지도로 불른 데서 유래해 지금의 고파도(古波島)가 되었다.[6]

금학리 편집

금학리는 조선시대에 노지면 금곡리(金谷里)와 마전리(麻田里)의 2개리가 있었으나, 1895년(고종32)행정구역 개편으로 노지면에서 영풍창면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이전의 마전리에서 추학리(秋鶴里)가 분활되고, 또 다른 리였던 금곡리에서 소길리(小吉里)로 분활되어 총 4개 마을이 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인근의 여러 리(里)를 합쳐 하나의 동리로 통합하였는데 영풍창면의 마전리, 추학리, 금곡리, 소길리 그리고 문현면의 우길리를 합쳐서 한 동리로 만들었다. 금학리란 이름은 금곡리(金谷里)의 '금(金)'자를 취하고 추학리(秋鶴里)에서 '학(鶴)'자를 취해서 금학리(金鶴里)로 정해 현재의 금학리가 되었다. 금학리의 자연환경은 논보다 밭이 많고 비옥하여 일찍부터 삼과 약초의 재배가 발달하였다. 또, 금학리는 서산지방에서 천주교가 일찍 전파되어 교세가 확장 된 곳으로 유명하다. 1914년 서산지구 초대신부로 부임한 안학만 신부가 금학리 118번지에 서산본당교회를 최초로 세웠다.최초로 세워진 서산본당교회의 자리에는 지금도 공소가 세워져 있고 성모동산이라는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7]

양길리 편집

양길리는 조선시대에 문현면 방길리(方吉里)와 항점리(缸店里)의 2개리로 되어 있다가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 때 2개 리에서 문현면 사양동(斜陽洞), 오류동(五柳洞), 방길리(方吉里), 우길리(牛吉里) 4개리로 나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인근의 여러 리(里)를 합쳐 하나의 동리로 통합하였는데 사양동, 오류동과 방길리, 울리의 각 일부씩을 합하여 한 동리를 만들었다. 합쳐진 지역의 명칭은 현재의 양길리인데, 명칭은 사양동(斜陽洞)의 '양(陽)'자를 취하고 방길리(方吉里)와 우길리(牛吉里)에서 '길(吉)'자를 취하였다. 양길리는 뱅길리란 이름으로도 유명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양길리의 옛지명인 방길리의 방언인 뱅길이라는 이름으로 5일장이 서던 곳으로 팔봉지방을 비롯한 지곡면, 성연면 지방에서도 이 장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5일장을 비롯해 1927년 팔봉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세워지면서 면소재지가 아님에도 면내 중심기능을 계속 맡아왔다. [8]

대황리 편집

대황리는 조선시대에 문현면 대동리(大洞里)와 지파동리(地把洞里)의 2개리로 되어 있다가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 때 대동리는 그대로 유지되고, 지파동리가 황곡리(黃谷里)로 바뀌어 대동리와 황곡리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동리와 황곡리 두 동리를 합치고 방길리(현재의 양길리)의 일부를 합하여 한 동리를 만들면서 지금의 대황리가 되었다. 명칭은 대동리(大洞里)의 '대(大)'자를 취하고 황곡리(黃谷里)에서 '황(黃)'자를 취해 현재의 대황리(大黃里)가 되었다. 1895년부터 1914년까지는 독립된 행정 동리였던 황골(黃谷)은 이제 자연마을 이름으로만 남았지만 한때는 대황리 보다도 유명했다. 황골이라 불린 유래는 이 마을이 서산지방 중에서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 지대로 으름과 머루, 다래덩굴과 온갖 관목류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어 가을이 되면 붉게 단풍이 들어 절경을 이루었다하여 황골(黃谷)이라 한 것으로 추정된다. [9]

흑석리 편집

흑석리는 조선시대에 문현면 흑석리와 잉복리(仍卜里) 2개리로 되어있었다.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 때 흑석리는 그대로 유지되고, 잉복리는 잉복리와 월곡리(月谷里)로 2개 마을로 분할되어 문현면 흑석리, 잉복리, 월곡리 총 3개의 리로 분할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흑석리, 월곡리 와 잉복리의 일부를 합해서 현재의 흑석리 지역이 되었다. 흑석(黑石)리는 이름에서 유래를 추측할 수 있듯이 1911년 간행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 거믄돌[黑石里] 등 관련 명칭이 확인되는데, 흑석2리 1반의 들 가운데에 볏섬만큼이나 큰 검은돌이 있었다고 전해져 생긴 지명이다. 과거에 논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큰 검은돌을 없애 현재는 존재하지 않아 문헌과 구전으로만 전해진다. 흑석리는 가로림만의 동남쪽에 위치해 풍부한 어족이 서식할 수 있는 자연조건으로 1945년 광복직후까지만 하여도 마을 앞 바다에서 뱅어, 곤쟁이가 잡히는 등 바다고기가 풍부했던 곳이다. [10]

호리 편집

호리는 조선시대에 문현면 호두리(虎頭里)였다.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 때 호두리는 내(內)호두리와 외(外)호두리 2개로 나뉘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이 두 개 리가 합쳐지면서 현재의 호리가 되었다. 호두리나 호리는 모두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으로 호리1리 1반지역의 지형이 흡사 입을 크게 벌린 호랑이 머리같다 하여 호두(虎頭)라는 이름을 얻었고 마을이름도 이에 유래되었다. 그래서 호리라는 이름은 호랑이 머리를 뜻하는 범머리 라는 뜻의 '버머리' 또는 '부머리'라 불렸다. 같은 호리지만 예전부터 호3리만 따로 구도(舊島)라 불려왔다. 구도(舊島)란 이름은 조선중기(1600년대)까지 호3리에 파지도만호진(波知島萬戶鎭)이 있었는데대산읍 독곶리 황금산으로 파지도를 옮기면서 구파도영(舊波島營)이라 불리었고, 줄여서 구도(舊島)라고 불렀다. 구도는 1930년대부터 구도와 인천 간에 정기여객선이 운행되어 서산, 태안이 외부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드리는 항구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는 운행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곳이 면소재지도 아니고 타 지역과 연결되는 중요노선의 교차지점이 아니었음에도 호리는 3면이 바다로 되어있고 가로림만이 남에서 북편으로 길게 뻗은 반쪽짜리 섬모양으로 주변에는 어족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1]

덕송리 편집

덕송리는 조선시대에 문현면 덕동리(德洞里)였다. 1895년(고종32)행정구역 개편 때 문현면 덕동리가 덕동리, 상송리(上松里), 하송리(下松里) 3개로 나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덕동리, 상송리가 합해지면서 현재의 덕송리가 되었다. 덕송리(德松里)란 명칭은 덕동리(德洞里)의 '덕(德)‘자를 취하고 상송리(上松里)의 '상(松)'자를 취하였다. [12]

어송리 편집

어송리는 원래 서산군 영풍창면 어송리였으나,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어은동, 송티리, 정자동을 합병하여 어송리라 하고, 영풍창면에서 팔봉면으로 편입하여 지금의 팔봉면 어송리가 되었다. 어송리는 어은동(漁隱洞)의 '어(漁)'자와 송티리(松峙里)의 '송(松)'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어송리의 송(松)의 이름만 봐도 알 듯이 이 지역은 팔봉산 기슭 지역으로 주변에 울창한 소나무가 많다. [13]

진장리 편집

진장리는 조선시대에는 서산군 영풍창면의 고성리, 장북리 및 태안군 동이도면의 굴포리, 역리 등 여러 지역에 걸쳐진 지역이었다. 1895년(고종32)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진산리가 추가되어, 영풍창면 진산리, 고성리, 장북리로 바뀌었고 태안군 동이도면이 동이면으로, 굴포리는 고굴리로 바뀌고 역리는 그대로 역리였다.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2개 군, 2개 면의 소속이었던 여러 마을들이 하나의 마을로 합쳐 진장리가 된 것으로 합쳐진 구역은 서산군 영풍창면의 진산리, 고성리, 장북리를 합치고 그 외에 태안군 동이면의 역리와 고굴리의 각 일부를 합하여 현재의 진장리가 되었다. 진장리榛墻里)란 명칭은 서산군 영풍창면 진산리(榛山里)의 '진(榛)'자와 장북리(墻北里)의 '장(墻)'자를 취한 것 이다. 진장리의 '진(榛)‘은 이 마을 중심부에는 해방 20m도 안되는 작은 봉우리로 된 산이 있었는데 이 산에 온통 개암나무(榛木)로 덮여 있었다고 해서 진산리(榛山里)에서 연유되었다. 현재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어 산의 형체는 없어졌다. [14]


문화유산 편집

선사유적 편집

진장리 마제석부 출토지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진장1리 진산
  • 시 대: 청동기

팔봉면 소재지에서 60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3.8km정도 가면 태안군과 서산시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km가면 도로의 동쪽으로 진장리 1구 진산마을이 있다. 마제석부 출토지는 진장리 1구 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0.7km 들어간 곳의 '다슬고개'아래쪽의 산밑에 해당한다. 이곳의 지형은 '물레산'에서 서남주한 능선의 남향사면 하단부에 해당하는데, 마을주민김선욱씨의 전언에 의히면 십 수년 전에 이 지역에서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토광을 파는 도중에 석부 1점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마제석부 출토지 전방으로 넓게 개간된 경작지가 있으며, 주변에는 표고 30m 내외의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다.

호리 패총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호리
  • 시 대: 청동기

팔봉면 소재지의 호리 방면으로 605번 도로를 따라 약 7km정도 가면 폐교된 팔봉초등학교 호리분교의 뒤편으로 난 농로가 나오는데 패총은 이농로를 따라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한다. 패총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에서 약 10m 정도 언덕 위에 해안 절벽을 따라 40m 정도로 길게 이루어져 있으며 단면을 볼 때 1m이상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오랜 기간 퇴적으로 인해 푸오하가 심화된 상태이고 대체로 굴껍질로 이루어져 있다. 퇴적상태를 살펴보면 퇴적층의 하단부는 오랜 기간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나 상층부는조선시대의 토기편과 자기편도 섞여있고 최근에 민가에서 버려진 패엽층도 보인다. 유물은 수습되지 않으나 선사시대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형성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불교유적 편집

진장1리 사지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진장1리 진산
  • 시 대: 조선후기

팔봉면 소재지에서 60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3.8km 정도 가면 태안군과 서산시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32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km 가면 도로의 동쪽으로 진장1리 진산마을이 있다. 사지는 진장1리마을회관에서 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산의 하단부에 위차한다. 현재 사지 전방부로는 넓은 대지를 평탄하게 정지하고 '경주최씨 집단묘지'가 들어서 있는데, 사지는 이 산에 있는 '장군바위' 동쪽의 평탄지대에 남서향하여 위치한다. 사지는 약 100여 평의 면적에걸쳐서 평탄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주변에 자역석재가 축대처럼 돌려져 있다. 사지의 바로 위쪽으로는 암벽이 병충처럼 둘러져 있으며, 전방으로는 진장리와 태안군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을 갖추고 있다. 사지 내부에 초석재로 보이는 석재가 노출되어 있으나, 일부가 흙속에 묻혀있어 그 재질을 알 수 없다. 전언에 의하면사지내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매매몰되어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사지내에는 소나무와 신우대가 자라고 있으며, 주변에는 소량의 와편이 수습된다. 수습된 와편은 산해파문과 무문의 회청색경질와편이다.

정자동 사지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어송2리 정자동
  • 시 대: 고려말~조선후기

팔봉면 소재지에서 60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3.8km 정도 가면 태안군과 서산시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곳에서 북동쪽으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 2km 정도 가면 어송리 2구 정자동마을이 있다. 사지는 정자동 마을의 가장 안쪽으로 '산이고개'를 넘어가기 전에 있는데, 지형적으로 정자동의 북쪽 팔봉산에서 남주한 능선의 최하단부 남향사면에 위치한다. 사지로 전하는 지역은 약 1,000여 평의 넓은 평탄지대로 현재 '충주지씨'의 묘가 위치한다. 사지 후방으로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전방으로는 민가 1동이 축조되어 있다. 사찰건출과 관련되 시설물로는 묘소 전방에서 초석으로 보이는 사찰의 기단석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장방형으로 가공한 화깅석재이다. 전체적으로는 지형변경이 이루어진 상태이나 비교적 사찰의 하단부 시설물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전된다. 사지와 관련된 유물로는 많은 양의 와편과 백자편이 있다. 와편은 회청색 결질의 어골문, 접선문, 산해파문이 시문되어 있다. 백자는 태토비짐눈 받침을 하갸 포개구운 것으로 내저원각이 넓게 패이고, 비교적 정선된 제작기법을 보이고 있다.

호리사지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호리

호리사지는 폐교한 팔봉초등학교 호리분교에 못미쳐 남서향으로흘러내리는구릉의 동남향 사면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사지는 현재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데 면적은 약 300여 평에 이르며 평탄면을 형성하고 있다. 사지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밭의 전면에는 우물이 남아 있으며 우물에는 탑재석으로 보이는 다듬어진 대판석이 놓여있다.

신대 사지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진장3리 신대

사지는 진장리 3구 신대마을 동쪽에 있는 '물레산'에서 서주한 능선의 하단부에 위치하는데, 이곳의 지명은 '배아미골'로 예전의 산제당이 있던 자리에 해당한다.

유교유적 편집

안만흥(安萬興) 정려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덕송2리
  • 시 대: 1574년(선조 17), 1860년(철종 11) 중수

팔봉면 덕송리 팔봉초등학교에서 북서쪽으로 약 3km 정도 가면 덕송리 2구 대봉마을에 이르는데 정려는 도로 좌측의 북향사면 하단에 위치한다. 이 정려는 안만흥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574년(선조 17)에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효자 안만흥은 팔봉면 덕송리에서 안향의 14세손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순흥이다. 그는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되자 걱정과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던 중 죽순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몽설한이라 눈이 쌓인 겨울에 죽순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념하지 않고 대밭에 가서 항아리를 엎어놓고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를 한 다음 다시 다음날 그곳에 가서 항아리를 열어놓고 보니 그자리에 죽순이 가득히 나와 있었다. 이를 가지고 아버지께 대접하니 즉시 완쾌되었다 한다. 또한 5년 뒤에 아버지가 병을 얻어 잉어를 먹고싶다 하였다. 마침 겨울이라 잉어를 구할 길이 없어 강가 얼음 위에 가서 한탄하며 통곡하였더니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며 밖으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잉어를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께 대접하니 역시 병환이 완쾌하였다. 이러한 효성으로 마을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낸 큰 효자라 크게 칭찬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584년 효자의 명정과 함꼐 '승정원 좌승지 겸 참찬관'에 추증되었다, 이 효자 정려는 1860년(철종 11)에 안만흥의 5대손인 안양묵에 의해 중수가 이루어졌으며 현재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잇다. 정면은 홍살로 처리하였고 나머지 삼면은 다듬은 돌로 벽을 쌓았다. 정려 내부는 孝子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知義禁府事五衛都(효자 증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관증가선대부호조참관겸지의금부사오위도)總府副總管司僕寺正安萬興之門-宣廟萬曆甲申命旌 崇禎紀元後四庚申三月日(총부부총관사복사정안만흥지문-선묘만력갑신명정 숭정기원후사경신삼월일)五代孫陽默重建(오대손양묵중건)이라고 적혀 있다.

; 기응세(奇應世)정려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덕송1리
  • 시 대: 1585년(선조 18), 1819년(순조 19) 중건

팔봉면 덕송리 팔봉초등학교에서 북서족으로 약 2km 정도가면 덕송1리에 이르는데 도로 좌측의 남향사면 하단부에 정려가 위치한다. 이 정려는 기응세(1539~158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585년(선조18)에 명정을 받아 건립된 것이다. 원래 기응세의 명정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은 그의 아들인 기자헌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쓰이던 곳이었다고 한다. 기자헌의 영정은 현재 중앙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건무의 정려 좌측에 기응세의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기응세는 본관을 행주(幸州)로 자는 경우(景遇)이다. 기묘 명신 기준의 손자이고 한성판윤을 지낸 기대항의 장자이며 부인인선산신씨는 임백령의 딸이다. 그는 보성공신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덕창부원에 봉해졌으며 효생으로 정려를 명정받았다. 한편 행주기씨는 이 당시 경기도 고양에서 세거하고 있었다. 기응세의 아들인 기자헌이 150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1614년 우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 이귀 등이 모의에 가담을 요청했으니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하여 거절하였으며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니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 부처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하여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 그 일로 일족도 몰살당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행주기씨들은 이 때 난을 피하여 서산으로 은거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서산 팔봉면으로 처음 입거한 인물은 기응세의 손자인 기민격이다. 그의 묘소는 해미 탄동에 있으며 행주기싸들이 서산에 정착하면서 기응세의 정려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이 정려는 1819년(순조 19) 6대손인 기성에 의하여 한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 졌으며 명정현판에는 孝子 增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義政兼領弘文館藝文館知春秋館觀象監事世子(효자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지춘추관관상감사세자)師德昌府院君行兼節校尉龍讓 衛副司果奇應世之門-宣廟朝萬曆乙酉始禎後四(사덕창부원군행겸절교위용양 위부사과기응세지문-선묘조만력을유시정 숭정후사)己卯六代孫重建(기묘육대손성중건)이라 각서되어 있다.

기타유적 편집

금학리 고분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 시 대: 백제시대 추정
  • 수 량: 10여기

팔봉면 어송리에서 금학리 방향으로 2.5km쯤 가면 산이고개를넘으면서 좌측으로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고분은 저수지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능선의 남향사면 중하단부에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산 상단부의 급한 경사면이 아래로 이어지다가 하단부에서 비교적 완만하고 평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지표면상에 확인되는 고분은 4~5기인데, 주로 산의 남향사면의 중하단부 경사가 완만한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고분의 유구는 주로 개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거나개석이 제거되어 함몰된 형태로 확인된다. 파괴도니 고분의 내부에는 토사가 밀려들어 형태를 확인할 수 없으나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양벽을 할석 계통의 석재를 이용하여 구축하고 대판석으로 뚜껑을 덮었다고 한다. 이능선의 남향쪽으로는 곳곳에서 고분의 흔적이 보이고 있어많은 수의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생각되며 전체적인 현황으로볼 때 백제시대의 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나 출토되는 유물이나정확안 유구내용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정자동 고분군1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어송2리 정자동
  • 시 대: 고려시대 추청

팔봉면 소재지에서 604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3.8km 정도 가면 태안군과 서산시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고분군은 어송2리정자동과 대문다리마을이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하는데, 소로의 동남쪽에 형성된 '띠앗골' 능선사면에 해당한다. 즉 이 마을은 주민 김재민씨 민가 뒤쪽의 골짜기 사이에 형성된 능선의 서향사면 중앙부에 위치한다. 고군내에서 현재 2기의 고분이 노출되어 확인되는데, 고분은 능선 중앙에약 6m 정도의 간격을두고 능선방향을 따라서 동서장축으로 조성되어 있다. 확인된 2기의 고분은 최근에 도굴된 것으로 1기는 대판석재를 이용한 개석이 노출되어 있다. 이 고분은 양옆의 도굴굉의 흔적으로 보아 250cm 내외의 크기로 추정된다. 확인되는 또다른 고분은 개석이 모두 유실된 상태로 도굴과정에서 파헤친 흙 사이로 석축된 고분의 남벽이 노출되어 있다. 고분은 자연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앞쪽의 고분과 유사한 크기로 판단된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고분은 1995년경에 도굴되었는데, 고분 내부에서 관장식이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이 정자동 골짜기 일대는 고분이 밀집디어 있는 것으로 전하는 지역인데, 상당히 심하게 도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확인된 2기의 고분 외에 노출된 고분은 없으나 지형조건으로 보아 주변 능선에수기의 고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정자동 고분군2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어송2리 정자동
  • 시 대: 미상

팔봉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3.8km 정도 가면 태안군과 서산시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북동쪽으로 개설된 소로를 따라 2km 정도 가면 어송리2구 정자동마을이 있는데, 고분군은 이 마을에서 금학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산이고개의 남서향사면 중하단부에 위치한다. 고분군의 존재가 전해지는 이 지역의 넓은 면적이 목장지로 개간되어 현재 '경일목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능선을 가로질러 금학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 지역에 대판석재를 덮어서 축조한 석축묘가 수기 있었는데, 도굴과 목장지의 개간과정에서 석재를 파내어 그 존재를 전혀 확인 할 수 없다고 한다. 지표답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유구는 없으며 지표면에서 확인되는 석재도 고분과 관련된 석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민의 전언과 주변 지역의 지형적조건으로 미루어 고분군이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창포 고분군
  • 소재지: 서산시 팔봉면 어송3리 창포
  • 시 대: 고려시대 추정

팔봉면 소재지에서 605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2.8km 정도 가면 어송3리 창포마을이 있는데, 고분군은 이 마을의 북쪽에 있는 팔봉산에서 남주한 능선의 남향사면 하단부에 위치한다. 지도상의 지명으로는 '마르들'이라는 명칭이 있는데 현지에서 이곳을 창포라고 부르고 있다. 고분군이 확인되는 지역은 이 마을 안쪽의 문기성씨 집 동쪽 능선상에 있다. 확인된 고분군에서는 고분석재로 보이는 대판석재가 곳곳에 노출되어 있는데, 정형을 갖추고 노출되어 있는 고분은 1기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1기의 고분은 능선 중앙에 능선방향을 따라 남북장축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고분의 남쪽 전방으로는 2기의 민묘가 개장되어 있다. 고분은 도굴로 인하여 파손되었고, 개석재로 보이는 대판석재가 주변에 산포되어 있는 상태이다. 고분은 50~70cm 내외 크기의 대판석재 어러 매로 동서장벽을 세우고 남북단벽은 1매의 석재로 축조하였다. 개석은 135cm 정도 크기의 대판석재를 여러 매 덮었는데, 현재는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이다. 외견되는 상황으로 계측할 수 있는 고분의 크기는 남북 325cm, 동서단벽 95cm이다. 깊이는 고분안에 토사와 낙엽의 매몰로 인항 계측할 수 없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이 일대에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고분 주위의 개장된 민묘주변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회청색토기편을 수습하였다. 고분의 축조형태로 보아 정자동 고분군과 같은 고려시대 고분군이 밀집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고파도성
  • 호리성
  • 서산 금학리 고분군
  • 금학리 백자요지
  • 대문다리 백자요지
  • 곧우실 백자요지
  • 방죽골 토기요지
  • 양길리 와요지
  • 창개창터
  • 굴포운하

전설 편집

팔봉산과 비를 내리게 한 고경명 현감 편집

팔봉면의 중앙에 있는 팔봉산은 기암절벽이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이 산에는 정기가 있다하여 한반도 역사 상 숭배 대상이 되어왔다. 전설에 의하면 임오년에 한해가 극심하자 이곳 현감인 고경명이 목욕을 한 뒤 팔봉산에서 비를 내리게 해 달라고 정성것 여러날을 단식하며 기우제를 올리자, 마침내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큰비가 내렸다. 이 때 관원들이 현감에게 우비를 주니 현감은 "비로인하여 모든 곡물이 다시 살아나게 되고 모든 백성들의 수심이 사라졌는데 어찌 우비를입겠느냐."고 말하여 백성들을 감동케 하였다고 한다. 이 기우제를 지냈던 곳을 '천제터'라 하였으며 운암사터 위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방향은 남향으로 마치 상을 펼쳐 놓은 듯 이루어져 있다. 이후부터 극심한 가뭄이 있으면 군수나 현감이 목욕재계하고 이 산에 올라 정성껏 기원하면 산신령이 감동하여 비를 내려 주었다고 전해진다.

장군대지와 용마 편집

금곡과 최부자 편집

지정절터와 방석바위 편집

비연대와 독수리(어송1리) 편집

범머리의 스므녀 편집

운암사와 경수암 편집

동박삭이 전하는 지영대사의 설화 편집

여기정(어송리) 편집

천년의 고목 느티나무에 얽힌 전설 편집

출신 인물 편집

  • 기자헌(1562년~1624년)



팔봉산 팔봉산(八峰山)은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와 양길리에 걸쳐 있는 이다. 팔봉산 명칭의 유래는 여덟 개의 산봉우리가 줄지어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팔봉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8봉 중 3봉이며 높이가 362m이다. 팔봉산의 전설에 의하면 봉우리가 9개인데, 제일 작아 봉을 제외하여 이름이 팔봉산이 되었다하여 가장 작은 봉우리가 자기를 넣지 않았다하여 매년 12월 말이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7]

  1. 팔봉면지(八峰面誌),
  2. 이은우, 『서산의 지명사』(서산시, 2008), 『한국지명총람』,1974년
  3. 팔봉면지(八峰面誌), 제3장 지명의 연원과 연혁,115쪽
  4.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69쪽
  5.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6. 『세조실록(世祖實錄)』
  7.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28쪽
  8.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39쪽
  9.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50쪽
  10.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59쪽
  11.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73쪽
  12.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83쪽
  13.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192쪽
  14. 팔봉면지(八峰面誌), 제4장 마을, 202쪽
  15. 서산시 조례 제130호.
  16. 서산시 조례 제426호.
  1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98013&cid=42856&categoryId=42856 네이버 캐스트 : 여행 - 팔봉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