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양재온천/잠실

잠실은 대한민국 서울시 송파구잠실본동,잠실1동-잠실7동,삼전동일부,석촌동일부 지역을 통틀어 지칭하는 지역명칭이다. 단순히 잠실동,잠실역,잠실대교가 있는 지역을 지칭하지 않는다.

잠실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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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실(蠶室)이란 누에를 기르는 지역이란 뜻이다.

명주를 만들어내는 누에는 하늘이 내린 벌레라고 해서 천충(天蟲)이라고도 불리며 매우 신성시됐다.

  • 조선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양잠업을 육성하기

위해 왕이 잠실을 세우고 이를 직접 관장했다. 각 지역에 설치된 잠실마다 실을 뽑아서 승정원에 바쳤고, 정교함과 수량에 따라 상을 주거나 벌을 줬다. 서울에도 세 개의 잠실이 있었다. 서대문구 연희동 쪽에 있는 곳을 ‘서잠실’, 광진구 자양동(잠실섬)을 ‘동잠실’로 불렀다. 나중에 설치된 서초구 잠원동은 신잠실로 불렸다. 이 곳의 지명이 잠실이 된 것도 여기에 뿌리가 있다.

  • 잠실섬에서는 세종 때부터 왕이 직접 관장해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으며, 이로 인해 옛 지도에는 잠실섬을 상림(桑林)이라고 표시했다. 누에치는 사람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에 궁궐의 환관이 감독관으로 파견됐다. 양잠업이 쇠퇴한 건 조선 말기쯤으로 추정된다. 대신 뽕나무 묘목이 주요 수입원이 됐다.


행정구역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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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양주면에 속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함에 따라 이 지역은 경기도 고양 군 뚝도면에 편입되어 잠실리가 되었다. 광복후 1949년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 가 확장됨에 따라 고양군 뚝도면 전부가 서울시에 편입됨으로써, 이 지역은 성동구에 속하게 되어 잠실동이 되었다. 이후 한강개발사업에 의해 1971년 잠실동은 신천동과 함께 한강이남 지 역에 연육(連陸)되었고, 강남지역의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라 1975년 대통령령 제7816호에 의 해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됨으로써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곧 이어 1979년 대통령령 제9630호로 강동구가 신설되자 다시 이에 속하게 되었고, 1988년 대통령령 제12367호에 의해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 신설됨으로써 이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주민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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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리섬 부렴마을에 살았던 김창국(65)씨는

“할아버지 대에도 이곳에서 누에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고 한다”며 “대신 부렴마을 사람들이 많게는 수천평에서 적게는 수백평까지의 땅에 뽕나무 묘목을 길러 팔았다”고 말했다. 정작 잠실섬에 있는 새내마을과 잠실마을 사람들이 뽕나무를 재배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여름의 오이·참외 농사와 가을의 땅콩·배추·무 농사가 이들의 주수입원이었다.

  • 젊은 시절을 잠실섬에서 보내고, 아직까지

콘크리트로 뒤덮인 ‘신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상재(62)씨는 공동체의 터전을 흔적도 없이 쓸어 간 ‘개발시대’를 원망했다.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처럼 한강을 되돌릴 수 있을까? 허 참! 돈 벌려고 멀쩡한 아파트를 부수고 재건축하는 마당인데. 그래도 그 시절 한강의 금모래밭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면 우리도 좋고 서울 시민들도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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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례신문 200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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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짜증나는 군요. 한겨례신문이 제가 작성한 위키백과 문서를 가져다 박스로 넣었고,

저는 내용을 다시 업그레이드 했더니 다른 편집자는 제가 한겨례의 것을 가져왔다고 하는 군요. 어이없는 일입니다. 한겨례쪽에 소송걸 일입니다.

  • 잠실3동 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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