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82 박성빈/연습장

유격훈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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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레인저의 모습

유격이란 한마디로 비정규전을 말하는데, 장거리 정찰이나 적 후방에서 교란작전 등을 수행하는 것이 통상 유격전의 의미이다. 미국의 독립전쟁 때, 미군의 레인저(ranger)는 영국군 후방에서 히트 앤 런 작전을 펼치거나 장거리 강행정찰 등을 수행했다. 이들은 유능한 사냥꾼으로 구성되었는데, 넓은 지역(range)에서 활동한다는 의미로 레인저라는 명칭이 붙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과거 레인저 부대원들의 작전 수행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훈련 방식을 채택했고, 이것이 유격훈련의 시작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 국군이 창설되면서 미국의 훈련방식을 도입해 유격훈련이 실시되었다.

유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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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은 과학의 발달과 치명적인 무기효과, 첨단화된 전력을 배치하여 적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의 전쟁 양상은 대규모 재래식 전력을 이용한 전쟁에서 테러 및 유격전 위주의 전쟁 형태로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물리적으로 군사력이 우세한 쪽이 결국 전쟁에서 이겼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강대국에 의한 무차별 포격이나 폭격, 대량살상과 같은 만행은 더 이상 국제적, 정치적으로 용납되지 않고 있으며, 냉전이 끝난 후 21세기 들어 정규전 형태의 전쟁 발생은 줄어들고 유격전 양상의 전쟁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유격전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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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모택동의 게릴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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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모택동의 게릴라 부대

모택동의 게릴라전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태동했다. 즉, 1921년 중국 공산당이 조직되었고, 농민계급을 중심으로 봉건적 지주계급을 타도하기 위한 농촌혁명이 전개되었다. 초기의 활동은 주로 테러와 같은 강제행위가 이루어졌는데 농민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를 이용해 게릴라들이 기동력과 기습을 활용, 접전을 회피하고 치고 빠지는 식의 공격으로 지방 병력들과 투쟁하였다. 모택동의 홍군은 분대, 소대 등 소규모 부대로부터 연대급에 이르는 큰 부대까지 조직적으로 편제되었고, 지휘체계가 명확히 갖춰진 상태였다. 모택동은 3단계 전쟁을 강조했는데, 1단계는 근거지를 구축, 강화 및 조직에 전념하면서훈련과 사상교육을 하며 지역주민들을 설득하여 우군화하는 것이다. 2단계는 활동을 통해 사보타지(태업)와 테러 활동, 취약점에 대한 매복 기습 등을 실행함으로써 무기 탈취와 보급품을 획득하는 것이다. 3단계는 게릴라 활동을 종속적인 역할로 두고 정규 군사활동에 의해 적을 궤멸시키는 것이다. 전술적 운용 측면에서 모택동은 기습과 기만, 치고 빠지기 식의 전술을 강조하였다. 그는 전술을 설명하면서 “게릴라전에 있어서, 동에서 일어나는 척하면서 서로부터 공격하라. 강한곳을 피하고 허점을 공격하라. 기습하라. 후퇴하라. 가벼운 타격을 가하고 가벼운 승리를 얻으라. 게릴라부대가 보다 강한 적을 만났을 때 적이 전진하면 후퇴하고 적이 멈추어 진을 치면 교란시킨다.”라고 강조하였다. 즉, 열세한 소부대가 우세한 적 부대에 대응하면서 최대한 유리한 조건 하에서 주도권을 갖고 작전을 수행하는 형태이다. 또한, 정적인 작전을 지양하고 동적이고 기동을 강조하며, 수세적이기보다는 공세적 활동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대독 게릴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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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게릴라 부대

1941년 6월, 독일군은 소련을 공격했다. 독소전역 초기 독일의 진격은 순조로워 보였다. 7월 초 소련의 스탈린은 방송을 통해 “적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는 기병이든 보병이든간에 게릴라부대를 조직해야만 한다. 적과 전투를 하고, 모든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다리와 도로를 파괴하고, 전화와 통신선을 손상시키며, 숲과 창고 및 수송수단을 불태우기위해 적을 괴롭히는 부대들이 조직되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레닌과 공산당원들은 제정 러시아 정부에 항거하는 폭력투쟁부터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한 계급 대 계급 투쟁을 전개하면서 이러한 빨치산전투 형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매복 기습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 군부대의 대열과 집회, 자동차로 이동하는 보병, 군부대막사, 연료와 탄약의 수송수단, 공군기지 및 철도차량을 공격하였다. 또한, 독일군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통신선을 두절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부는 독일 본토에 들어가 전쟁물자 생산 공장을 파괴하여 타격을 주기도 했다. 붉은 군대가 공격하기 전에 빨치산 대원들은 독일군의 통신체계를 두절시키고 그들의 보급물자들을 파괴했으며, 그들의 전력을 다른 방향으로 분산시켰다. 즉, 정규군과 대등한 협력관계를 유지했고, 고도로 훈련된 부대이면서 조직화된 지휘체계를 유지한 가운데 대대와 연대규모까지 운용하였다.

쿠바 혁명군의 게릴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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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군의 게릴라전

쿠바에서의 게릴라전은 독재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발생하였으며, 그 대상은 정부군과의 투쟁이었다. 1956년 80여 명으로 시작한 게릴라전은 점점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 동조를 통해 세력이 확장되었고, 전국적인 무장조직으로 급격히 확산하였다. 그만큼 민중들의 불만이 컸다. 농촌지역에서 게릴라들은 농민의 협력을 얻어산속의 게릴라 기지를 확대하고 소대 단위의 정규군 부대를 편성해 훈련을 시켰다. 게릴라들은 소규모 단위로 정부군 초소를 습격하거나 군대 행렬이나 수송대를 기습하여 무기와 보급품, 포로를 얻음으로써 정부군을 분산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도록 하였다. 농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게릴라들은 정부군을 소규모로 분산시켜 각개격파하였고, 도시에서는 태업과 폭동, 대규모 시위, 테러와 요인암살, 시설 습격 등 도심에서의 게릴라전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결국, 게릴라부대는 더욱 세력화되고 대규모로 성장하여 정부군과의 도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1959년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였다.

베트남 전쟁 중 베트콩의 게릴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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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 게릴라 부대가 사용한 부비트랩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은 남베트남 정부군과 미군, 한국군 등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파병된 연합국을 대상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규모는 소규모 단위 활동으로부터 소대, 중대, 대대와 연대 규모 이상까지 다양하게 편성되어 운영되었다. 일정한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베트남 전쟁 초반 이후부터는 북베트남 호찌민의 지원과 지령 아래 움직였고, 상당수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하하여 라오스,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주둔하면서 호기가 조성되었을 때는대규모의 정규전을 감행하였다. 호찌민의 게릴라 전술은 중국 모택동의 유격전술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면 그의 전략 중에는 “동쪽에서 격렬한 전투가 진행될 때는 서쪽으로 공격하듯이, 적이 너무 강하면 일단 전투를 피하라. 자신의 본거지를 절대 포기하지 말되, 아주 격렬한 전투는 피하라. 되도록 위치를 발각되지 않게 숨기되 적이 움직일 때 공격하라. 아군이 강하고 적이 약할때 공격을 감행하라.” 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전술적으로도 주로 공격에 의한 공세행동을 강조하고, 소규모 부대가 대규모 세력과 싸워 적을 소진시키며, 지구전을 수행해 적을지치게 하는 것을 강조한다. 채명신 사령관은 베트콩의 게릴라전술에 대해 “베트콩 전술은 고무풍선과 같이 누르면 눌리고 손을 떼면 다시 일어나고, 어디서나 나타나는 반면, 찾아나서면 언제나 없어지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유리한 상황에서는 강력하게 공격을 하고 불리할때는 완전히 분산하여 사라지며, 주간에는 공격하지 않고 한밤중에 약한 곳을 치고 신속하게 달아난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