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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재(夢齋) 이원식 (李元式)
(본명 李元植)
작가 정보
출생1913년 2월 15일(1913-02-15)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읍 성내동 151번지
사망1978년 7월 9일( 1978-07-09) (66세)
직업의사한의사, 고고학자(서지학자), 저술가, 문화평론가, 노동운동가, 수학자, 에스페란토어학자

이원식(李元植, 1913년 2월 15일 ~ 1978년 7월 9일)은 몽재(夢齋) 이원식(李元式)은 민족주의 항일운동가로서 누구보다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고, 빈곤한 민중들을 계몽하고, 그들의 문화의식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해방전 일제시대 대구사범학교사회과학운동(R·S, 비밀결사조직), 문맹퇴치운동(한글보급운동), 노동운동, 민중계몽활동, 민족문화보존운동 등으로 일제경찰에 ‘갑종요시찰’로 지목되어 다섯 차례나 수감되어 고문으로 생사를 넘나 들어야 했으며, 해방공간에서는 건국활동, 노동운동, 의무노조 활동과 관련하여 다섯 차례 피검되어 죽음의 문턱에 갔으나 역시나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다. 6·25 전쟁시에는 예비검속 관계로 피신하고 있던 중에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을 대신하여 가창골에서 학살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허망하게 가버린 아내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애정 때문에 그리고 무덤조차 없는 아내의 슬픈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1960년 4·19 학생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한국전쟁민간인피학살자를 추모하고자 ‘피학살자유족회’를 발족한 것이 빌미가 되어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혁명재판부에 의해 ‘특별법 제6조’ 위반 혐의로 1962년 2월 9일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이후 무기로 감일등 되고 세 차례의 추가 감형으로 1970년 3월 11일 약 10년만에 만기출옥 하였다. 하지만, 1975년 8월 9일 사회안전법 보안감호처분으로 또 다시 2년의 감옥 생활을 감내한 후 1977년 8월 9일에 출감하였으나 이후에도 주거제한처분으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는 등 그가 사랑한 국가로부터 끝없는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2011년 3월 10일 대법원의 재심 판결에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에 대해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함으로써 일제시대부터 수 없이 반복된 구속과 재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는 진기록만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서지학자(書誌學者)로서 본 직업은 의사 겸 한의사였으며, 저술가, 사회·문화·예술평론가, 에스페란토어학자, 수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문화 분야의 선각자로서 위 모든 분야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성과 탁월한 기억력 그리고 서광(書狂)이라 불릴 정도의 책에 대한 애착이었다.

1928년(16세)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은사 현준혁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 무렵 ‘민족의 운명’과 ‘빈곤한 사람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원대한 꿈을 품고서 공부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 사회과학서를 탐독하고 세계 국제 공통어 ‘에스페란토’를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국적, 민족성, 계급성이 없는 절대 중립어인 ‘에스페란토’를 인류 공통 보조어로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게 되고 약소민족과 피지배 국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평화의 세계와 민족해방을 꿈꾸며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원식은 가난 때문에 아파도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극빈자들에게 무료로 의료 혜택을 주기 위해 당시 일제의 차별로 어렵고 힘든 의사고시에 합격하여 의원을 운영하였고, 1945년 해방 후에는 대구의무노조를 결성하고 다음해 대구의무노조 제1의원을 개원하여 ‘무산자병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이 남 달랐던 이원식은 고고학 분야 특히 서지고증학 분야에서 국내 최초 그리고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우수성을 입증하고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해방 직후 ‘대구시립박물관’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표위원이 되어 일본에 강탈 당할 위기에 있었던 문화재를 되찾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고고학, 서지고증학, 연대학 분야에 뛰어난 지식들은 그의 편저서 《세계과학문화사연표》(1955년) 편찬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 저서는 6·25 전후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7년간의 노고를 아끼지 않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이룬 성과였다.

1958년 1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도서전시회’의 출품도서로 선정되었던 《세계과학문화사연표》에서 겨레의 눈을 뜨게 한 민족문화의 큰 은인 ‘세종대왕’, 빛나는 대과학자, 대예술가 만능의 천재 ‘레오나드로 다빈치’, 위대한 휴머니스트 인류의 말 에스페란토 창안자 ‘루드비코 라라로 자멘호프’ 박사 세 사람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이원식은 애서가이자 대단한 장서가였다. 일제시 비밀결사조직 관련 서적들로 인해 일본 경찰들에게 여러 차례 검거되어 고문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해방 후에는 소장하고 있던 귀중 고문헌들을 탐내는 무리들로 인해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는 사이에 수 많은 귀중 서적들을 도난, 분실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시 결국 귀중 서적들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었고, 애서들도 모두 도난, 분실 되었다. 이렇듯 자신에게 절망과 끝없는 고독을 선사하였던 그 책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절대 고독을 책과 함께 견뎠고, 그 책은 이원식의 모든 것들을 앗아가고 끝없는 고통을 준 동시에 마지막까지 주인의 곁을 지켜주며,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해방 전·후에 1,000점 이상 되는 귀중 고문헌을 포함하여 희귀 전문서적 총 장서수가 2만여 권이 넘었다는 사실은 그가 책에 대한 얼마나 애착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피학살자유족회’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한탄하고 비관하기 보다는 그 극도로 처참한 순간에도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영광이 길이 빛나게 할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1940년도부터 연구해 오던 세계수학사상 2,500여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삼대불능 기하학 작도’ 연구를 옥중에서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작도 연구를 재개하였다. 그 날로부터 13년간 매일 10시간 이상 작도를 연구하여 완성하였으나, 1978년 제1차 국제 공개발표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원식의 옥중 기하학 작도집 《세계수학혁명선언》(미간행본)을 국제공개 발표하여 《불경》, 《성경》과 《유클리드 기하원본》와 비견될 수 있는, 전 인류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영원한 기록을 남기고자 39년간 연구하여 완성하였던 ‘삼대불능 기하학 작도’ 연구결과를 끝내 세상에 공개하지 못하였다. 그의 외동 아들에게 교통사고 가해자인 택시기사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말고 합의 해주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였던 이원식은 민족과 국가 그리고 가난한 민중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였다.

격동 시대에 의사라는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불 밝히는 삶을 살았으며, 끝없는 고난 속에서도 국가와 대중을 먼저 생각하였던 몽재 이원식은 진정 의로운 천재적 기재(奇才)였다.


조국이 부르는 벽 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