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Cwt96/중국의 미술

중국인의 미의식의 역사를 간단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14억 이상의 국민을 가진 광대한 중국대륙, 중국인이란 말로서 불리는 사람들조차 다종다양한 종족으로 성립되고 황하유역 농경대(農耕帶=河南中心)와 양쯔강유역 농경대(江蘇中心)에서도 한족(漢族)과 남만이(南蠻夷)의 대립으로 시작되어 있다. 또한 새외(塞外)의 유목기마민족이나 영남민중(嶺南民中)의 민족도 등장하여 중국문화·미술의 창조자·트레이거가 되어 시간적으로 약 5천 년의 흐름 속에서 부침(浮沈)을 보였다. 중국 고대의 한족(漢族)이 황하유역의 농경대를 근거로 하여 스스로 하(夏)·화(華)·중화(中華) 등 문화 중심자로서의 의식은 중국인을 한족으로 대표시킬 만도 하다. 그러나 중국 정치 지배자의 교대 추이는, 북방 새외의 스텝에서 유목기마민족의 풍요한 농경에의 침입·점거·쇠멸과 한족의 대우 부활의 반복이어서, 중국 미술의 일면에는 새외 유목민의 미의식의 계보도 내포돼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농경민의 정착생활에서 영위하는 생활양식이나 생활감정은 신화·종교·사상·예술의 분야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된다. 인류문명 발상지의 하나로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인더스 문명과 나란히 중요시되는 황하 농경대 문명은 기원전 3천 년기(紀)로 소급되어 훌륭한 채도문화(彩陶文化)를 창출했다. 손으로 만든 얄팍한 토기(土器)나 기형(器形)이 세련되어 있어서 적갈(赤褐)·흑(黑)·백(白)의 안료를 사용하여 형태 가득히 매우 대담한 필치로 장식의장을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채도의 발생 기원의 문제에 이란 고원 서부나 메소포타미아의 채문토기(彩紋土器)와 조형감각이나 표현형식이 흡사한 데가 많은 점에서 영향관계(影響關係)가 전해지고 있다. 고대 스텝 로드를 통해서 운반된 것인지, 또는 황하유역 한민족의 창작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이 스스로를 화(華)라 하고, 문화·예술의 창조자로서 자부한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중국미술을 한족의 미의식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창조활동에 맹아(萌芽)·발생·개화·쇠퇴의 파동현사이 있어서 신생명을 새외에서, 또한 해상에서 운반해 온 것이 화외(華外)의 이민족이며, 북적(北狄)·서융(西戎)·남만(南蠻)의 무리들이었다. 한족 청동기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은주(殷周)의 고동기(古銅器)는 존(尊)·작(爵)·고·유·뇌·화 따위 제사의 사용 목적에 알맞은 기형(器形)에다 주술적·종교적(토템 따위)인 의의를 가진 도철문·훼룡문이 기면(器面) 일면에 베풀어져 그들의 생활감정의 복잡한 기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동기류(銅器類)가 세련되자 아울러 형식화된 엄격 단정한 조형감각이 허물어져 주(周)·전국으로 들어가면 유동적인 자유로운 조형(造形)으로 옮겨가 고전적인 엄격성은 우미 방일(優美訪日)로 타락되어간다. 전국 무렵부터 북방 유목민족에 의하여 전해진 상감기법(象嵌技法), 글라스 터키석(石)의 수입, 칠보기술의 채용에 의한 신생명의 부여·변천은 전국미술을 커다랗게 전환시켰다. 더구나 농경대의 정착생활에 걸맞는 제사용의 대형용기에 대하여 휴대의 지혜에서 나온 대구(帶鉤) 등의 장신구나 유목민의 제기(祭器)·동경(銅鏡) 등이 유포되고 글라스유(釉)의 유입이 도자기의 비약적인 진보를 약속하였다. 이러한 일례를 보더라도 한족 미의식과 유목민의 미의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겠다. 새외유목자가 독자적인 미술·문화의 창조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업무역자의 스타일, 생활양식 속에서 멀리 동떨어진 지역의 이질적인 문화·미술·사상의 운반자·트레이거로서 중국 황하유역에 출현했다. 한제국(漢帝國)은 한문화의 완성자로서 새외에 팽창해갔으나 마침내 수동 상태로 들어갔다. 후한에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유전되었다고 하는데, 5호16국시대로부터 서역·천축(天竺)의 전도승(傳道僧)이 군웅(群雄)들의 국사(國師)로서 등장하였다. 종교의 전도자가 국왕의 군사고문이고 부국강병정책의 컨설턴트(consultant)였다는 점에서 불교가 서역을 통과해서 동아시아의 문화 전반의 백과전서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가운데 유목민 선비의 일족 척발(拓跋)이 황하 농경대를 수중에 넣고, 북위(北魏)를 건국한 다음 무주새(武州塞)의 마애(摩崖)에 대석굴군을 개착(開鑿)하고 그들의 코스모폴리트한 성격을 조형미술에 반영하였다. 중국 불교미술의 여러 양상은 한족의 미의식과 새외민족의 미의식의 각축융합(角逐融合)의 역사이다. 조각미술 이외의 분야, 즉 회화·서적·공예의 세계에서도 이러한 유전(流轉)을 묘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도자기는 그 생산자의 생활감정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어쨌든 왕조 교대를 통해서 정치 담당자인 농경민 한족과 유목민인 새외족(塞外族)이 제각기 미의식이나 생활감정을 문화·예술의 분야에서 발휘한 것이 중국미술의 흐름이고 특질이라 할 수가 있겠다. <張 文 戶>

중국의 회화 편집

중국회화의 전개 편집

中國繪畵-展開 중국회화에는 독자적인 특색이 있다. 그것은 중국이 타국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입었다는 것과, 외래문화에 대해 항시 주체성을 잃지 않고 동화(同化)하였던 수용방식에도 그 원인이 있겠다. 중국회화의 성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보수적·지속적이어서 관심의 도(度)는 횡적(橫的)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종적(縱的) 계열(系列)에 있어, 가령 원대(元代)에는 남송(南宋)을 뛰어넘어 북송(北宋)으로, 명대후기(明代後期)에는 전기(前期)를 부정하고 원말(元末)로, 이렇게 전대(前代)를 거슬러 올라가 반복적인 전개를 되풀이하여 왔다. 그래서 화론(畵論), 화사(畵史), 화가전(畵家傳), 저록(著錄)(작품을 기록한 책) 등과 같이 중국회화만큼 직접적인 문헌이 풍부한 예는 달리 없다. 또 원말(元末)로써 규범으로 삼아야 할 전형은 그 성립을 끝마쳤고 그 후는 그 전형을 계승·저술하는 것이 화가의 본도(本道)라고 하는 인식도 명대 중기의 문인에 의해 제창되고, 보편화되었다. 소위 '방:본뜨다'라 하는 개념이다. 전형의 확립과 방고의 제작태도는 당연히 제재의 제한(制限)마저도 생기게 하였다. 송대(宋代)까지는 도·불교화(道·佛敎畵)·인물·화조(花鳥)·축수(畜獸) 등 수없이 그려지던 것이 명대(明代), 특히 중기 이후에는 산수화(山水畵)를 주류(主流)로 하게 되었다. 재료의 특질로서는 모필과 묵(墨)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전자는 묘선(描線)에 따라 형상을 파악하는 것을 중시하고 서(書)의 필법으로써 그리는 방법이며, 후자는 농담을 나타내는 먹(墨)에 의해 색채를 대신함으로써 검정(黑) 일색으로 자연·동식물을 표현하는 기법이며, 한걸음 나아가서는 작화(作畵)의 목적은 사생(寫生)이 아니고, 흉중(胸中)을 토로하고, 인격을 투영(投影)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이 실물과 닮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화(中國畵)에는 '미(美)'라고 하는 가치판단은 존재치 아니한다. 중국화의 평술(評述)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쓰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평가(評價)의 첫째는 '기운(氣韻)'의 유무(有無)이며, 기술의 교졸(巧拙)에는 '진(眞)' '묘(妙)' '능(能)'이라는 어휘가 사용된다. '기운'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그려진 생명의 맥동(脈動)을 지칭한 것이었으나 후에는 이것이 산수화에도 전용(轉用)되어 그림의 품격과 정취, 내면적인 충실성 등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기운의 개념이 변화를 가져온 시기, 즉 당송(唐宋)시대 또는 청말(淸末) 민국(民國) 기간을 가지고 시대구분으로 생각하는 수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종래대로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기로 한다. 중국화는 오랜 역사와 전란(戰亂)으로 인해서 멸실(滅失)된 정도가 아주 심하다. 당(唐) 이전의 자료로서는 발굴된 벽화, 전이나 석재(石材)에 새긴 화상(畵像), 화분·사자·악기 등에 다듬어진 공예화(工藝畵)를 제외하고는 극기 그 유품이 드물어, 당 이전은 '그림 없는 회화사(繪畵史)'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송원(宋元)에 이르러서도 진정한 유적은 극히 소수(少數)에 그칠 뿐이다. 가짜를 가려내어, 만인(萬人)이 납득할 만한 고명(高名)한 대작가(大作家)의 기준작(基準作)을 확정하는 것, 이것이 중국회화 연구의 첫째 절차이며 과제다.

한대의 회화 편집

漢代-繪畵 중국에서는 석기시대에 채문토기(彩紋土器)의 문양(紋樣)으로부터 발달된 귀얄(刷毛)의 존재가 짐작되고 채색회화(彩色繪畵)의 부류는 멀리 은대 후기에 제작되었던 증거가 있다. 한대(漢代)에서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국책에 의해 충신, 효자, 열녀 등의 권계화(勸戒畵), 신령(神靈)과 초자연적 세계의 산수화 등이 궁전이나 분묘의 벽화로 그려지고, 돌이나 기와에 새겨졌다. 치졸한 표현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으나 개중에는 생명감이 넘쳐 흐르는 유려한 필선도 볼 수 있으며, 선묘(線描)를 축(軸)으로 하는 중국회화의 기본적인 형식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화상석(畵像石)으로서는 산둥(山東)의 무씨사당(武氏祠堂) 외에 이난(沂南)·난양(南陽)·쓰촨(四川)의 것이 유명하다.

6조의 회화 편집

六朝-繪畵 6조시대의 회화의 특색은 후한 말(後漢末)에 등장하게 된 문인화가(文人畵家)에 이어서 수다한 명수(名手)를 낳은 점, 그리고 송병(宋炳)·왕미(王微)의 화론(畵論)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논증된 뛰어난 예술비평이 행해지기 시작한 점, 제재(題材)로서는 종래의 권계화나 사전설화화(史傳說話畵)외에 새로이 불교회화가 개척되었던 점 등이다. 오늘날 화사(畵史)에밖에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화가 가운데에서 고개지(顧愷之)가 가장 유명하고, 대영박물관 소장의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의 원본은 그의 제작이라 전해지는데, 산수화로서도, 위트 있는 인물화로서도 구도·필법 모두 고대의 동화적(童畵的) 표현으로부터 월등히 진보되어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의 회화 편집

唐代-繪畵 문학이나 도기를 통해 상상될 수 있는 유려하고 풍만한 당대의 회화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멸실(滅失)되어 가히 그 진상을 짐작할 방법조차 없다. 초당(初唐)의 토목건축에서 거복(車服)의 제(制)에까지 종사하였던 궁정화가 염입덕(閻立德)·염입본(閻立本) 형제, 서역(西域) 전래의 특이한 음영법(陰影法)으로 평판이 높았던 위지을승(尉遲乙僧), 또한 당나라 전성기 쾌검(快劍) 진을 가른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필선(筆線)으로서 장안·뤄양(長安·洛陽) 두 도읍의 사찰의 벽화를 독접하였고, 후세 인물화의 상징적인 존재로 그 이름이 자주 되새겨졌던 오도자(吳道子), 농채(濃彩)와 치밀한 장식적 화풍으로, 후세의 금벽산수화(金碧山水畵)의 전통을 텄고, 명의 동기창(董其昌)에 의해 북송화(北宋畵)의 시조(始祖)로 추앙된 이사훈(李思訓), 이소도(李昭道) 부자(父子) 등 그 어느 작가의 작품도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충분한 것이 없다. 다만 시인으로 상서우승(象書右丞)의 벼슬에까지 올랐던 왕유(王維)는 문헌에 따르면 직인(職人)을 지휘감독하여, 웅장한 발묵풍(潑墨風)의 산수화를 그린 듯하나, 동기창이 이사훈과 대치시켜, 남송산수화(南宋山水畵)의 시조라고 본 것과 같은 그런 제1급의 화인이라고는 그 화풍상(畵風上)으로도 결코 말할 수가 없다. 당대 회화의 중요한 의의(意義) 중의 하나는 수묵화의 성립이다. 이 동양 독자적인 양식과 기법은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에 걸쳐, 왕묵(王墨), 왕묵(王默), 왕흡(王洽), 고황(顧況), 장지화(張志和) 등의 강남지방(江南地方)의 화인(畵人)에 의해, 술을 마시고 만취가 되어 모발(毛髮)이나 수족(手足)으로 먹을 튕기면서 음악에 맞춰 화포(畵布) 위에 사람을 태우고 이리저리 끌고 다녀, 그런 연후에 생긴 형체를 정리하여 완성시킨다는 식의, 반(半) 구경거리 같은 광태(狂態)를 통해 시작되었다. 흉중에 맺힌 심정이나 의지를 토로하고 표출다는 수묵화 표현의 본질이 극히 격렬하고 방자하며 조방(粗放)한 형으로서 포착되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화풍에 대해 일격체라고 불리는 이 화풍은 5대(代)의 석각(石恪)을 거쳐 북송 수묵화의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송대의 회화 편집

宋代-繪畵 송대의 회화는 금군(金軍)의 침입에 의한 정강(靖康)의 변(變)(1127)으로 종실(宗室)이 남도(南渡)한 시기를 경계로 하여 북송(北宋)·남송(南宋)의 두 시대로 구분된다. 중국 역대의 왕조 중 송대(宋代)만큼 화가를 우대하고 미술에 이해를 보여 준 천자(天子)는 없다. 태조(太祖)·태종(太宗)은 서촉(西蜀)이나 남당(南唐)을 병합하자 그 화인(畵人)을 궁정의 화원(畵院)에 소집하여 대조(待詔)·저후(著候)·예학(藝學)·화학정(畵學正)·학생·공봉(供奉) 등의 역직(役職)을 부여하고 보호 육성을 꾀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산수화에는 연문귀(燕文貴) 외에는 화원보다는 오히려 재야(在野)의 화인(畵人)에서 후세 산수화의 2대조류의 원조라고 간주되었던 대가(大家)가 출현하였다. 북송(北宋) 말 휘종(徽宗)은 철저한 관찰에 의한 세밀한 사생과, 시정(詩情)의 표출을 목표로 화원의 개혁을 기도하여, 남도(南渡) 후의 고종(高宗)에 이르러서 그 성과는 공전의 성황을 이룬 결실을 맺었다. 이후 말기의 선승(禪僧)들에 의한 여기(余技)로 하는 수묵화 이외에 화원을 빼고서는 주목할 만한 화인은 없다. 그러나 자유로운 분위기로부터 다양한 화풍이 성행되어 개성적인 작가가 속출하였다.

이성 편집

李成 자는 함희(咸熙). 당말(唐末)에 장안에서 산둥의 영구(營丘)로 옮겼고 이영구(李營丘)라고도 한다. 험준하게 우뚝 솟은 산들, '천리원(千里遠)'이라 말하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게(蟹)의 발톱, 사슴의 뿔을 닮은 수목 등, 화북(華北) 황토지대의 경치를 '먹(墨)을 아끼기를 금과 같이'라고 평해진 담묵(淡墨)으로 묘사해 냈다. 그는 북방계(北方系) 산수화의 원조이기도 하다.

동원 편집

董源 자(字)는 숙달(叔達), 일명 북원(北苑)이라고도 한다. 남경인(南京人)으로 남당(南唐)을 섬겼으며 후일 원부사(苑副使=庭番)가 되었고, 수묵화 외에 금벽 채색화(金碧彩色畵)도 그렸다고 한다. 기암괴석이나 고수(枯樹)를 그리지 않고 습윤(濕潤)하고 온화한 강남(江南)의 실경(實景)을 그렸다. 후일 미불에 의해 '평담천진(平淡天眞)'이라고 높이 호칭된 이래 남종화파(南宗畵派)의 원조로 추앙되었다. 제자로는 거연(巨然) 등이 있다.

범관 편집

范寬 이름은 중정(中正), 자(字)는 중립(仲立). 산시(陜西) 화원(華原) 사람으로 대범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해서 '범관(范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원망(遠望)하더라도 좌외(座外)를 떠나지 않고 발밑으로부터 솟아오른 듯한 거대한 주산(主山)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5대(代)의 형호(荊浩)·관동(關同)의 당조(唐朝) 이래의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였다고 간주된다. 산림(山林) 중에 종일 정좌(正坐)하고, 귀가 후에는 일실(一室)에 틀어박혀 마음으로 체득한 이미지에 의해서 제작하는 '흉중(胸中)의 구학(丘壑)'의 작화태도(作畵態度)는 범관으로부터 유래된다고 한다.

곽희 편집

郭熙 북송(北宋) 초기, 각지에서 성립한 전기(前記) 3인의 화풍 사이에는 상호간의 영향관계는 인지(認知)될 수 없으나 이성(李成), 범관(范寬)의 북방계(北方系) 산수화의 이념과 양식은 신종조(神宗朝) 화원화가 곽희에 의해 통일, 집대성되었다. 평원(平遠=水平視)·고원(高遠=仰視)·심원(深遠=俯瞰視) 등의 갖가지 시점에서 포착한 자연을 동일화면에 설정하는 3원법(三遠法)을 위시하여 아침(朝), 저녁(暮), 청(晴), 우(雨)의 광선이나 연무(煙霧), 4계(季)의 구별까지도 표현을 가능케 한 기법의 완성자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휘종 편집

徽宗 이름은 길(佶). 신종(神宗)의 제11자(子). 이성(李成), 동원(董源) 등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서촉(西蜀)의 황전(黃筌)과 그 일족은 명확한 묘선(描線)과 농후한 색채에 의해 호화롭고 장식적인 화조화(花鳥畵)를 그려, 이것이 궁정화원의 지도양식이 되었다. 한편 수묵(水墨)을 주로 하고, 윤곽선을 쓰지 않는 남당(南唐)의 서희(徐熙=황씨의 '부귀의 본'에 대해, '野逸'이라고 불렀다)는 황씨에 의해 조악(粗惡)하며 격(格)에 들지 않는 것으로서 배격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서숭사(徐崇嗣)는 황씨체에 접근하여 양자 간의 절충이 시도되었다. 그의 화풍은 곽희와 동시대(同時代)의 최백(崔白)·오원유(吳元瑜) 등에 의해 완성되어, 원체화조화가 성립되었는데 최백(崔白)을 제외한 이상 여러 화가의 작품은 거의 멸실(滅失)되어 남아 있지 않다. 일대(一代)의 풍류천자(風流天子) 휘종필(徽宗筆)이라 전해지는 몇 점의 그림이 북송 후기 화풍의 추이를 추측케 하는 데 불과하다. 휘종은 시(詩)의 일구(一句)를 주어 경작케 하여, 함축과 여정(餘情)을 띤 제재를 취급함을 가(佳)한 것으로 하는 그러한 통제와 지도를 행하는 반면, 내부(內府)의 수장(收藏)을 늘리고, 스스로도 화필(畵筆)을 들어 그 천재적인 재간을 발휘하였다.

마원 편집

馬遠 가학(家學)은 하중(河中)의 불화사(弗畵師)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5세(世) 7씨(氏)의 화가를 배출시킨 일족 가운데서 가장 걸출(傑出)하며 하규(夏珪)와 더불어 남송(南宋) 원체화를 대표하는 화인(畵人). 광종(光宗) 영종조(寧宗朝)의 대조(待詔). 북송 산수화의 웅대한 경관은 소실되고, 주산(主山)은 비스듬히 잘리어, 화면의 한구석에 밀어 붙이고 잔산잉수(殘山剩水), 변각(邊角)의 경(景), 마일각(馬一角) 등으로 불리는 일편(一片)의 자연으로 변모되었다. 여백(余白)에 시정(詩情)과 의미가 담겨진 휘종의 지도이념이 쇠약해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양해 편집

梁楷 영종조(寧宗朝) 화원의 대조(待詔). 시여(賜與)받은 금대(金帶)를 원중(院中)에 걸어놓고 떠났다는 기행(奇行)의 주인공으로 '양풍자(梁風子)'라고 불리었다. 인물산수화(人物山水畵)에 뛰어나며 특히 감필체(減筆體=필체를 적게 간략화하고, 사의를 목적으로 한 기법)로 된 인물화는 절품(絶品)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불 편집

자(字)는 원장(元章)으로 양양만사(襄陽漫士), 해악외사(海岳外史) 등의 호(號)가 있다. 휘종에게 소치(召致)되어 서화학 박사가 되었고, 그의 탁월하고 직관적인 감식안은 그의 비망록 <화사(畵史)> 중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붓을 쓰지 않고, 연근이나 사탕수수의 짜고 난 찌꺼기 등을 구사한 조방(粗放)한 화풍은 후세에 '미가산(米家山)'이라 불리는 형식화된 점태법(點苔法)으로 변질되어 남종(南宗) 문인화(文人畵)에 많이 이용되었다.

목계 편집

牧谿 송말(宋末) 탁종(度宗) 때의 촉(蜀)나라 사람. 중년에 선승(禪僧)이 되어 호를 목계, 휘(諱)를 법상(法常)이라 칭하며, 서호(西湖)의 육통사(六通寺)를 창건하였다. 남송선여(南宋禪餘)의 수묵화, 나아가서는 동양 수묵화의 정상을 이루는 대작가인데 그의 그림은 중국 본토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었다.

그 밖의 화인 편집

-畵人 미불과 같은 문인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목석화(木石畵)에 소식(蘇軾), 마(馬)·인물화에 이공린(李公麟), 묵죽(墨竹)에 문동(文同) 등이 있고, 종실(宗室)에는 조영양(趙令穰), 왕선(王詵)이 있다. 남송(南宋) 초기의 화원화가로서 이당(李唐), 이적(李迪), 소한신(蘇漢臣), 마화지(馬和之), 미불의 아들 미우인(米友人) 등이 있고 좀 내려와서는 마원(馬遠)의 아들 마인(馬麟), 유송년(劉松年) 등이 활약하였다. 목계(牧谿)에 이어서 등장한 선승화가(禪僧畵家)로서는 옥간(玉澗), 온일관(溫日觀) 등이 있고 남송의 진사(進士)로 원조(元朝)에 봉직하지 않았던 전선(錢選)은 절지화(折枝花)나 소동물(小動物)을 그려 원체화(院體畵)를 부흥시켰다.

원대의 회화 편집

元代-繪畵 원대의 화가는 화원계(畵院系), 문인계(文人系), 거기에 산수화의 이곽파(李郭派) 등 셋으로 대별된다. 원대(元代)에는 화원(畵院)의 제도는 없었고, 남송의 멸망과 더불어 화공(畵工)은 후원자를 상실하여, 대부분 저장지방(浙江地方)의 한 양식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화원계(畵院系)의 화인에 비하여 문인화가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어 동원(董源)·미불·미우인(米友仁) 등과, 또 한편으로는 이곽파(李郭派)의 화가들도 이성(李成), 곽희(郭熙) 등을 스승으로 받들고, 북송(北宋)으로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여러 선학(先學)들의 예술의 본질은 상실되어 자연을 관찰하는 의욕도 희박해지고 기법상으로도 조잡하여, 산수화로서는 구도에 있어 통일성이 결여되고 화면의 원근(遠近)의 표현도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조맹부에서 비롯된 복고운동은 원말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鎭), 예찬(倪瓚)의 4대가에 이르러 남종(南宗) 산수화풍의 전형이 완성케 되었다. 명 말의 동기창(董其昌)은 4대가 이후에 규범이 될 수 있는 강렬한 개성적인 작가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방 아무개'라고 낙관(落款)한 산수화가 이의적(二義的)인 모사(模寫)는 아니고 독립된 작품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

조맹부 편집

자(字)는 자앙(子昻), 호(號)는 송설도인(松雪道人). 후저우(湖州)사람으로 송태조 11대손이다.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었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문·서화(書畵)에 모두 능해 원조(元祖) 전반기 화단(畵壇)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화조수축(花鳥獸畜)도 그렸으나 산수화는 북방계(北方系)의 이곽풍(李郭風), 남종계(南宗系)의 동원풍(董源風)의 2체(二體)를 좇아 모방하였다. 그러나 원본(原本)이 갖는 사실성·일격성(逸格性)은 저하되어 버렸다.

예찬 편집

倪瓚 자(字)는 원진(元眞), 여러 가지로 불리었던 호(號) 중에서 운림이 가장 알려져 있다. 무석(無錫)사람으로 부호의 집안이며 '청비각(淸悶閣)'을 축조하여 풍부한 수장(收藏)을 과시하였으나 50세경 전란(戰亂)을 예측하여 가재(家財)를 버리고 여행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극단적으로 결벽하며 속진(俗塵)을 꺼려하여 '예우(倪迂)'라고 불릴 정도로 기이한 언동이 많은 점에서 미불과 닮았다고 한다. 동거양식(董巨樣式)에 이곽파(李郭派)를 가미하여, 숙산체(肅散體:냉랭하고 깔끔하다는 의미)라고 불리어 몇 그루의 나무와 강변의 한 소정자(小亭子)에다 인물을 그려 넣지 않는 독특한 산수화를 만들어 내었다.

황공망 편집

黃公望 자(字)는 자구(子久), 대치도인(大癡道人)이라는 호(號)를 갖고 있었다. 상숙(常熟) 사람이다. 4대가(四大家) 중의 최연장자로서 경사구류(經史九流)의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예운림(倪蕓林)과 더불어 가장 문인다운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조자앙(趙子昻)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동거(董巨)를 사법(師法)으로 삼아, 남종화(南宗畵)의 묘사형식을 완성하여, 명대(明代) 이후의 산수화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화법상(畵法上) 다른 세 사람을 포괄하는 폭넓은 성격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우주(宇宙)의 점에도 유례없는 웅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부춘산거도권(富春山居圖卷)>은 중국 산수화의 최우수작으로서 유명하다.

왕몽 편집

王蒙 자(字)는 숙명(叔明). 오흥(吳興)사람으로, 조맹부의 외손(外孫), 또는 조카라고도 전해진다. 원말(元末), 난(亂)을 피해 저장(浙江)의 황학산(黃鶴山)에 은거하여 황학산초(黃鶴山樵)라 호(號)하였다. 홍무(洪武) 초기, 명조(明朝)를 섬겼으나 호유용(胡惟庸)의 음모사건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고원형식(高遠形式)의 구도에 웅위(雄偉)한 산용(山容)을 화폭 가득히 쌓아올려 집요하게 그리는 것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오진 편집

吳鎭 자(字)는 중규(仲圭), 매화도인(梅花道人)이라 호(號)하고, 자싱(嘉興)사람. 다른 3가(三家)와 달리 정통 학문을 수업하지 못했으며 역(易)을 생업(生業)으로 하였다. 거연(巨然)의 화풍을 배워, 콘트라스트가 강한 농담묵(濃淡墨)으로 산수·대(竹)·매화(梅花)를 그렸다.

그 밖의 화인 편집

-畵人 조맹부의 일족(一族)으로 그림을 잘 그린 사람에 그의 아내인 관도승(管道昇), 그의 아들 조옹(趙雍), 조인(趙麟) 등이 있고, 그룹으로서는 위구르인인 고극공(高克恭), 감식에도 능하였던 가구사(柯九思), 묵죽(墨竹)의 이간, 조맹부의 제자로 황씨체의 화조(花鳥)를 그렸던 왕연(王淵) 등이 있다. 이곽파의 화인에는 조지백(曹知白), 강체, 주덕윤(朱德潤) 등이 있고, 또한 전반기의 산수화가로서는 마완(馬碗), 도사(道士)인 방종의(方從義), 성무(盛懋), 원말(元末)에는 묵란(墨蘭)의 승설창(僧雪窓), 묵매(墨梅)의 왕면(王冕) 등이 있다. 그리고 조어(藻魚)의 뇌암(賴庵), 율서(栗鼠)의 용전(用田), 송전(松田) 등의 지방화가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명대의 회화 편집

明代-繪畵 명대의 회화는 시기적으로나 유파상(流派上)으로도 대체로 3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제1기는 명초(明初)에서 영락(永樂)까지로, 원말(元末) 4대가 중 예찬(倪瓚)과 왕몽(王蒙)은 홍무년간(洪武年間)까지 생존해 있었고, 전자를 형식상 답습한 왕발, 후자를 스승으로 하여 모방한 서분(徐賁) 등이 활약했고 또한 조원(趙原) 등도 있었다. 제2기는 선덕(宣德)에서 홍치(弘治)까지로, 화원이 질량(質量) 공히 충실해졌고, 남송원체(南宋院體)의 화조도를 부활시킨 변문진(邊文進) 일족(一族)이나 대문진(戴文眞)을 필두로 한 이재(李在)·석예(石銳)의 산수, 임량(林良)·여기(呂紀)의 화조(花鳥) 등, 절파(浙派)라고 불리는 화인(畵人)이 종횡으로 분방(奔放)한 필묵을 구사하였다. 절파(浙派)란 대문진의 출신지인 저장성 항저우(浙江省杭州)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남북 양송(兩宋)의 산수화, 지방양식적인 불화(佛畵), 중당(中唐) 이후의 광일(狂逸)한 수묵화 등의 다양한 기법을 받아들인, 운필(運筆)이 빠르고, 농담의 묵법(墨法)이 격렬하고, 어수선한 작품으로 되는 인물·산수화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가서, 어느 유파에도 따르지 않은 일군(一群)의 개성적인 화가, 즉 주신(周臣)·당인(唐寅)·구영(仇英)·장령(張靈) 등이 있어, 원파(남송원체화를 계승하였다는 의미)라고 불린 적이 있다. 제3기는 정덕(正德)·가정(嘉靖)에서 명 말(明末)까지로 성화(成化) 때부터 활약하였던 심주(沈周) 문하(門下)의 문징명(文徵明)을 맹주(盟主)로 오파(吳派)의 문인화가(文人畵家)가 이 시기의 초기에 환영을 받았던 주단(朱端)·오위(吳偉)·장로(張路) 등 절파의 화가에 대체하여 화단(畵壇)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만력(萬曆)·숭정(崇禎) 때의 동기창(董其昌)의 이론적인 지지를 얻어, 유파(流派)로서는 세분화(細分化)되면서도 이후 청조말년(淸朝末年)까지 중국화(中國畵)의 주류를 형성한다. 오파(吳派)란 북송화계(北宋畵系)의 절파(浙派)에 대해서 말하는 명대(明代) 남종화파(南宗畵派)의 이름으로 예운림(倪蕓林)을 제외한 원계(元季)의 3대가와 명대 남종화인(南宗畵人)의 대다수가 오군(吳郡) 출신인 점에 연유한다. 중담묵(中淡墨)에 의한 미묘한 묵조(墨調)나 화려한 색채, 문인(文人) 서클에 꼭 알맞은 온화하고 우아한 작풍이 그 특색이다. 오파 문인화 외에 만력에서 명말(明末)에 걸쳐서는 다양한 개성적인 작가가 출현하였다. 이사달(李士達), 오빈(吳彬), 정운붕(丁蕓朋), 항성모(項聖謀) 등이 이에 속하는데 진홍수(陳洪綬), 최자충(崔子忠) 등은 멀리 6조(六朝), 당(唐)에까지도 거슬러 올라간 의고적(擬古的) 작품을 남기고 있다. 절파(浙派)는 사시신(謝時臣)을 거쳐 남영(藍瑛) 일족에 이르러 그 막을 내렸다고 하는데, 남영은 오히려 남북 양화풍(兩畵風)의 절충적인 성격이 강하다.

대진 편집

戴進 자(字)는 문진(文進), 정암(靜庵)이라 호(號)하며 첸탕(錢塘)사람이다. 선덕화원(宣德畵院)에 등용되어 명조(明朝) 제일의 명성을 얻었으나 동료의 시샘을 받아 추방된 후 궁한 가운데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절파(浙派)의 원조로 지목되며, 화원(畵院)의 화풍을 결정지웠다고 한다.

당인 편집

唐寅 자(字)는 백호(伯虎)이고 육여거사(六如居士)라고 호(號)하며, 오(吳)나라 사람이다.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이라 추앙되고 그 자신도 강남 제일의 풍류재사(風流才士)임을 뽐냈으나 관도(官途)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주색(酒色)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

심주 편집

沈周 자(字)는 계남(啓南), 호(號)는 석전(石田), 장저우(長州)의 명문출신으로 부조(父祖) 일족이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심주(沈周)는 송원화(宋元畵) 특히 황공망(黃公望)에게 몰두하여 만년(晩年) 오진(吳鎭)을 배워, 필묵(筆墨)의 격조(格調)가 강한, 웅건(雄健)한 화풍을 창출하였다. 남종화(南宗畵) 부흥의 선도자로서의 명성에 비하면 수작(秀作)이 많지 않다.

문징명 편집

文徵明 자(字)는 징중(徵中), 호(號)는 형산(衡山). 장저우(長州) 사람. 근엄한 성품으로서 가정기(嘉靖期). 문인사회의 중심적 존재로서 존경을 모으고, 심주(沈周) 문하(門下)로서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원조(元祖)로 지목되고 있다. 일족 중에 문팽(文彭), 문가(文嘉), 문백인(文伯仁), 문숙(文淑), 문진형(文震亨), 문종간(文從簡), 문점(文點) 등이 있고, 그 문하에 진순(陳淳), 육사도(陸師道), 전곡(錢穀), 주랑(朱郎) 등이 있다.

동기창 편집

董其昌 자(字)는 현재(玄宰), 호(號)는 사백(思伯). 관직(官職)은 대종백(大宗伯)이 되엇고, 문민(文敏)이란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화정(華亭) 사람이다. 문징명(文徵明) 이후 서화(書畵)의 제일인자로서 예림백세(藝林百世)의 대종사(大宗師)로 추앙되었다. 그의 화론(畵論) '남북2파론(南北二派論)'은 왕유(王維)·동원(董源)·거연(巨然)·미불에서 원말의 4대가를 거쳐 오파(吳派)에 이르는 문인화의 계열을 선(禪)의 남종(南宗)으로 간주, 이를 정통으로 존중하고, 원체계(院體系)인 직업화가의 일군(一群)을 쇠미(衰微)의 일로를 걷던 북종(北宗)에 비유하며 이를 경멸하였다. 여기에 절파(浙派)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오파는 이에 강력한 논거(論據)를 얻었으나 수석(樹石) 준법의 하나하나에서 전대(前代)의 전형을 구하려고 하는 주장과 수법은 청조 초기의 정통 남종화(南宗畵)를 완전한 형식주의로 전락케 하였다.

그 밖의 화인 편집

-畵人 절파(浙派)의 화인에는 선덕(宣德)의 상희(商喜), 성화(成化)의 종흠례(鍾欽禮), 홍치(弘治)의 서림(徐霖), 정덕(正德)의 사충(史忠) 등이 있고, 오파(吳派)의 화인(畵人)에는 문씨(文氏) 일족 외에 거절(居節), 왕각상(王殼祥), 송욱(宋旭), 육치(陸治), 막시룡(莫是龍), 장굉(張宏) 등 동기창(董其昌)의 분파(分派)인 소운종(蕭蕓從), 조좌(趙左), 심사충(沈士充) 등이 있으며, 일격체(逸格體)의 수묵화가로서는 만력(萬曆)의 서위(徐渭)·장서도(張瑞圖), 천계(天啓)의 보하(普荷)·장풍(張風) 등이 유명하다.

청대의 회화 편집

淸代-繪畵 청조(淸朝) 초기에는, 망국(亡國)의 한을 필묵에 싣거나 혹은 회화를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제작에 임한 개성적 작가들의 활약이 괄목할 만하다. 모두들 명(明)의 왕실(王室) 출신인 8대산인(八大山人), 석도 외 매청(梅淸), 홍인(弘仁), 공현, 정수(程邃), 법약진(法若眞), 예원로, 나목(羅牧)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화단(畵壇)을 주로 제압하고 있던 것은 오파문인(吳派文人)의 정통을 계승한 4왕5운의 6대가와 그 주변의 화인 세력이었다. 한편 순치(順治)·강희(康熙)·건륭(乾隆)의 역대 천자도 송대(宋代)의 천자에 못지않게 예술을 애호하여, 내정(內廷)에서 봉직하는 화인(畵人)의 충실을 기하고, 황제의 기호에 맞는 우미하고 단정하며, 대체로 일격(逸格)의 기미(氣味)가 없는 몰개성적인 청조원체화를 생산케 하였다. 장종창(張宗蒼), 전유성(錢維城), 동방달(董邦達), 동고(董誥), 정관붕(丁觀鵬), 이탈리아인인 낭세령(朗世寧), 우리나라 사람인 이세탁(李世倬) 등이 이에 속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공전 절후(空前絶後)하리만큼 중국미술의 수집(蒐集)을 행하였으나 화원의 작품은 고화(古畵)와 더불어 이 컬렉션의 중요한 일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화원도 가경제(嘉慶帝)의 시대를 최후로 하여 쇠퇴일로(衰退一路)를 걸었다. 건륭시대(乾隆時代)에는 이 이외에 상두(商都) 양저우(揚州)를 중심으로 하여 인기가 있던 8괴(八怪)라 불리는 그룹이 있다. 모두 중년을 지나서 화업(畵業)을 시작하여 화조(花鳥)·산수(山水)도 그렸으나, 묵죽(墨竹)·묵란(墨蘭)·묵매(墨梅) 등 여기적(餘技的) 제재를 취급하였고 또한 기이함을 자랑하는 난폭한 작품도 있음을 볼 수 있다. 근대 중국화 양식의 원형(原型)은 전통을 계승한 화원계(畵院系) 및 4왕계(四王系)도 아니고, 자유럽고 정형(定型)을 무시한 8괴계(八怪系)의 회화이며, 그 영향은 도광(道光)·광서(光緖) 연간(年間)의 조지겸(趙之謙), 민국(民國)의 오창석(吳昌碩)을 거쳐 현대의 중국화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4왕5운 편집

四王五雲 왕시민(王時敏), 자(字)는 손지(遜之), 호(號)는 연객(煉客), 왕감(王鑑). 자는 원조(圓照), 호(號)는 상벽(湘碧). 왕휘, 자(字)는 석곡(石谷), 호(號)는 경연산인(耕煉山人). 왕원기(王原祁), 자(字)는 무경(茂京), 호(號)는 녹대(麓台) 등의 4명을 4왕(王)이라 하고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정통(正統)으로 지목된다. 남북2종(南北二宗)의 화풍(畵風)을 합일(合一)하여 '백년(百年) 이래 오직 한 사람'이라고 지칭된 왕석곡(王石谷)이 창서우(常熟) 출신임을 제외하고 모두 태창(太倉) 사람들로서 지연(地緣)·혈연에 의한 동족의식도 유파로서의 결합을 공고히 하여 주었다. 또한 천주교도(天主敎徒)가 되어 유럽에 도항(渡航)한 오력(吳歷), 자(字)는 어산(漁山), 호(號)는 묵정(墨井)과 서숭사계(徐崇嗣系)의 몰골사생법(沒骨寫生法)에 의해 명대(明代) 이후의 화훼화(花卉畵)를 일신(一新)하여 후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운격, 자(字)는 수평(壽平), 호(號)는 남전(南田) 두 사람을 더하여 청초(淸初)의 6대가라고 지칭되었다.

양주 8괴 편집

揚州八怪 금농(金農)을 필두로 나빙(羅聘), 정섭(鄭燮), 이치, 왕사신, 이방응(李方膺), 고봉한(高鳳翰), 황신, 민정(閔貞) 외에 고상(高翔), 거기에 화암을 더하여 함께 8괴(八怪)라고 부른다. 대부분은 양저우(揚州) 이외의 출신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와 경제적인 원조를 구해 양저우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명대 중기(明代中期) 이후 현저해진 문인화가의 직업화(職業化)의 좋은 본보기이다.

그 밖의 화인 편집

-畵人 공현과 같이 금릉(金陵) 8가(八家)의 그룹 중에서 번기(樊圻), 오굉(吳宏) 등, 관리(官吏)이면서 화원화가를 겸한 사람에 장정석(蔣廷錫) 당대(唐垈), 추일계(鄒一桂) 등이 있고, 4왕(四王)에 준하는 계통에 전두(錢杜), 해강(奚岡), 대희(戴熙), 황이(黃易), 탕이분(湯貽汾) 등이 있는 외에 화조화가(花鳥畵家)에 방훈(方薰), 왕무(王武), 마원어(馬元馭), 미인화가(美人畵家)에 여집(餘集), 개기(改琦), 비단욱(費丹旭), 초상화가에 증경(憎鯨), 우지정(愚之鼎) 등이 있다.

중국의 조각 편집

중국조각의 전개 편집

中國彫刻-展開 중국인의 조형활동 중에서 조소분야를 살펴보면, 은주(殷周)에서 한(漢)·위(魏)·진(晋)에 걸친 공예감각이 앞선 청동기(靑銅器)나 회화적인 표현형식을 가진 화상석(畵像石) 등의 조소유품이 만들어진 시기와, 인도(印度)에서 발상(發祥)한 불교미술, 그 중에서도 불교조각이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에 서역의 사막지대를 넘어 전래(傳來)된 후, 북위(北緯)·남북조(南北朝)·수(隋)·당(唐)·5대(五代)·송(宋)에 걸쳐서 허다한 유품을 창조한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물론 종교활동의 포교(布敎)의 일단(一端)으로서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 고유의 유교나 도교에도 미술활동이 있고 유품(遺品)도 적으나마 남아있다. 그러나 불교미술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불상(佛像) 등의 영향을 받고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조각사(彫刻史)의 전개는 태반이 불상조각에 의해 점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상의 표현형식을 시대순에 따라 고찰하면 중국 남북의 지역이나 그 왕조(王朝)의 성격(왕조의 민족성이라고 하여도 무방)이 소위 시대양식이나 지역양식으로 변천되고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더욱이 인도나 서역(西域)의 불상 표현형식(양식)이 부단히 자극을 주었고, 그것을 중국인의 미의식을 통하여 수용해서 독자적인 미술양식을 만들어 내어 동아시아권(圈)에 있는 각지(各地), 즉 한국·일본 등에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본다면 중국 불상조각사(佛像彫刻史)가 가장 구체적으로 유품을 통해 조소(彫塑)의 역사를 뚜렷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개설(槪說)에서 언급한 한족(漢族)의 미의식과 새외민족(塞外民族)의 미의식 사이의 소장변화(消長變化)를 고찰하는 데 있어 불상조소(佛像彫塑)는 극히 적합하고 흥미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로부터 한·위·진 시대 편집

채도 편집

彩陶 황하유역(黃河流域) 농경민의 조소활동의 시작은 앙사오채도문화(仰韶彩陶文化)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채도상(彩陶像)과 석조유품(石造遺品)으로, 마치 인더스 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조소(彫塑), 즉 찰흙을 반죽하여 만든 지모신(地母神)·토우(土偶) 등을 연상케 한다. 더욱이 이런 것들은 오곡풍요와 행복기구(幸福祈求)의 호부류(護符類), 지모신상(地母神像)보다는 물(水)의 신앙에 연유된 인면사신(人面蛇神)이나 사자(死者)의 재생을 비유한 누에로 된 소박치졸(素朴稚拙)한 유품으로 남아 있다. 그 어느 것이나 황하(黃河) 농경대주민(農耕帶住民)의 생활감정의 구현물(具現物)이었다.

은주의 청동기 편집

殷周-靑銅器 은주의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기형(器形)과 장식의장(裝飾意匠)이 복잡한 동기(銅器)가 갑자기 만들어지고, 한족(漢族)의 미의식과 창조활동이 극히 승화(昇華)된 형태로 발휘되었다. 그 중에서, 인면사신화나 호두시굉, 수우형희존(水牛形熙尊), 쌍양형존(雙羊形尊) 등의 기형(器形)에 동물이나 인물두부(人物頭部)를 붙인 매력 있는 작품이 만들어졌다. 은주시대(殷周時代)의 사람들이 이러한 형상동물을 기형(器形) 속에 교묘히 옮겨 넣어 엄격장중(嚴格莊重)한 형식으로 표현하게끔 된 데에는 소니(塑泥)로 제작해 온 오랜 역사가 있었던 점과 제사 희생에 사용한 동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었음을 예상케 한다.

전국시대의 명기 편집

戰國時代-明器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묘(墓) 속에 부장(副葬)된 명기(明器)에 흑도무용상(黑陶舞踊像)이나 청동인물상(靑銅人物像), 은제호인상(銀製胡人像) 등의 소상유품(小像遺品)이 다수 제작되어서, 인물 모양의 조형감각이나 표현형식에 은주동기(殷周銅器)의 동물표현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사전국묘(長沙戰國墓)의 목용(木俑)과 휘현흑도용(輝縣黑陶俑)에는 인물 표현에 있어서 대량생산을 엿보이게 한 생략과 치졸하고 힘찬 강도(强度)를 보여 매력의 한가지로 간주되고 있다. 호인상(胡人像)과 청동인물상(靑銅人物像)에는 한족(韓族)의 전통적 미의식과는 상이한 이국의 풍속·표정 등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고 조형감각도 달리 되어 있다. 인물조소의 누벨바그(새로운 파도)의 도래를 생각케 한다.

한대의 문양·용·화상석 편집

漢代-紋樣·俑·畵像石한대에 접어들면 무제(武帝)의 서역원정과 흉노문화(匈奴文化)와의 교섭을 통해 서방문화와 기예(技藝)가 유입되었다. 인물·동물을 사실적으로 관조(觀照)하여 종래의 전통적인 한족의 미의식에 적합한 조형화가 행하여진 시대로서, 장식의장(裝飾意匠)에 공상수(空想獸)·신선(神仙)·운기문(雲氣紋)·반리문 등의 유동감(流動感)이 넘치는 무늬가 자유활달하게 표현되는 한편 곽거병(藿去病:한무제 때의 장군) 묘(墓)의 석조동물과 묘분부장품(墓墳副葬品)인 도용(陶俑) 등의 환조(丸彫) 조소 유품이 다수 제작되었다. 이들 유품에서 볼 수 있는 인물상은 정면관조(正面觀照)로써 만든 형식적인 전통적 기법에 의한 유례(遺例)가 많은데 대해, 동물도용(動物陶俑)과 석조작품에는 뛰어난 것이 많다. 오히려 화상석(畵像石)이라 호칭되는 부조의 벽화상(壁畵像) 속의 인물, 동물(말과 새, 신선) 등에 생생하고 약동적인 자태나 조형이 보이며, 회화 수법도 상당히 진보된 표현형식과 기술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한족의 그때까지의 오랜 전통을 집대성한 조소의 표현형식이나 기법이 완성되어, 위진시대(魏晋時代)로 계승되어 갔다.

불상조각의 유입에서 남북조시대까지 편집

고식금동불 편집

古式金銅佛 불교미술의 전혀 새로운 조형감각과 표현기법, 미의식은 서역(西域)의 유사도시(流沙都市), 또는 스텝로드를 통하여서 중국의 북변경역(北邊境域)으로 유입(流入)되었다. 중국으로의 불교유전(佛敎流傳)은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나 환제(桓帝) 때라고 전해지나 불상의 유입과 유품의 존재는 5호16국시대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황하북변(黃河北邊)의 쑤이위안지방(綏違地方)에는 유목기마민족인 흉노(匈奴)·선비(鮮卑) 등이 세력을 펴서 북시베리아의 스키타이 양식을 농후하게 반영한 청동기문화를 발달시켜 그 유품 중에는 소금동불상(小金銅佛像)이 남아 있다. 후에 북위왕조(北魏王朝)를 세운 선비족인 척발(拓跋)은 쑤이위안의 포두(包頭)에 있으며 불교를 수용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며, 또한 5호16국의 후조(後趙)·북량(北凉)·전진(前秦)의 제왕(諸王)들이 서역호승(西域胡僧)을 국사(國師)로서 초빙하여 조사조불(造寺造佛)을 행하였다. 이러한 조불활동(造佛活動)의 표본 분본(粉本)이었던 소금동불상(小金銅佛像)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338년의 금동불좌상, 산시성, 삼원현(三原縣) 출토의 금동보살입상, 윈스로프 컬렉션의 고식금동불좌상 등이 그 일례이다. 이러한 고식금동불상(古式金銅佛像)의 특색은 산시성 출토의 보살입상에서 볼 수 있듯이 간다라 출토의 청색편암제(靑色片岩製) 보살입상을 그대로 모사(模寫)한 듯한 조형형식과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 표정·수염·영락(瓔珞)·완천(腕釧)의 형식, 의문(衣紋) 주름의 표현, 샌들을 신은 발의 조형까지 북서(北西) 인도의 기원 2세기경의 작품과 닮았다. 윈스로프 컬렉션의 고식불좌상(古式佛坐像)도 안모(顔貌), 통견(通肩)한 법의(法衣)의 형식이나 의문(衣紋) 주름의 표현 등이, 역시 간다라 불좌상(佛坐像)을 모방한 소금동불(小金銅佛)의 하나로 인도승 강승회(康僧會), 강거(康居)의 강승개(康僧鎧), 월지(月氏)의 축법호(竺法護), 불도징(佛圖澄) 등이 청래(請來)한 불상의 전형이라 생각하여도 무방하다. 재명상(在銘像)으로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무(建武) 4년 불좌상(佛坐像)에 있어서는 통견(通肩)한 납의(衲衣)의 주름표현이 가슴께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내리는 원호중문식(圓弧重文式) 표현으로 간다라 불상의 법의 형식이라기보다는 더 시대가 경과한 굽타조(朝)의 마투라 불상의문(佛像衣紋)의 형식화를 연상케 한다. 이 통견상의문(通肩相衣紋)의 표현은 소금동불의 계보 중에서 437년(劉宋元嘉14) 불좌상과 원가(元嘉) 28년 유국지(劉國之)의 상(像), 다시 443년(北魏太平眞君4) 불입상(佛立像) 등의 작품으로 전개된다. 그밖에 석조대상(石彫大像)으로서 허베이(河北省) 줘셴(▩縣) 청래환씨(請來桓氏) 일족의 불입상(拂入像)이 4세기 말년에 조립되고 또한 금동소불(金銅小佛)을 그대로 석조(石彫)에 옮긴 중국 제작의 작품도 출현하게 되었다.

윈강석굴 편집

雲崗石窟 진조(晋朝)의 남도(南渡)는 남이(南夷)·만족(蠻族)의 거주지(居住地)로 되어 있던 양쯔강(揚子江) 유역 일대에 한족·한문화의 유입을 가져와, 문화양상(文化樣相)을 일변시켰으며 마침내 거기에 유송(劉宋)의 불상조각을 남기고, 남조계(南朝系)의 미술전통을 성립케 하여 문화양상을 일변시켜 갔다. 한편, 삭북유목민(朔北遊牧民)의 화북침입(華北侵入)에 부수되어 황하이남(黃河以南)에까지 불교미술이 도입되어 황하유역에 축적되어 있던 부(富)를 수탈함과 동시에 그 일시적 소비형식으로 불교미술의 일대(一大) 조영(造營)이 행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위(北魏)의 대동윈강석굴(大同雲崗石窟)의 개착(開鑿)이었다. 이미 4세기 중엽에 둔황천불동(敦煌千佛洞)의 개착과 조불사업이 시작되어 있었으나 북위건국(北魏建國)의 무렵으로부터 양주(凉州) 남쪽 천제산석굴(天梯山石窟), 란저우(蘭州)의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타이저우(泰州)의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등이 계속 조영되고 있었다.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가 담요(曇曜)라는 승(僧)을 등용하여 왕도(王道)인 평성(平城=大同) 서쪽에 있는 무주새(武州塞)의 마애벽(摩崖壁)에 태조(太祖) 도무제(道武帝)로부터 문성제(文成帝) 자신을 포함한 5제(帝)를 위해 윈강담요오굴(雲崗曇曜五窟:석굴번호제16동에서 20동까지)의 조립을 시작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석굴조영(石窟造營)의 동점현상(東漸現象)의 하나였다. 조사조불은 이 경우에 제왕(帝王) 권위의 앙양(昻揚)과 과시였다고 생각된다. 약 14∼17m의 좌상·입상의 조형은 불상의 아이코노그러피(軌儀:iconography)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단정히 높은 코와 입술이 두꺼운 건장한 모습을 지닌 표정은 확실히 척발족(拓跋族)의 미의식의 조형화이었다. 5불(五佛)은 제왕의 저마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는데 제왕의 이상미(理想美)를 담뿍 담은 건강하고 명쾌한 조형표현이 특색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중인도(中印度)의 마투라 조각이 유목 기마민족인 쿠샨조(朝) 제왕(帝王)의 이상미를 조형화한 현상과 마찬가지이다. 담요오굴(曇曜五窟)의 대석불이 의문(衣紋)의 형식과 조형감각에 있어서 간다라풍(風)이나 굽타기(期) 마투라풍(風)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5호16국 시대에서 북위(北魏)까지의 조불(造佛)의 표현방식에서 보더라도 당연하다 하겠다. 태화초년(太和初年)에는 제5동에서 제20동까지의 커다란 석굴이 완성되었고, 각 석굴 앞에 걸쳐서 세운 목조건축도 완성을 보았다. 문성(文成)·헌문(獻文)·효문(孝文) 등 3제(帝)의 북위시대는 윈강석굴조영의 약 45년간에 해당하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는 유(儒)·도(道),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가까이 하여, 한식제도로의 개혁, 한식생활로의 접근 수용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조형활동에서도 나타나 불상의 납의(衲衣)가 통견상의 한식 제복으로 변하여, 명쾌하고 때로는 불균형을 느끼게 하는 대장부의 상(相)에서 균형 잡힌 세련된 미(美)로, 그리고 신체를 어느 정도 화사하고 섬세한 미(美)로, 또 쾌활한 둥근 얼굴에서 세면(細面)의 명상적인 표정으로 변화한 조형이 엿보이게끔 된다. 더욱이 의복의 의문(衣紋)의 끝이 소매나 옷자락, 치맛단(裳先) 등에서 유동적으로 리듬을 담고 표현되어 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섬세한 기교가 소박하고 힘찬 면 구성과 긴장미 있는 조형이 도처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5굴(窟), 제6굴(窟), 또한 21굴(窟) 이서(以西)의 소석굴조상(小石窟彫像)에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 있다.

룽먼석굴 편집

龍門石窟 효문제(孝文帝)는 493년(太和17). 평성(平城)에서 남하하여 한위(漢魏) 이래의 고도(古道) 뤄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었다. 제(帝)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진행되는 가운데 조불활동도 계속되어, 뤄양의 성내는 물론, 남교(南郊)인 이수이(伊水)의 마애벽룡문(磨崖壁龍門)에 석굴사(石窟寺)가 계속 개착(開鑿)되었다. 룽먼석굴의 석상은 윈강 후기의 조형표현을 취하면서 또한 한족 미의식(漢族美意識)에 적합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얼굴이나 몸도 세장형(細長形)으로 화사하게 되고 이목구비가 예리하고 강하게 조각되었고 의문(衣紋)의 면 구성은 편평(扁平)하며 의문(衣紋) 주름도 두꺼운 의상의 질감에 알맞은 병행유동선(竝行流動線)으로 여러 줄로 예리하게 표현된다. 특히 좌상 무릎에서 대좌(台座)에 늘어뜨려진 치맛단(裳先)이 장식적인 의문 주름을 보여서 좌우로 펼쳐지는 상현좌형식(裳懸座形式)을 볼 수 있다. 북위굴(北魏窟)로 유명한 것에는 선무제(宣武帝)의 칙명(勅命)으로 505년(正始2)에서 20여년 걸려서 만들어진 빈양동(賓陽洞)과 그 제불상(諸佛像), 또한 벽면 일부를 장식하는 제왕후비(帝王后妃)들의 공양 행렬을 소재로 한 부조(浮彫)군상, 연화동(蓮華洞)의 5존상(五尊像) 등을 들 수 있다. 북위후반(北魏後半)의 소위 이런 룽먼양식(龍門樣式)은 천하(天下)의 조상(彫像) 전체에 영향을 주어 이 양식의 단독 석조상(單獨石彫像), 금동불상이 허다히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허난성(河南省)의 공현석굴(鞏縣石窟)도 룽먼양식을 답습하여 북위 후반기에 만들어진 유구(遺構)인데 질(質)이 다소간 무른 사암(砂岩) 탓인지 유연한 조형감각이 보여, 룽먼상(龍門像)과는 좀 상이한 바가 있다. 제2·제3동(洞)에 귀인(貴人) 공양 행렬의 부조군상(浮彫群像)이 만들어져 있는데, 룽먼의 예보다 조형이 복스럽게 귀여운 표정이 되어 있는 점이 주목을 끈다.

제주양식 편집

齊周樣式 북위는 535년 위수(渭水)의 장안(長安)에 도읍(都邑)한 서위(西魏)와 장수 근처 업에 근거를 둔 동위(東魏)로 분열되고, 뤄양(洛陽)은 이미 문화의 중심무대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여 룽먼석굴조영(龍門石窟造營)도 일단락을 고하였다. 동서위(東西魏) 불상조각의 양식은 룽먼양식을 답습하고 있으나 한층 정미세련(整美洗練)된 작풍을 나타내고 있다. 이후 550년 동위(東魏)로부터 북제(北齊)가 557년 서위(西魏)로부터 북주(北周)가 제위(帝位)를 뺏고 왕조를 세웠다. 소위 미술의 새로운 시대양식인 제주양식(齊周樣式) 전성기에 들어갔다.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의 전고(全高) 340cm의 연화형후광(蓮華型後光)을 가진 보살입상(菩薩立像)은 552년(北齊의 天保3) 장자현령(長子縣令) 위만(魏蠻)이 조립한 유품이다. 온건하고 온화(溫和)한 표정이나 의문(衣紋)주름이 얕고 유동감이 있는 조형은 북위 룽먼양식에서의 탈화(脫化)가 엿보이며, 북제 초기의 대표례의 하나이다. 산둥(山東)에서 허베이(河北)에 걸쳐, 이즈음에 백옥제(白玉製)의 나형반가사유보살상(裸形半跏思惟菩薩像)이 제작되어 있으나, 그것들은 자태의 파악에 관심이 베풀어지고, 의문(衣紋) 주름과 면의 기복이 작은, 온건한 조형이 특색이라 하겠다. 북제시대(北齊時代)의 석굴유구(石窟遺構)로서 대표적인 예로 태원(太原)에 가까운 톈룽산석굴(天龍山石窟)과 허베이(河北)과 허난(河南)에 걸쳐 있는 남북(南北) 향당산 석굴군(響堂山石窟群)이 이에 해당한다. 톈룽산석굴은 동위(東魏) 때부터 개착(開鑿)이 시작되어 그 제10동, 제16동 제존(諸尊)은 북제양식을 완성하고 있다. 거기서는 인간의 육체를 극단적으로 무시한 룽먼양식의 형이상학적인 미(美)가 육체의 실재감(實在感)과 그 풍화유연(風和柔軟)한 미(美)에 자리를 양여(讓與)하여, 의문(衣紋)이 얇은 주름 밑에 육체가 의식되고 주름도 얕아 눈에 띄지 않았다. 육체의 사실적 관조(觀照)의 소산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표정의 온화한 표현으로부터 점차 흉복부(胸腹部)를 통과하여 직강(直降)하는 유동감 있는 의문 주름을 따라 잇단 치맛단의 표현에 인상점(印象點)을 옮겨 놓은 허베이(河北) 딩톈(定縣)의 석불입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향당산석불상(響堂山石佛像)의 조형표현에는 보관(寶冠)·장신구 등의 세부의장이 정세하게 조각되어, 육체는 블록상(狀)의 실체로서 관조파악되어 풍만한 육체미를 보이고 있음이 특색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의 굽타조(朝)에서 완성된 얇은 납의(衲衣)를 통하여 육체를 표현하는 조형표현이나 그러한 시형식(視形式)이 6세기에는 이미 중국에 도입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당시대-불상조각 완성기 편집

수의 조각 편집

隋-彫刻 북위(北魏)에서 시작된 대규모적인 조불사업은 유목기마민족이 재래(齋來)케 한 북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쿠샨왕조의 미술과 서역호족(西域胡族)의 미의식을 혼재시켜 만들어 낸 조형표현·양식을 본으로 하여, 거기에 한족 미의식과 조형이념을 기조(基調)로 하여 추진되어 왔다. 유정(有情:人格者)에 대한 이해(理解)를 경전(經典)에만 비추어 본다면 한족(韓族)이 추상화를 자유로이 다루는 경향에서 신선(神仙)과 도자(道者)·현인(賢人)의 이상상(理想像)인 육체를 화사하게 만들고, 세신(細身)의 명상적(瞑想的)인 표정을 갖는 불상(즉 龍門樣式)이 선택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나 서역과의 교통이 오아시스 루트를 통해 빈번해져 구법승(求法僧)의 순례(巡禮)와 유학(留學)에 의해 인도 고전조각의 이상미가 소개되자 그 수용소화(受容消化)가 행해져, 마침내 제주양식(齊周樣式)의 완성을 보았다. 이러한 풍조하에 수(隋)는 남북중국을 통일하여 581년(開皇1)에 복불(復佛)의 조칙(詔勅)을 발(發)하여 금은(金銀)·단향(壇香)·협저(夾紵)·아석제(牙石製)의 대소 10만 6580구(軀)를 새로이 만들고, 한편 10만 1000체(體)의 고불상(古佛像)을 수리하였다. 조불활동은 각지에서 일어나, 이러한 유품(遺品)이 있는 곳을 열거하면, 룽먼석굴의 약방동(藥房洞), 빈양남동(賓陽南洞)의 5존상(五尊像), 톈룽산석굴(天龍山石窟) 제8동(第八洞) 감불군(龕佛群), 산둥성 위한산(山東省玉函山) 불욕사의 제불(諸佛), 이두원먼산석굴(益都雲門山石窟) 제1동(洞)·제2동(洞), 타산석굴(駝山石窟) 제2동(洞)·제3동(洞) 등이 있다. 이러한 조상(彫像)들의 특색은 풍만하고 당당한 체구로 직사각형의 얼굴이 목의 삼도표현(三道表現) 위에 크게 인상적으로 창출되고 의문 주름과 납의(衲衣) 밑의 내의(內衣) 수대(綬帶)의 매듭이 뚜렷하게 얕은 부조(浮彫)로 정돈되고 표현되어 있는 점에 있다. 보살·나한(羅漢)·역사상(力士像) 등도 원통상(圓筒狀)의 블록을 기조(基調)로 한 육체표현을 보이고 보관(寶冠)·영락(瓔珞)·천환(釧環)·치마 등이 얇게 세밀히 조각되어 있다. 특히 영락은 가슴께에서 밑으로 늘어졌고 복부 중앙에서 치마와 마찬가지로 X자(字)로 교차되어 표현되었으며, 육체의 미묘한 면구성(面構成)이 의식되지 않는 흉복부(胸腹部)의 평활한 조형에 액센트를 주고 있다. 그의 호례(好例)로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개황(開皇) 5년(585)이라 새겨 있는 관음입상이 있다. 상의 높이 305cm, 백대리석제(白大理石製)의 대상(大像)이며, 온화한 표정과 목에서 흉복부(胸腹部), 다시 각부(脚部)까지의 면구성의 단순한 조형에다가 X자로 교차하는 치마나 영락(瓔珞), 그리고 하의(下衣)의 의문 주름의 아름답고 간결한 표현 등이 주목할 만한 것이다. 수대조각(隋代彫刻)의 특색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조각(隋彫刻)은 제주양식의 계승과 완성이라는 양면(兩面)을 상당히 짙게 갖고 있으며, 한편 산둥지역의 원먼산(蕓門山)과 타산석굴(駝山石窟)의 제상(諸像)은, 룽먼양식의 초인간적인 유정(有情)의 조형표현을 답습하면서 장신구의 세밀한 공예감각을 추구하여, 초자연적인 장신상(長身像)을 만들어 낸 이색적인 지방양식을 확립하고 있다.

초당의 조각 편집

初唐-彫刻 당제국(唐帝國)은 동(東)아시아의 문화·미술의 창조자이자 규범전형의 확립자이며, 주변제족 미술의 중앙양식 제시자(提示者)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 300년간의 미술창조활동은 조불사업의 질적인 내용에 초당(初唐)·중당(中唐)·만당(晩唐) 등의 산형(山形) 커브가 있어서 중국고전조각(中國古典彫刻)의 맹아상승기(萌芽上昇期)·완성기·원숙퇴폐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초당은 태종의 정관기(貞觀期)와 고종치세기(高宗治世期)의 약 80년으로 서(西)아시아·인도와의 교통도 빈번하며 인도 구법승(求法僧)의 내왕도 빈번하였다. 현장(玄裝)이 645년(貞觀19)에 신지식(新知識)을 가지고 귀환했고, 왕현책(王玄策)도 647년(貞觀22)에 돌아와 당문화의 세계적 성격형성을 위해 공헌하였다. 이러한 영양소는 차후 중당기(中唐期)의 개화완성(開花完成)에서 발휘되나 이미 정관불(貞觀佛)이라고 불리는 일군(一群)의 조상(造像)에 있어서 굽타 고전조각이 강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일례(一例)로서 장안(長安)에서 만들어진 정관 13년 명(銘)이 있는 좌불상(坐佛像)이 있다.

봉선사 노사나불 편집

奉先寺盧舍那佛 룽먼석굴에서는 당대(唐代)에 들어서도 조불활동이 계속되었다. 재발동(齋跋洞), 밀양 북동(密陽北洞)의 정관불상(貞觀佛像)의 유품이 있는데, 수대(隋代)의 블록 형상(形狀)의 육체관조(肉體觀照)를 벗어나 형자(形姿)에 육체적인 풍만한 곡선미를 나타내고 삼도(三道)도 곡선미가 풍만한 육체미를 표현하여서, 풍만한 신체에 걸치고 있는 의문 주름도 사실적으로 조각된 면구성의 자연스러운 기복이 표현되어 있다. 고종시대(高宗時代)는 650년(永微1)에 시작되어, 현경시대(顯慶時代)의 전반(前半)까지의 전기(前期) 작품으로서, 룽먼의 경선동(敬善洞), 마애삼존(磨崖三尊)이 있는 6동(洞), 노용동(老龍洞)의 제존(諸尊), 산둥신통사(山東神通寺) 천불애(千佛崖)의 불의상(佛倚像)과 아미타좌상(阿彌陀坐像)의 유례가 있다. 또한 동물조각(動物彫刻)의 걸작인 소능(昭陵)의 6준마(六駿馬) 부조(浮彫)도 이 무렵 만들어졌다. 고종치세(高宗治世) 후반기(後半期)는 660년에서 683년에 걸치는데, 룽먼석굴 조불사업의 절정기인 봉선사노사나대불(奉先寺盧舍那大佛)을 중심으로 눈부신 활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봉선사는 칙명에 의해 672년(咸享2)에서 675년(上元2) 사이에 만들어진 대조영(大造營)의 결정(結晶)으로서 본존노사나좌상(本尊盧舍那坐像:높이 약 13m)과 나한(羅漢)·보살·공양(供養)·역사상(力士像)이 좌우로 거의 환조(丸彫)풍으로 마애(摩崖)에서 조출(彫出)되었다. 신체의 프로포션도 잡히고, 길쭉한 눈매, 아름다운 콧마루와 비익(鼻翼), 구순(口脣)의 자연스러운 조형 등은 사실에 좇으면서 노사나불의 이상미를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걸작품이다. 보살의 보관과 영락(瓔珞), 치마와 하의(下衣)의 예리한 주름의 조형, 또는 호화로운 화염후광(火焰後光) 등도 볼 만한 것 중의 하나이다.

성당의 조각 편집

盛唐-彫刻 성당기(盛唐期)는 측천무후(則天武后) 치세(治世)로부터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천보(天寶) (713∼755) 연간(年間)까지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측천무후시대의 걸작은 702년∼703년(長安2∼3)경, 왕도 장안의 광택방(光宅坊) 광택사(光宅寺)에 측천무후가 만든 칠보대누각(七寶台樓閣)의 내면 벽을 장식하고 후일에 보경사(寶慶寺)로 옮겨져, 보경사석불로 알려진 약 20점(點)의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감불형식(龕佛形式)의 고부조(高浮彫) 삼존상과 오존상(五尊像), 십일면관음입상(十一面觀音立像) 등으로 되어 있으며, 당대(唐代) 일류공인(一流工人)들의 손으로 제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모양이 균형잡힌 적확한 조형이나 표정의 풍만 우아한 면 구성, 의문주름을 육체에 밀착시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선조(線條), 더욱이 천개(天蓋)나 후광, 대좌(臺座)의 제형식(諸形式)과 장식의장의 참신함에서 당제국(唐帝國)의 세계성의 일단(一端)을 나타내는 동서문화 교류의 영향이 엿보이는 등, 주목할 만한 점이 많은 중요 유품이다. 룽먼석굴에서도 서산(西山) 최남단(最南端)과 동산남단(東山南端)의 극남동(極南洞)·뇌고대중동·간경동(看經洞)의 나한군상(羅漢群像) 등의 제상(諸像)이 만들어졌으나, 그 자태에 굽타조(朝)의 삼굴법(三屈法)이 도입되어 허리를 틀고 서있는 보살상과 풍만한 육체관조가 우아한 경향을 나타내고 표현되게끔 되었다. 이 무렵 불상 이외의 조소(彫塑)에 고종건능(高宗乾陵)과 무씨순능(武氏順陵)의 묘전석인(墓前石人)이나 석수군상(石獸群像), 그리고 후장(厚葬)의 풍습을 반영하여 무수히 만들어진 삼채명기(三彩明器)의 용(俑)이 있다. 그 어느 것이나 사실을 구사하면서 당조(唐朝)의 이상미를 인간, 동물, 공상수(空想獸) 등에서 발휘하여 사람을 매료시키고 있다.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천보기(天寶期) 이후, 인간의 이상미(理想美)가 그 때까지의 균정(均整)이 잡힌 프로포션에서 극단적으로 풍만우염(豊滿優艶)이라는 표준으로 변화하여 몹시 인간적인 미태(媚態)가 풍기는 조형이나 자태가 환영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은 미의식은 부인용(婦人俑) 등에 특히 현저했으나 마침내 불상조각에도 영향을 끼쳐 이상미에 대신하여, 고혹적인 퇴폐미를 보이는 조형이 출현하게 되었다. 소위 반당양식의 등장이었다. 이 경향은 인도의 굽타 후기(後期)이나 파라기(期)의 퇴폐미의 매력이 영향을 준 일면도 있다. 대표적인 유구유품(遺構遺品)이 산시(山西) 톈룽산석굴(天龍山石窟)에서 볼 수가 있다. 제4동(洞)·제5동(洞), 제14·제17·제18 등의 각굴(各窟)의 조상은 각자(覺者=부다)와 각자(覺者)가 될 수 있는 유정(有情=사트바)의 숭고미나 초인적인 정신성은 없고, 몹시 친근미를 갖기 쉬운 우아하고 요염한 조형을 보이고 있다.

오대·송·원 이후-불상조각 쇠퇴기 편집

불상조각의 쇠퇴 편집

佛像彫刻-衰退 당(唐)이 멸망하고 재차 북방유목민(北方遊牧民)의 침입에 의한 5대(代)에 들면서 조불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이것은 밀교교의(密敎敎儀)와 선사상(禪思想)의 소개에 의해 주술의례(呪術儀禮)의 집행에 봉사하든지, 자력본원(自力本願)에 의한 자기정진(自己精進)을 구하는 불교로 탈피되어 갔고 만당기(晩唐期)의 퇴폐미를 갖는 조상(彫像)에 대한 반성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족의 송조(宋朝)에는 강남(江南)을 기반으로 항저우(杭州) 부근의 비래봉(飛來峰)·연하동(煙霞洞)·장대산(將台山)·석옥동(石屋洞) 등 석굴조상활동(石窟造像活動)과 쓰촨(四川)의 대족현 마애불(大足縣磨崖佛), 간쑤마이지산석굴(甘肅麥積山石窟)의 송대소상군(宋代塑像群) 등이 있다. 불상조각에는 선종(禪宗)의 조사상(祖師像)을 중심으로 한 나한상(羅漢像)에다 개성 묘사를 구하고 농민들의 주술대상(呪術對象)으로서 만들어진 관음상 가운데 친숙하기 쉬운 조형이 추구되어 갔다. 관음상에 현세(現世)의 여성미가 첨가되어 나한(羅漢)에 극단적으로 스토이크한 표정이 표현되었고, 또한 내면의 정신성을 구체화하려고 하였으므로 만당조각(晩唐彫刻)에 없었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원(元) 이후, 티베트로부터 북변(北邊)의 초원대(草原帶)에 걸쳐서 풍미하였던 라마교(敎)가 신봉되었고, 다비다목(多臂多目)의 그로테스크한 조상이 만들어졌으나 조형성의 관점에서는 주목할 만한 점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원(元) 이후 명(明)·청(淸) 시대의 불교는 기왕(旣往)에 조사조불(造寺造佛)을 위해 부(富)를 제공하였던 지배자가 이제는 현세의 궁전이나 그 밖에다 부(富)를 소비하였고 상공농(商工農)에 종사하는 서민들도 현세이익(現世利益)의 즉효성을 추구하였으므로 조형활동은 부진하였었다. 명(明)·청(淸)의 불사불상(佛寺佛像)의 수리보선(修理保繕)만이 부질없이 눈에 띄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일 게다.

중국의 서적 편집

은주시대의 문자 편집

갑골문 편집

甲骨文 중국의 문자(文字)가 어떻게 하여 발생하였는가, 그 상세한 이유·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개인적·사회적 제 조건이 쌓이고 쌓여, 사물의 형체를 포착하고 숫자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언어를 기호화(記號化)하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을 게다.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기원전 1400년경이라 생각되는 은(殷)의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이다. 이것은 19세기 말(末),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근교에 있는 샤오툰, 소위 은허(殷墟)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은왕조(殷王朝)는 신(神)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점괘로 얻은 신의(神意)에 따라 정치를 행하였다. 이 갑골문(甲骨文)은 은인(殷人)이 점(占)에 사용한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신에게 묻는 것이나 그 결과를 새긴 기록이다. 한민족은 늘 미(美)를 사랑하는 인종(人種)이다. 따라서 막 생겨난 문자에도 곧 미화(美化)하는 노력이 가해졌다. 갑골문에는 원시적인 상형문자(象形文字)와 상당히 진보된 구성을 보이는 문자가 산재(散在)한다. 원래 예리한 소도(小刀)로 새긴 것이기 때문에, 필화(筆畵)는 소박하고 직선적이지만 고대인다운 미적 조형감각이 구석구석까지 작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기원전 1400∼기원전 1100년 간의 갑골문은 자형의 변천과 서풍(書風)에 의해 다섯 시기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동일한 은허(殷墟)에서 묵서(墨書)가 있는 도편(陶片)이 발굴되어 이미 뛰어난 모필(毛筆)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은왕조(殷王朝)에서는 신성한 조묘(祖廟)의 제기(祭器)인 청동기(靑銅器)의 명문(銘文:金文이라고도 부른다)이 있다. 문자인지 그림인지를 분간하기 힘든 간단한 도상문자(圖象文字)가 많다.

고문 편집

古文 주대(周代)에 들어서는 갑골(甲骨)의 사용은 쇠퇴되고, 동기(銅器)의 제작이 성행되었다. 이러한 금문 (金文) 은 점차로 기록적 사명을 확대하여 장문화(長文化)한다. 처음에는 아직 얼마쯤 상형성(象形性)을 유지하나 마침내 필화(筆畵)는 복잡해지고 곡선형이 많아져, 좌우대칭의 호쾌한 기상(氣象)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기 (中期) 이후에는 상당한 장식성조차도 가중되게 된다. 이 시기(기원전 1100∼기원전 250년경)의 서체를 일반적으로 고문(古文)이라 부른다.

진시황제의 문자통일 편집

대전·소전 편집

大篆·小篆 춘추(春秋)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금문(金文)의 서체(書體)는 지방차(地方差)가 현저해지나, 마침내 열국간의 교통이 빈번해짐에 따라, 자체(字體)나 서풍(書風)의 상호 전파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자획(字畵)의 합리적 정리가 행해졌다. 그런데 서방(西方)의 진국(秦國)에서는 동방제국(東方諸國)과 상당히 상이한 서풍(書風)으로 발전하여, <설문(說文)>에서 말하는 대전(大篆)이라는 서체가 되었다. 마침내 개략해서 기원전 250년,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때쯤 되어서는 대전(大篆)을 모태로 하여 소전(小篆:일반적으로 전서라 한다)이라는 신서체(新書體)가 탄생하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재상(宰相)인 이사(李斯)의 헌책(獻策)에 따라 문자의 통일을 단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소전(小篆)은 새로운 제정(帝政)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듯이 힘찬 곡선으로 장중하게 꾸며졌다. 이 시기의 유품으로서는 청동기(靑銅器)의 명문(銘文), 석고문(石鼓文=大篆), 태산각석(泰山刻石=小篆) 등이 있다.

서체의 분화·발전-진·한·삼국·육조 편집

서체의 전개 편집

書體-展開 진(秦)은 불과 15년으로 멸망하였으나 서체의 변천상은 급속한 것이어서 이미 소전(小篆)의 약체(略體)로서 직선적이며 장식성이 적은 예서(隸書)가 싹트고 있었다. 시황제가 도량형을 통일시켰을 때에 그 표준으로 만들어진 권(權)이나 양(量)의 각자(刻字)에 이 서풍(書風)을 볼 수가 있다. 대량생산으로 인해서 문자가 간략화되었던 것이다. 전한(前漢)에 들면 전서(篆書)는 현저히 쇠퇴하고, 예서(隸書)의 계통이 발전하였다. 이 무렵의 간략체(簡略體)를 고예(古隸)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원전 100년경에는 새로운 장식으로서의 파세(波勢)를 보인 팔분체(八分體)가 출현하였으며 또 고예의 속사체(速寫體)에서 초예(草隸)가 생겨났다. 후한(後漢)에서는 초예(草隸)·장초(章草)가 주류(主流)가 되고, 전서(篆書)와 팔분체는 주로 의례적(儀禮的)인 경우에 사용되었다. 후한 후기의 소위 한비(漢碑)는 권위를 상징하는 듯 보이는 팔분체(八分體)가 그 미(美)를 과시하고 있다. 이런 경과를 보여주는 유품으로서는 서역 출토(西域出土)의 목간(木簡), 을영비(乙瑛碑)·예기비(禮器碑)·조전비(曹全碑) 등의 한비(漢碑)가 있다. 한(漢)이 멸망하자 권위적인 것에 대한 반항,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향한 동경정신이 고양(高揚)되어, 3국(三國)의 글씨는 전혀 자유로운 표현이 존중받게 되었다. 가장 전례적(典禮的)·의례적이었던 한대의 예서(隸書)는 의지적(意志的)인 힘이 강조되고 감각적인 긴장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하여 강한 파세(波勢)를 뿌리쳐서 점차 유연한 필치가 되었다. 이 무렵 장지(張芝)라든가 종요라는 개인의 이름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개성이라는 것을 존중하고 글씨를 감상의 대상으로서 본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장지는 초서(草書)의 명인이고 종요는 해서(楷書)의 명수였다고 전해진다. 위(魏)에서 서진(西晋)에 걸쳐서는 자체(字體)의 교착(交錯)이 심하게 행해졌다. 한(漢) 이래의 장초(章草)는 말끔히 그 파세가 정리되어 새로운 초서(草書)가 되고, 초예(草隸)에서 한발 진보된 일체(一體)가 행서(行書)로 되었다. 이 두 가지가 실용문자(實用文字)로서, 동시에 감상서 표현으로서 주류가 되었다. 서역발굴(西域發掘)의 목간(木簡)에는 이 시대의 행초풍(行草風)의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예서(隸書)의 리듬과 풍성하게 흔들리는 자체(姿體)의 여흔(余痕)을 남기고 있다. <이백척독고(李柏尺牘稿)>는 동진(東晋) 초기의 유품으로서 귀중한 것인데 거기에는 행서(行書)·초서(草書)·장초(章草)의 서체를 찾아볼 수 있다. 후에 서성(書聖)이라고 추앙되던 왕희지(王熙之)기 동진(東晋) 중기에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혼후(渾厚)하고 우미한 서풍(書風)으로 썼으나, 후반생(後半生)에서는 소쇄(瀟灑)하고 어딘지 쓸쓸함을 띤 그런 서풍에 도달했다. 그의 아들 헌지(獻之)도 서예에 능하여 이 2왕(二王)의 출현에 의하여 행초(行草)의 표현은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동진의 유품으로서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문서와 사경(寫經)이 있으나 왕희지(王羲之)에 관해선 당인(唐人)의 쌍구전묵법(雙鉤塡墨法)에 의하여 모사(模寫)한 <상란첩>과 <공시중첩(孔侍中帖)>이 있다. 그리고 남조(南朝)로서의 동진(東晋)에는 팔분(八分)의 장식을 버린 간단한 일종의 원시적 해서(楷書)가 점차 형체를 굳혀 5세기 중엽에는 참으로 훌륭하게 완성된 해서가 되어 등장하였다. 필법(筆法)·서법(書法) 등을 엿볼 수 있는 이 해서의 성립은 종래의 서도(書道)를 일변시켰다. 이에 이르러 전기(前期)까지 남아 있던 예서(隸書) 이래의 파세는 깨끗이 없어지고 행서(行書)·초서(草書)도 같은 골법(骨法)과 구성의 법칙으로 통일되게 되었다. 사경(寫經)과 서역 출토의 문서에 의해, 이러한 해서의 전개를 볼 수가 있다. 한편 4세기 초, 종요·색정(索靖) 등 화북(華北)의 명가(名家) 서풍(書風)이 서방으로 유입되어, 카라샤르(焉耆) 지방에서 고착(固著)하였다. 그의 글씨는 예(隸)·해(楷)의 중간을 취하여, 호인(胡人) 독자적인 감각을 갖는 의지적(意志的)인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다. 북위(北魏)도 마침내 이 파(派)의 서풍(書風)을 계승하여 5세기 중엽경에는 북위 일류의 호강(豪强)한 해서(楷書)를 창출하였고 남방 한인(南方漢人)의 유려 우미(流麗優美)한 서풍(書風)과 재미있는 대립을 보이고 있다. 룽먼석굴의 조상기(造像記)나 출토(出土)된 사경이 주된 자료가 되어 있다.

해서의 전형-수·당 편집

당의 4대가 편집

唐-四大家 6조(六朝) 후반기에 있어 남북2파(南北二派)의 대립도 북인이 점차 남방문화(南方文化)를 동경해서 접근하여 정치상의 통일자(統一者) 수조(隋朝)가 등장할 무렵에 글씨도 새로운 수양식(隋樣式)으로 정리(整理)되려 하고 있었다. 전대(前代)에는 볼 수 없었던 정치(精緻)한 구성을 갖게 되고, 정제(整齊)한 가운데에도 소쇄(瀟灑)한 기상을 갖는 해서(楷書)를 묘지(墓誌)나 비(碑)에서 볼 수 있었다. 수조(隋朝)를 대표하는 서가(書家)는 지영(智永)이다. 그의 글씨로서 저명한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초당(初唐)에 이르러, 해서의 양식이 응집되어 우세남(虞世南)·구양순(歐陽詢) 등 명가(名家)가 배출하여 중국 서도(書道)의 전형(典型)은 여기에서 확립되었다. 그 해서는 분간포백(分間布白)에 의한 반듯한 건축성(建築性)을 발휘하였고, 더욱이 풍성한 정신을 알맞게 담은, 참으로 전형이라 하기에 족한 양식이었다. 우세남(虞世南)은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구양순(歐陽詢)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등이 대표작이다. 우(虞)·구(歐)보다 좀 뒤에 등장한 저수량은 만년에 서체가 가느다랗고 맑으며, 감정이 내키는 대로 붓을 놀려 절묘한 풍운(風韻)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경향은 측천무후(則天武后) 때까지 유행하였다. 빈틈없는 고식적인 전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정신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수량의 글씨로서는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가 유명하다. 성당(盛唐)에 접어들어서는 우(虞)·구(歐)·저와 더불어 당의 4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안진경(顔眞卿)이 등장하여 서법(書法)은 다시 새로워졌다. 이어 장욱(張旭)과 회소(懷素)가 출현하여 취(醉)한 김에 그 격정을 광초(狂草)에 쏟아 놓았다. 이것은 인간의 환희의 표현이며 전인간성의 표현이었다. 안진경의 글씨에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안근예기(顔勤禮記)> 등이 있다. 그러나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에 접어들면, 당인(唐人)이 뽐내던 해서(楷書)도 정법(定法)으로서 추상화(抽象化)되어, 유형(類型)으로서 침전(沈澱)하여 갔다. 그리도 번성하던 당조(唐朝)의 서도(書道)도 이런 과정을 밟아 붕괴되어 갔다. 만당의 작가로서는, 유공권(柳公權)·배휴(裴休) 등이 있다. 또한 5대(代)에는 양응식(楊凝式)의 존재가 전하여지고 있으나 글씨의 진상은 잘 알 수 없다. 당시대(唐時代)의 유품은 다수의 석각(石刻), 서역 출토의 사경(寫經), 소수의 전세(傳世)된 필적이 있다.

새로운 창작활동-송·원 편집

북송의 4대가 편집

北宋-四大家 북송 전기(北宋前期) (960∼1050년?)에는, 당말(唐末) 5대(代) 이래의 황폐가 점차로 정리되어 갔다. 왕희지(王羲之)의 서풍(書風)이 추모되었고, 고래(古來)의 명필(名筆)을 집성한 법첩(法帖)이 만들어져 반성의 동기가 되었다. 992년(淳化3), 칙명(勅命)에 의해 상각(上刻)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 10권은 서법(書法)의 규범을 보여주어, 점차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려고 하였다. 드디어 후기(1050∼1130년)에 이르러 송대(宋代)의 특색을 여지없이 발휘한, 새로운 본격적인 글씨가 탄생되었다. 채양(蔡襄)이 선구가 되고 이어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 등 소위 '북송 4대가(北宋四大家)'가 출현하였다. 채양(蔡襄)은 안진경(顔眞卿)의 법(法)을 배워 근직(謹直)한 글씨를 썼다. <천주 만안교기(泉州萬安橋記)> <사사어서시표권(謝賜御書詩表卷)>의 유작(遺作)이 있다. 소식(蘇軾)은 전혀 당조(唐朝)의 전형(典型)과 서법(書法)을 부정하여 강렬한 개성을 크게 표방하고 기백웅대(氣魄雄大)한 서풍을 이루었다. <한식시권(寒食詩卷)> <이백선시권(李白仙詩卷)>의 글씨 등이 있다. 황정견(黃庭堅)은 침착한 필세(筆勢)로 천태만상의 광초(狂草)를 전개하고 있다. <복파신사시권(伏波神詞詩卷)> <이백억구유시권(李白憶舊遊詩卷)>의 유작이 있다. 미불은 가장 고법(古法)을 중시하고 격조 높은 서경(書境)을 개척하였다. <행서삼첩(行書三帖)> <초서사첩(草書四帖)> 등의 유묵(遺墨)이 있다. 이 4대가(四大家)의 글씨는 각인각색의 서미(書美)를 전개하고 있으나, 그 글씨에 스며든 듯한 열띤 체취(體臭)는 서법(書法)을 초월하여 송인(宋人)다운 의기(意氣)를 보여주고 있다. 자아를 알고 의지의 힘을 알며, 정감(情感)의 강도(强度)를 안 그들의 글씨는 오로지 개성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경계로 하여 서(書)의 취향은 전혀 일변하는 것이다. 북송의 4대가의 친필은 다행히 전해진 것이 있어 그 진상을 알 수가 있다. 남송(南宋)의 초기(12세기 초)에서는 북송(北宋) 4대가의 웅혼(雄渾)한 서풍이 유행하였다. 능서(能書)로서 유명한 고종(高宗)의 글씨는 황산곡(黃山谷)에서 나왔다. 당시 강북(江北)에 나라를 창건한 금조(金朝)에도, 같은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의 서풍이 도입되어, 오거·왕정근(王庭筋) 등이 활약하였다. 이윽고 이 서풍(書風)은 무너지고, 전아(典雅)하고 정적(靜寂)한 아름다움을 찾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송(南宋) 후반기에 등장한 장즉지(張卽之)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장즉지는 미불의 서풍을 배웠다고 하면서, 골력(骨力)이 있고 윤기가 도는 특이한 풍격(風格)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선림(禪林)과의 관계가 깊었으며, <금강경(金剛經)> 등의 많은 유묵(遺墨)이 있다. 원(元)의 초기(13世紀末)가 되어서는, 조자앙(趙子昻)·선우추(鮮于樞)·등문원(鄧文原) 등이 출현하여 또다시 새로운 서풍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전아우미(典雅優美)한 글씨에 능하였던 조자앙은 선우추의 사후(死後) 일세(一世)를 풍미하였다. 그는 왕희지의 글씨의 정통(正統)을 배워 해행초(楷行草)에 능하였고, <난정십삼발(蘭亭十三跋)> 등의 수작(秀作)을 남기고 있다. 또한 가구사(柯九思)는 정연(正然)한 격조(格調)에 다소 격렬한 기상(氣象)을 내재시켰다. 후기에 들어서는 조자앙(趙子昻)의 정통정신에 반항하는 주관주의가 번성하였다. 그리고 격(激)한 금속적(金屬的)인 긴장을 보이는 서풍이 정통적인 글씨와 대립하였다. 장우(張雨)·강리기기·양유정(楊維楨) 등이 이 주의에 해당된다. 기기는 원래 서역의 호인(胡人)인데 원조(元朝)에 봉직하고, 글씨는 각체에 능하여 조자앙 이래의 제일인자라고 일컬어졌다. 장초(章草)를 섞어 쓰여진 <이태백시(李太白詩)> 등은 진귀한 유품이다.

송원의 묵적 편집

宋元-墨跡 북송 후기(北松後期)에 4대가(四大家)가 등장하고 북송말(北宋末) 이후 선승(禪僧)들간에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의 서풍(書風)이 인기를 모았다. 원래가 여기(余技)인 고로 자유분방한 것이 많고, 또한 서도사(書道史)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어서 중국에 있어서는 아주 멸실(滅失)되어 버렸다. 묵적(墨跡)은 정통적 서법(書法)을 지켜서 쓰여진 것은 아니나 선(禪)에 의해 단련된 기백을 단적으로 나타내며 필자의 인간성이 보는 자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이 서풍은 북송(北宋)에서는 묘총대사도잠(妙總大師道潛)·환오극근(歡悟克勤), 남송(南宋)에서는 대혜종고·밀암함걸(密庵咸傑)·북간거간(北磵居簡)·무준사범(無準師範)·허당지우(虛堂智愚), 원시대(元時代)에는 무학조원(無學祖元)·중봉명본(中峰明本)·고림청무(古林淸茂)·요암청욕(了庵淸欲)·초석범기(礎石梵琦) 등의 묵적(墨跡)이 존중되고 있다.

명·청의 서 편집

오중파와 낭만주의 편집

吳中派-浪漫主義 명의 초기(14世紀初)에 접어들어서는, 글씨(書)의 경향은 자연히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원말(元末) 이래의 금속적인 딱딱한 선(線)을 구사하는 일파(一派)와 격조파(格調派)를 추모하여 하나의 형(型)을 구하는 일파가 출현케 되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의 총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조(元朝)의 질후(質厚)한 감각이나 강렬한 정신이 소멸되고 평명(平明)한 통일(統一)을 지향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송수(宋璲)·송극(宋克)을 위시하여 해진(解縉)·심탁(沈度)·심찬(沈粲) 등의 서예가가 등장하였다. 성화기(成化期:15세기 후반)에는,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오중파(吳中派)가 당시의 예술계를 리드하였으며, 심주(沈周)·오관(吳寬)·당인(唐寅)·축윤명(祝允明) 등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모두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였었다. 그리고 16세기에 들어서면 문징명(文徵明)이 가장 명조적(明朝的)인 새로운 풍격(風格)을 확립시켰다. 문징명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이거니와 우선 인간적으로도 당시의 태두(泰斗)라고 추앙되었으며, 90세의 만년(晩年)까지 그 필력(筆力)을 발휘하였으므로, 그 후의 서화계(書畵界)는 거의 문파(文派) 일색(一色)으로 뒤덮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문문(文門)에 속해 있으면서도 왕총(王寵)·진도복(陳道復) 등은 문파(文派)에 빠지지 않는 별격(別格)을 출현시켰다. 이 알기 쉽고 분명한 격조를 자랑하는 명(明)의 글씨는 자칫 범속(凡俗)한 산문적(散文的)인 형(型)으로 전락해 갔다. 그리하여 후기에 들어서 막시룡(莫是龍)·미만종(米萬鍾)·동기창(董其昌) 등이 등장하여 이러한 풍조에 반항하고 문인주의적(文人主義的) 정신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동기창은 일체의 직업적인 작의를 배제하고 진솔함을 표현하는 가운데 시정신(詩精神)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엄숙한 정신을 난삽한 붓끝으로 발휘하였다. 이 동기창이 이끈 문인(文人)의 정신은 다음에 오는 명말(明末)의 왕탁(王鐸)·황도주(黃道周)·예원로·장서도(張瑞圖)·진홍수(陳洪綬)·부산(傅山)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당시는 마침 만인(滿人)들의 발흥기(勃興期)에 해당하여, 여러 방면에서 상당히 심한 전변(轉變)을 시현(示顯)한 때였다. 그들은 동기창과 마찬가지 정신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동(董)의 주지적(主知的) 경향에 대항하여 정취(情趣)가 내키는 대로 격렬하게 일어나는 마음을 글씨에다 담고 있다. 행초(行草)의 연면(連綿)함과 장조폭(長條幅)을 사랑하고, 의기(意氣)와 정열(情熱)의 흐름에 따라 반드러운 견포(絹布) 위에 붓을 놀렸다. 글씨의 면모를 일신시킨 이 서풍은 청조 초기(淸朝初期)까지 유행하였다.

첩학파·비학파의 고전주의 편집

帖學派·碑學派-古典主義청조 초기(17世紀末)에는 명말(明末)의 낭만주의시대를 계승하여 연면취미(連綿趣味)가 성행하였으나 동시에 동기창의 서풍도 재차 유행하였다. 그리고 진첩(晋帖)과 당비(唐碑)의 연구가 시작되어, 마침내 전혀 새롭고 풍성하며 커다란 구조성을 갖는 강희기(康熙期) 독특한 서풍이 생겨났다. 강희제는 학문예술(學問藝術)을 사랑하여 스스로도 강희예술(康熙藝術)에 기여하는 바 큰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사승(査昇)·진혁희(陳奕熙)·하작·왕주(王樹)·장조(張照) 등이 활약하였다. 중기(中期)에는 조정(朝廷)의 관료 문인간에서 조자앙(趙子昻)의 격조(格調)가 애호(愛好)를 받았다. 그러나 왕주(王樹)·장조(張照) 이래의 진당 법첩(晋唐法帖)의 연구는 점점 성행되며, 건륭(乾隆)∼가경(嘉慶)기에 걸쳐서 유용(劉墉)을 비롯하여 양동서(梁同書)·왕문치 등에 의해 교묘한 구조에 풍부한 정신을 담은 고전주의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첩학파(帖學派)'라고 이르고 있다. 한편, 건륭 초기(乾隆初期)의 금농(金農)과 정섭(鄭燮)은 야일(野逸)의 풍(風)을 즐겨하여 한비(漢碑)의 고비(古碑)를 따라서 괴기한 것을 썼다. 그래서 계복(桂馥)·등석여(鄧石如)·이병수(伊秉綬)·진홍수(陳鴻壽) 등이 배출되고, 진한(秦漢)의 고비(古碑)에 의해 전서(篆書)·예서(隸書)에 새로운 업적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비학파(碑學派)'라고 부른다. 옹방강(翁方綱)의 한당비학(漢唐碑學)의 이론은 이 시기의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첩학(帖學)·비학(碑學)의 구별은 있으나 이 시기의 고전주의의 특색은 한결같이 고법의 탐구와 새로운 전형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고법(古法)의 탐구, 고대정신을 중시하는 경향은 점차 강해진다.

북파창도 편집

北派唱導 우선 가경(嘉慶) 말년에는 유학(儒學)의 대가인 완원(阮元)이 등장하여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발표하여 북파(北派)로의 복귀를 창도하였다. 이어 포세신(包世臣)도 북위비(北魏碑)의 존귀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청대 후기는 새로운 낭만주의 시대를 맞았으며 청말(淸末)의 서단(書壇)은 매우 '금석(金石)의 기(氣)'를 애호하게끔 된다. 진한(秦漢)의 전예(篆隸)에 정열을 기울이는 자, 북위(北魏)의 조야(祖野)한 석각(石刻)에 고전미를 구하는 자(者) 등이 배출되었다. 오양지(吳讓之)·하소기(何紹其), 그것을 행초(行草)에까지 응용하려고 하는 자(者)·양기손(楊沂孫)·조지겸(趙之謙)·서삼경(徐三庚)·양현(楊峴)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그 중에서 조지겸은 북파비학(北派碑學)의 이상을 실현하고 모필(毛筆)의 자연성을 무시하면서까지도 그 원시성(原始性)을 추구하여마지 않았다. 그의 글씨는 세칭 '북위서(北魏書)'로 불리고 있다. 신선한 감각과 지성을 엮어 넣은 근대예술로서의 글씨는 여기에서 개화(開花)를 본 것이다. 청조의 최말기(最末期)에는 고문자학(古文字學)의 연구가 왕성히 행해져, 그에 따라서 고문(古文)과 전서(篆書)에 특이한 작가가 등장하였다. 오대징(吳大徵)과 오준경(吳俊卿)이 그에 해당하는데 특히 오준경은 주(周)의 석고문(石鼓文)에서 얻어진 기법을 구사하여 종래에 없던 전서(篆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썼다. 한가닥 퇴폐적인 정취가 당세(當世)의 취향과 투합된 것이었으며 청조(淸朝)의 서도(書道)는 이 오준경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였다.중국의 글씨 역사는 전반은 서체(書體)의 변천을, 후반은 서풍(書風)의 변이(變移)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그간 한민족(漢民族) 특유의 미의식(美意識)에 의해서 항시 문자는 아름답게 형체가 만들어지고 또한 걸출한 천재들에 의해 무상(無上)의 법이 제시되었다. 중국인은 법(法)을 존중한다. 그러나 법은 일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변경되고 때로는 새로운 법으로 대치되기도 한다. 4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글씨는 앞으로도 새로운 서법(書法)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중국의 공예 편집

중국도자의 전개 편집

中國陶磁-展開 이미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중국에서는 채도(彩陶)나 흑도(黑陶) 등의 아름다운 토기(土器)가 만들어졌으며, 은주(殷周)시대에는 벌써 고온에서 유약(釉藥)을 바른 경질(硬質)의 도기(陶器)가 등장하고 있다. 한시대(漢時代)에는 납(鉛)을 내포하며 저온에서 용해되는 녹색이나 갈색의 유약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으며 3국(三國)·6조(六朝)시대에는 원시적인 청자(靑磁)가 만들어졌다. 당(唐)·송(宋) 시대에는 자기(磁器)의 제작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아름다운 제품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해외로도 많이 반출되었다. 원(元)·명(明) 시대에는 청화(靑花)·오채(五彩)라고 하는 그림무늬를 넣어 특징 있는 자기가 발달하였다.

선사시대 편집

채도 편집

彩陶 주로 중국 북부 황하유역 지방에서 발달한 것으로서, 서아시아의 채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결이 고운 흙으로 노끈 모양으로 길게 빚은 다음 감아서 만들어지고 주로 평지에 축조(築造)된 원형(円形)의 작은 가마(窯)에서 1000도 내외의 화도(火度)로 구워낸 것이다. 얄팍하게 완성되어 있으며 표면을 다듬은 후에 흑(黑)·적(赤)·백(白) 등의 이상(泥狀)물감으로 와문(渦紋)·기하문(幾何紋)·동물문(動物紋) 등을 붓 같은 것을 이용하여 뚜렷하게 그려져 넣는다. 제작 연대는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2000년경까지의 것으로서, 출토 상황에서 보아 채도는 특수한 용도를 위해서 특별히 제작되고, 일상용으로는 무늬가 없는 적색(赤色)으로 구은 '홍도(紅陶)'라고 불리는 토기와 소지(素地)에 모래(砂)가 섞인 갈색(褐色)의 '조도(粗陶)'라고 불리는 조제(粗製)한 토기가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흑도 편집

黑陶 채도에 이어 등장하였던 흑도는 채도의 가마와 닮은 원형 소형(円形小型)의 가마에서 구어졌던 것인데 채도가 산화소성(酸化燒成)으로 붉게 구어지고 있는데 대해, 흑도는 환원소성(還元燒成)으로 소지토(素地土)의 철분(鐵分)이 환원되어 회색이 된다. 거기에 소성(燒成)의 최후 단계에서 그슬려서 탄소의 미립자(微粒子)를 소지(素地)에 스며들게 하고 다시 이를 닦아서 검게 광택있는 표면을 만든다. 성형법(成形法)도 노끈 감는 식과 더불어 녹로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아주 얄팍하고 정교(精巧)한 것이 있다. 기형(器形)은 변화가 많고, 정(鼎)·역·규 등 중국 독특한 기형을 볼 수 있다. 무늬는 거의 없고, 기형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게 만들어진 것이 많다. 흑도는 역사시대에 들어와서도 제작되었다.

은주·전국·한시대 편집

회도 편집

灰陶 은(殷)의 도시국가는 흑도문화(黑陶文化) 위에 구축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대(殷代)의 토기의 주류(主流)는 회도(灰陶)인데 이는 흑도와 거의 동일한 수법에 의한 것으로서, 다만 그슬리는 방법이 적어서 회색으로 구워냈다. 대부분이 녹로 제조로 다소 후상(厚狀)으로 만들어졌으며 기형에 당당(堂堂)하고 힘찬 데가 있다. 일용(日用)하는 용기(用器)는 밧줄무늬의 타문(打紋)이 있는 것이 많고 점토의 끈을 붙여서 장식으로 보이게 한 것과, 특히 공들여 만든 것에는 동기(銅器)를 그대로 본따 뇌문(雷紋)과 도철문을 새겨 넣은 것도 있다. 그러한 제기적(祭器的)인 것 중에는 흑도도 있고 또한 순백(純白)의 도토(陶土)를 사용한 '백도(白陶)'도 있다. 백도는 은(殷)의 토기를 대표하는 것이라 하며, 후상으로 만들어진 소지(素地)를 예리하게 파고 새겨서 동기와 같은 복잡한 무늬를 나타낸 것이 있어 왕자(王者)의 토기라고 불리기에 알맞은 격조 높은 것이다.

회유도 편집

灰釉陶 은대(殷代)의 토기 중에는 고온도(高溫度)의 유약(釉藥), 소위 회유(灰釉)를 의식적으로 입힌 도기가 있고 그것은 처음 딱딱하게 구어 나가는 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자연유(自然釉)가 단서였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가마 속의 재(灰)가 덮어 씌워져서 고온으로 소지(素地)의 규산(硅酸)과 녹아 엉겨서 유리질을 생기게 하는 현상이다. 이 자연유의 효과에 주목하여, 회(灰)를 물에 녹인 것을 기면(器面)에 바르고 또는 회와 진흙을 섞은 것을 기면에 칠해서, 반들반들한 유리질로 도기를 싼 것을 회유도(灰釉陶)라고 부르는 것이다. 은대에 시작된 이 회유도야말로 후일의 청자(靑磁)의 선구로서, 중국의 도자사(陶磁史)는 여기에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은대(殷代) 토기의 작풍(作風)은 서주(西周)에서 춘추전국, 다시 한대 이후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나 토기의 기술적인 발전은 은주(殷周)시대에 정점에까지 도달하고 그 후는 양식의 변화에만 머물고 있다. 다만 전국시대에는 가마(窯)의 용량이 매우 거대해져서, 생산기구(生産機構)의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회유도(灰釉陶)의 허난성(河南省)·안후이성(安徽省)·장쑤성(江蘇省)·저장성(浙江省) 등에서 발견된 유례(遺例)에는 동기(銅器)를 모방한 기형(器形)에 담록색(淡綠色)·황록색(黃綠色)의 회유(灰釉)가 매끄럽게 칠해 있는 것이 있다. 개중에는 비교적 흰색의 소지(素地)에 투명하고 누르스름한 회유가 칠해진 것도 있어, 이것은 백자(白磁)의 선구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한대(漢代)에는 자연유(自然釉)의 도기는 셀 수 없이 많으나 회유도는 극히 소수의 것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녹유·갈유 편집

綠釉·褐釉 전국시대에는 전혀 새로운 유법(釉法)이 중국에 생겼다. 이것은 납(鉛)을 사용하며, 낮은 온도에서 녹는 유약(釉藥), 소위 연유(鉛釉)를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는 동분(銅分)을 가한 녹유(綠釉), 철분(鐵分)을 가한 갈유(褐釉)의 2종에 한정되고 한(漢)시대에는 명기(明器)에 자주 이용되었으나, 전국시대의 유례도 적으나마 남아 있고 해서 그 출현의 시기가 문제시되고 있다. 초기의 유례로서는 흙의 소지(素地)를 유리로 덮은 잠자리구슬류(類)가 열거된다. 연유는 서아시아로부터 배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었으나, 도리어 중국에 오래된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근년에는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창시(創始)된 것이 아닌가 주장되기에 이르렀다. 7∼8천도(度)에서 녹는 연유는 회유에 비해 그 제조가 용이하기 때문에, 한대(漢代)에 들어서는 중국 각지에서 대량으로 제작된 듯하다. 한대의 녹유(綠釉)·갈유(褐釉)의 유례는 묘(墓)속에 넣는 명기(明器)가 그 대부분으로서, 지중(地中)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녹유의 유면(釉面)이 변화하여 은색의 피막(皮膜)이 생겨 있는 수가 많으며, 그것이 무지개 모양으로 번쩍번쩍 빛나 참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이 현상을 은화(銀化)라고 부르며 한의 녹유가 인기가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한대의 도기는 일반적으로 실용적인 기형(器形), 간소한 장식문(裝飾紋)이 특징으로서 은주(殷周)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연유의 보급에 의해 유법도 현저한 발달을 보았다.

삼국·육조시대 편집

고월자 편집

古越磁 한말(漢末)의 동란시대(動亂時代)에서 3국시대(三國時代)에 걸쳐 회유도의 기법은 양쯔강(長江) 하류역(下流域)에서 성숙되어, 소위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청자(靑磁=古越磁)가 등장하였다. 이는 회(灰)에 장석(長石)과 같은 규산분(硅酸分)이 있는 것을 가하여, 안정된 고온의 유약(釉藥)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유약에 내포되는 미량(微量)의 철분에 의해 청록색의 색조가 생긴다. 유약은 두께도 두껍고 매끄럽게 녹아 있어, 아름다운 점에서도 회유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자기(磁器)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청자 가운데서, 연대(年代)가 명확한 최고(最高)의 작품례는 3세기 중엽경의 것으로서, 대충 그 무렵에 기법(技法)의 완성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의 오(吳)·진(晋)시대의 것은, 한의 동기(銅器)나 도기(陶器)에 보이던 웅혼(雄渾)한 작풍이 그대로 전하고 있어, 후의 것보다 어딘가 강하고 격렬한 기분을 준다. 대부분의 유품은 명기적(明器的)인 것으로서, 특히 두드러진 기형(器形)으로는 항아리 상부에 누각(樓閣)이나 인물을 가득히 장식한 신정(神亭)이라 불리는 항아리와 항아리 어깨 부분에 닭의 머리를 장치한 천계호(天鷄壺)라고 부르는 수주형(水注形)의 용기와 동물모양을 형용한 호자(虎子)라고 불리는 물병 등이 있고 또한 인물이나 동물의 모양을 형용한 용(俑)의 종류도 적지 않다. 요지(窯址)는 장쑤성(江蘇省) 이싱(宜興) 부근과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 및 사오싱(紹興) 부근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 초기의 것에 대해서 남조(南朝) 5∼6세기의 고월주요(古越州窯)에서는 한풍(漢風)의 딱딱한 기분이 약해져, 기형(器形)에서 유연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많아진다. 기종(器種)도 명기적(明器的)인 신정(神亭)·천계호(天鷄壺)·용(俑) 등이 눈에 띄지 않게 되고, 실용적인 공기나 접시 등이 많아졌다. 기법의 관점에서는 오진(吳晋)의 것과 대차(大差)가 없으나 유조(釉調)에 농담의 변화가 보이며 산화(酸化)하여 누렇게 된 예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제작지(制作地)도 넓어져 저장(浙江)·푸젠(福建)·광둥(廣東)의 각성(各省)에서, 후난(湖南)·쓰촨(四川)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지(窯址)가 발견되고 있다.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제품 중에는 청자 외에 검은 유약이 칠해진 도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후일에 천목(天目)이라 불리는 흑유자(黑釉磁)의 조형(祖型)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소지(素地)가 꽤나 희고, 청자유(靑磁釉)의 푸른 기(氣)가 엷은 백자에 가까운 것도 간혹 있어서 이는 백자(白磁)의 조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방(北方)에서는 불교문화의 화려한 개화(開花)를 볼 수 있었던 북위시대(北魏時代)에도 도기(陶器) 분야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고, 한대(漢代) 작풍을 답습하여 약간 채색(彩色)을 가한 명기(明器)류에 조소적(彫塑的)인 아름다움이 엿보이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북조(北朝) 중엽을 지나 6세기가 되자 명백히 화북산(華北産)이라고 생각되는 청자가 점차 많이 등장하였다. 북조 후기(北朝後期)의 화북(華北)의 자기(磁器)에 관해서 본다면 그것들은 남방(南方) 자기(磁器)의 영향하에 생겨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더욱이 일단 출현하게 된 그런 자기는 놀랄 만큼 신속하게 성장하여, 화북의 독특한 작풍을 만들어 낸 듯하다. 북조말(北朝末) 수대(隋代)의 유적(遺跡)으로부터 출토되는 수가 많은 백자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청자에도 남방에서는 볼 수 없는 웅장한 기형(器形)·작조(作調)의 유례가 있다. 이러한 북방(北方)의 자기는 남방 것에 비하면 일반적으로 두툼하며 소박하고 힘찬 감(感)을 갖게 하는 것이 많은데 드물게는 세련된 서방적(西方的)인 의장을 갖는 유례가 있어서, 당대(唐代)의 그러한 의장(意匠)의 선구적인 것으로서 특별히 주목을 끈다. 이와 같이 6세기의 중국에서는 넓은 지역에 도자기가 제작되게끔 되어 있어서 당송(唐宋)의 도자기의 눈부신 전개의 기반이 이때에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당시대 편집

당의 도자기 편집

唐-陶磁器 당시대는 중국사(中國史) 중에서 주목할 만한 고양(高揚)의 시대이었는데 이 사실은 도자기에 관해서도 해당되는 말이다. 당의 도자기는 일반적으로 동체가 여유 있게 퍼져 있으며 바닥이 평평하고 커서 안정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흙의 유연성이 조형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 특색으로 둥근 항아리(丸壺) 등에 있어서의 몹시 둥근 성격은 다른 데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서 내용의 풍요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마치 초당(初唐)·성당(盛唐)의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왕성한 의기(意氣)를 나타내는 것 같다. 당대(唐代)에는 각종 자기가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백자(白磁)의 대두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허난성(河南省)에서 백자를 조공(調貢)한 기록도 있으나 8∼9세기경에는 허베이(河北省)의 형주요(邢州窯)의 백자가 가장 유명하며 거의 같은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단계(端溪)의 벼루(硯)와 더불어 천하귀천(天下貴賤) 없이 이를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형주요의 백자는 아직껏 그 실체를 확정할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소지(素地)가 딱딱하게 구워져 있고 또한 눈(雪)처럼 보드라운 느낌을 주는 흰 살갗을 갖는 백자라고 하며 이것에 해당하는 유품은 상당히 많은 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남방(南方)의 광저우 방면과 장시성(江西省)의 경덕진요(景德眞窯)와 쓰촨성 등지에서도 백자를 구웠다고 하며 허베이성(河北省) 정요(定窯)의 기원도 당대(唐代)라고 전해진다. 남방의 백자는 광둥항(廣東港)에서 해외로 반출된 듯하며 서아시아 각지에서 출토되는 일이 많다. 청자(靑磁)는 월주요(越州窯)의 청자가 유명하다. 중당(中唐)의 시인 육우(陸羽)는 그의 저서 <다경(茶經)> 중에서 형주(邢州)의 백자와 월주(越州)의 청자를 비교하여 "혹자(或者)는 형주를 웨저우(越州)의 상위에 놓는다면 그것은 천부당한 일이라 할 것이다. 만일 형자(邢瓷)를 은(銀)에 비한다면 월자(越瓷)는 구슬에 비유되는데 이것이 형과 월이 다른 첫째 점이며, 만일 형자를 눈(雪)에 비긴다면 월자는 얼음에 비길 수 있어 이것이 형·월의 둘째번 차이점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이 글은 월주요청자(越州窯靑磁)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말로서 예부터 유명하다. 당(唐)의 월주요청자는 그 전신(前身)인 남조(南朝)의 고월주요(古越州窯)의 청자에 비하면 훨씬 진보된 정교한 것으로 유약은 맑은 느낌이 강해서 청자다운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다. 당말(唐末)에는 유하(釉下)에 아름다운 모조(毛彫)나 투조(透彫)를 가한 것이 등장하였다. 제작지는 저장성(浙江省) 동북부에서 여러 곳 발견되고 있고, 위야오현(余姚縣) 상림호반 (上林湖畔)의 요지군 (窯址郡)은 유명하다. 제품은 해외로 자주 반출되어 한국·동남아시아·인도·이란·이집트에서까지 도편(陶片)의 출토를 볼 수 있다. 그 밖에 후난성(湖南省)의 악주요(岳州窯), 안후이성(安徽省)의 수주요(壽州窯) 등, 당대(唐代)에 청자를 구웠던 요(窯)는 여러 가지가 있다. 흑자(黑磁)도 화북(華北)·화남(華南)의 각지(各地)에서 제작되었던 듯한데 요지(窯址)는 허난성(河南省)에 있는 것이 알려져 있다. 당말에는 칠흑(漆黑)의 유약이 칠해진 유례(遺例)와 함께 이에 청백색의 불투명한 유약을 칠한 독특한 흑유자(黑釉磁)가 만들어졌다.

당삼채 편집

唐三彩 한대(漢代) 이래 무덤에 넣는 명기류(明器類)에는 무유(無釉)의 회도(灰陶)에다 채색(彩色)을 가한 것이 주로 사용되어 왔으나 당(唐)시대에 녹색(綠色)·갈(褐)·백(白)·황(黃)·남(藍) 등 저온도의 유약으로 명기(明器)를 채색하는 것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당삼채(唐三彩)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후장(厚葬)의 풍속과 더불어 발달한 연질(軟質)의 도자기로서 실용성은 적은 것이다. 그의 유례를 살펴보면 당시의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엿볼 수가 있으며 또한 당시 서방제국(西方諸國)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서방문물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어 참으로 흥미를 끄는 바이다. 복잡한 고도(高度)의 기법이 고안되어 있어서 이 시대에 처음으로 저온도유(低溫度釉)가 눈부신 발달을 이룬 것을 알 수가 있다. 당삼채는 장안(長安)·뤄양(洛陽) 부근에서만 제작된 모양으로 제작시기도 700년 전후에서 약 50년간에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성당(盛唐) 귀족문화의 융성에 따라 나타났다. 쇠퇴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영향은 지극히 큰 것으로 발해(渤海)의 삼채(三彩), 통일신라·고려·요(遼)·금(金)의 삼채(三彩) 등은 모두 당삼채에 자극되거나 직접 그 기법을 배워서 생겨난 것이다.

송시대 편집

송의 도자기 편집

宋-陶磁器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중국의 도자기는 크게 변하였다. 그것은 혼연(渾然)하면서도 커다란 기형(器形)으로부터 부분적 특색을 살린 단정한 기형으로의 변화로서 파악되며, 또는 따스하고 유연한 기분에서 긴장되고 예리한 기분으로의 변화로 감취(感取)되는 것이다. 문양(紋樣)에 관해서 말한다면 당대(唐代)에는 조각풍(彫刻風)의 각문(刻紋)이나 침첨문양(砧添紋樣)이 두드러진 것이었는데 송대(宋代)에는 편각(片刻), 선각(線刻)과 같이 예리하고 얕게 파서 흐르는 듯한 아름다운 문양(紋樣)을 나타낸 것이 많아진다. 생산지도 급속하게 확대되고 각기 작풍의 특징이 유난해서 세련되고 아름다운 도자기가 만들어지게끔 되었다. 소위 송자(宋磁)의 황금시대였다. 우선 당대에 가장 유명했던 웨저우요(越州窯)에서는 5대 오월왕전씨(五代吳越王錢氏)의 치하(治下)에서 더욱 당풍(唐風)이 강한 청자가 양산(量産)되었으나 작풍은 점차 예리하고 섬세해져, 마침내 용천요(龍泉窯)의 청자로 이행해 갔다. 화북(華北)에서는 형주요(邢州窯)를 계승하여 정요(定窯)의 백자가 두각을 나타내었다. 정요의 제품은 정교한 크림색의 백자로서 송대궁중(宋代宮中)의 어용품(御用品)이 되었다고 말하며, 그 유려한 각문양(刻紋樣)은 타에 그 유례(類例)를 찾아볼 수 없다. 또 더러는 시유(枾釉)나 흑유(黑釉)를 바른 것도 있고, 금박(金箔)을 구워 입힌 금화(金花)의 정완(定碗)이라 불리는 것도, 극히 적으나마 있기는 있어서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 남방에서도 화남일대(華南一帶)에서 아름다운 백자가 제작되었다. 이것은 푸른빛을 띤 '영청(影靑)'이라 불리는 백자(靑白磁)로, 극히 얄팍하고 예리하고 엄격한 작조(作調)에 그 특색이 있다. 순백(純白)의 기면(器面)에 새겨진 문양(紋樣)에 푸르스름한 맑은 유약이 괴어 있어, 한가닥 경쾌한 의장(意匠)이 등장하였다. 정요(定窯)의 백자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징더전(景德鎭)의 영청(影靑)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한다. 각문양(刻紋樣)이 있는 청자가 송대에 화북 각지(華北各地)에서 만들어졌다. 소위 북방청자(北方靑磁)로서, 올리브색의 유약 중에 편각(片刻)의 당초문양(唐草紋樣)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 예리한 작조(作調)는 산시성(陜西省)의 요주요(耀州窯)에서 대표적인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후일 압형(押型) 수법(手法)에 의해 양산(量産)을 가능케 한 듯하며, 각지에서 동종(同種)의 의장(意匠)을 가진 것을 볼 수가 있다. 화북의 츠저우요(磁州窯)에 있어서는 각문양(刻紋樣)으로부터 진일보하여 독특한 소락문양(搔落紋樣)과 철화문양(鐵畵紋樣)이 발달하였다. 이는 원래 백자(白磁)를 모방한 것으로서, 쥐색(鼠色)의 소지에 백토(白土)를 녹여 칠하고 투명유를 발라 구워내는 수법의 것인데 유하에 각문양을 베풀면 백토가 떨어져 나가 쥐색의 바탕이 드러나 보인다. 이를 의식적으로 행하여 백색과 쥐색으로 문양(紋樣)을 나타내는 것이 소락문양의 기본이다. 이를 다시 강조하여, 백토 위에 철물감을 일면(一面)에 흘러 칠하고 그것을 소락(搔落)시켜 백(白)과 흑(黑)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것이 있으며, 또한 백지 위에 철물감으로 자유롭게 문양을 그리는 일이 행해졌다. 이렇게 하여 백지(白地)에 뚜렷이 칠흑(漆黑)의 문양을 나타낸 것이 츠저우요(磁州窯)의 독특한 수법으로, 그 정연(整然)한 기형(器形)과 더불어 송자(宋磁)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산지(産地)는 허베이(河北)·허난(河南) 일대에서 발견되며, 민간(民間)의 일용품으로서 널리 보급되었다. 저장성(浙江省)의 용천요(龍泉窯)에서는, 북송대(北宋代) 이후 점차로 독특하고 아름다운 유색(釉色)의 청자가 성장하였다. 그것은 벽옥(碧玉)보다도 아름다운 밝고 맑은 청록색으로서 한(漢)·6조(六朝) 이래의 회유(灰釉)의 흐름이 여기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13∼14세기경에는 그 생산량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동아시아 일대(一帶)는 물론이고 남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는 많이 반출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특히 궁정의 어용품(御用品)으로 만들어진 관요(官窯)의 청자(靑磁)이다. 이것은 휘종 황제 때 수도(首都) 변경 부근에 설치된 북송관요가 그 최초의 것이라 전해지고 있는데 그 유품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1127년, 여진인(女眞人)의 침략을 피해서 항저우(杭州)로 옮긴 후에 항저우 교외(杭州郊外)에 관요가 설치되어 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소위 남송관요가 이에 해당된다. 수내사요(修內司窯)·교단요(郊壇窯)라고 불리는 두 종류의 요(窯)가 있었으나 이 두 가지가 모두 침청자(砧靑磁)와 닮아 있고, 더욱 정묘전아(精妙典雅)한 청자를 구웠다. 이것은 송대(宋代)의 귀족들의 세련된 취미에 가장 잘 알맞는 것으로서, 송자(宋磁)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송대의 도자기로서는 당시 유행했던 말다음용(抹茶飮用)의 풍조에 따라 만들어진, 독특한 흑유의 공기(碗)를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은 다(茶)산지로도 알려진 푸젠성(福建省) 북부의 젠야오(建窯)의 찻잔, 소위 건잔(建盞)이다. 그것은 칠흑의 광택이 있는 유약이 두껍게 발라진 짜임새 있는 모양의 공기(碗)로, 유면(釉面)에 갖가지 변화를 보이는 것이 있다. 은색의 세로 줄무늬가 전면에 나타나 있는 토호잔(兎毫盞=禾天目), 수면에 기름방울이 떠 있는 듯한 은색의 작은 반문(斑紋)이 보이는 유적천목(油滴天目), 또는 무지개와 같이 빛나는 결정군(結晶群)이 유적(油滴)과 함께 나타나 보이는 요변천목(曜變天目) 등, 그 어느 것이나 인공(人工)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정취이다. 이런 것은 가마(窯) 속에서 우연히 생긴 현상으로서 소위 요변(窯變)인데 역시 송자(宋磁)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또한 장시성(江西省)의 길주요(吉州窯)에서도 젠야오(建窯)와 닮은 천목(天目) 찻잔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서는 이중(二重) 입히기 수법에 의해서 문양(紋樣)을 만든 대피잔(玳皮盞)이라고 불리는 것이 특징적인 것이다. 또 목엽천목(木葉天目)이라 불리는 나뭇잎(木葉)을 응용한 것도 진귀한 의장의 천목 찻잔으로서 알려져 있다. 당시 송대의 도

원·명·청시대 편집

원·명·청의 도자기 편집

元·明·淸-陶磁器 14세기경 원시대(元時代)에 이르면, 도자기에 있어서 당송(唐宋)의 변화보다도 더욱 큰 근본적인 변동이 엿보인다. 기형에 관해서 본다면, 그것은 예리한 이상적인 형태에서 안정된 실용적인 형태로 변화를 일으켰다. 기면 장식(器面裝飾)에서도 단일(單一)한 유약을 쓴 자기(磁器)에서 백자 기면(器面)을 청색과 적색의 문양(紋樣)으로 장식한 청화(靑花=靑畵白磁)·오채(五彩=赤畵)의 유행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백자요(白磁窯)로서 두각을 나타낸 정더전요(景德鎭窯)가 원대(元代)에 급격하게 성장하여 그 번영으로써 다른 요(窯)는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징더전의 소장(消長)은 그대로 중국 제도(製陶)의 성쇠와 더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청화(靑花)의 수법은 백자 유하(釉下)에 코발트 안료로 문양을 그리는 단순한 것으로서 환원염소성(歡元焰燒成)에 의해서 백지(白地)에 아름다운 청색의 문양이 나타난다. 그것은 음식기(飮食器)에 알맞는 청결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두고 두고 세계에 보급되어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혹시 서방(西方) 이슬람권(圈)으로부터 수입된 기법이 아닌가 말해지고 있다. 또 원(元)의 청화(靑花)는 짙은 청색으로 복잡한 문양을 나타낸 것이 많고 역감(力感)에 충만되어 있어, 청화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진중되고 있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청화의 수법은 더한층 세련되어, 영락(永樂)·선덕(宣德) 때에는 백옥(白玉)과 같은 아름다운 도면(陶面)에 깊이 있는 청색문양을 나타낸 정묘(精妙)한 청화가 만들어졌다. 성화년간(成化年間)에는 엷은 색조의 청화가 유행되었다고 하는데, 가정년간(嘉靖年間)에는 새로이 서방에서 수입된 회청(回靑)'이라 불리는 코발트를 사용한 화려한 청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만력(萬歷) 이후, 작풍(作風)은 거칠어져 고청화(古靑畵) 남경청화(南京靑畵) 등의 조제(粗製)된 청화가 양산(量産)되었다. 청조에는 관요(官窯)에서 정치(精緻)한 의장의 청화가 제작되었으나 그 색조(色調)는 차고 딱딱하여 옛날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원말(元末)·명초(明初)경, 백자의 기면(器面)에 적(赤)·녹(綠)·황(黃)색 등의 덧그림 물감으로 문양을 구워낸 오채(五彩=赤畵)가 등장하여 점차 성장해 갔다. 그리고 이것은 명대(明代) 중기(中期)에 이르러 완성되어, 청화를 제치고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의 오채(五彩)는 농려(濃麗)한 채색이 전면적으로 베풀어져, 개중에는 금채(金彩)를 가하여 '금란수(金瀾手)'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 금란수의 최성기(最盛期)는 가정년간(嘉靖年間)이라고 하지만, 오채의 최성기도 거의 동시기(同時期)로서 만력년간(萬歷年間)에 이르면 난숙(爛熟)의 극(極)에서 퇴폐로 기울어 마침내 명말(明末)에는 분방조잡(奔放粗雜)한 오채가 양산(量産)되기에 이르렀다. 청시대(淸時代)의 도자기는 징더전(景德鎭)에 설치된 관요, 즉 어기창(御器廠)의 제품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모든 점에서 정치(精緻)를 다한 것으로 기술적인 점에서는 극치라 할 만큼 정교한 것인데 특히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乾隆) 3대(代)의 어기창 제품은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강희년간(康熙年間)에는 청화(靑花)·오채(五彩)가 가장 뛰어난 것이며, 또 '낭요(朗窯)'라 불리는 동정색(銅呈色)의 홍유자(紅釉磁)가 특징적이다. 옹정년간에는 오채의 일종으로 담색조(淡色調)를 살린 두채(豆彩)가 존중되고, 불투명한 덧그림 물감으로 치밀한 문양을 나타낸 '분채(粉彩)'가 크게 발달하였다. 보통 고월헌(古月軒)이라 부르는 분채는 옹정(雍正)에서 건륭년간(乾隆年間)에 걸쳐 제작된 기교의 극(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분채(粉彩)로서 일종의 전아(典雅)한 풍취(風趣)가 있어 진품(珍品) 취급을 받고 있다. 건륭년간에는 전면을 도화용(陶畵用) 물감으로 담뿍 칠한 협채(夾彩)라 불리는 일종의 분채(粉彩)가 출현하였고, 청자나백자 등으로 옛 송(宋)·명(明)의 작풍을 모방하는 일도 성행되었다. 이 동안에 새로운 갖가지의 유법(釉法)이 개발되어 기법상으로는 도예의 정점에 달한 듯이 보였으나 기술의 편중(偏重)은 결국 목죽(木竹)·금속·칠기(漆器) 등까지 도자기를 모방케 하는 그러한 그릇된 방향으로 진전되어, 소위 공예(工藝)의 정도(正道)를 일탈한 퇴폐(頹廢)로 전락되어 갔다. 청말(淸末)의 동란(動亂)시대에 징더전은 크게 타격을 입어 그후 오랫동안 재기하지 못하였다.

현 대 편집

현대 중국의 공예 편집

現代 中國-工藝 현대 중국의 공예는 편의상 19세기 후반, 즉 청말(淸末)부터 1960년대까지의 100년간을 살펴보는 것으로 했다. 중국의 공예는 역대왕조(歷代王朝)의 특별한 관심과 장려·숭상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예를 들면 은대(殷代)에는 이, 주대(周代)에는 정(鼎), 진대(秦代)에는 동경(銅鏡), 초대(楚代)에는 칠기(漆器), 한대(漢代)에는 옥기(玉器), 수당대(隋唐代)에는 조각(彫刻), 송대(宋代)에는 자기(瓷器), 명청대(明淸代)에는 자수(刺繡) 등이 대표적 공예품이라 하겠다. 그런데 현대는 서양제국주의 열강(列强)의 침략, 중화민국의 건국과 내란(內亂), 일본의 침략, 국공내전(國共內戰), 중화민국의 대만(台灣)으로의 철수,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등으로 중국의 모든 질서는 무너져 문화대국이었던 중국은 병든 사자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만 시대였다. 물론 중국의 질서는 40∼50년대부터 회복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공예도 복고와 새로운 창조라는 2원(二元)시대를 맞게 되었다. 중국의 공예품은 그 모습(形制)·빛깔(色彩)·무늬(紋飾)에서 3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돈후(敦厚)하면서 주적색(朱赤色)을 많이 쓰며, 다양한 변화미를 추구하는 것이 중국공예품의 특성이다. 현대의 공예품은 이러한 전통적인 중국공예의 특성과 외국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양식과의 마찰·갈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과거 100년간의 중국공예품, 특히 자기·칠기·옥기 등의 공예품은 전통적인 기법의 타락과 값싼 상품화(商品化)로 인해 생기를 잃고 저질화(低質化)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 초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대만(台灣)이 자리를 굳히게 된 중화민국 정부는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통공예의 부흥과 전승(傳承)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그 첫번째 사업으로 타이베이(台北)에 수공업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공예연습소를 두었다. 그러면서 죽·목·금(竹·木·金)의 공예품과 편직품(編織品)에 관한 각종 실험과 연구를 활발히 하고, 전문기술자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또 질이 좋은 대리석이 많이 나는 화롄(花蓮)에서는 석공예품(石工藝品)을 양산하여 수출까지 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 대만의 3대 수출공예품은 죽·석·목(竹·石·木)공예품이라 하겠다. 1949년 10월 베이징(北京)에 5성홍기(五星紅旗)를 올린 중국(中國)도 전통공예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본토에서의 전통문예부흥운동은 각종 공예연구소와 베이징(北京)·톈진(天津)·상하이(上海)·항저우(抗州)·광저우(廣州) 등지에 있는 미술학원(미술대학)이 중심이 되었다. 공예연구소와 미술학원에서는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한 공예가들이 견습생과 학생들에게 전통공예의 비법을 가르쳤으며, 젊은이들은 개인기(個人技)도 익혔지만 집체제작(集體制作:공동제작)에 힘썼다. 중국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공장을 재건하고 새로운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재건된 징더전 도자창(景德鎭陶瓷廠)과 신설된 베이징 옥기창(北京玉器廠) 등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한(漢)나라 때부터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옥(玉)공예품은 현재 베이징·톈진·상하이·광저우·양저우(揚州)·진저우(錦州) 등지에서 수만 명의 기술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이러한 전통공예품은 세계 각지에 있는 중국특산물 판매센터에서 팔리고 있다. 지금 중국이 대량생산하고 있는 공예품은 대부분이 전통적인 의장(意匠)을 지키고 있지만 도구의 기계화와 많은 재료의 현대화로 미학상(美學上)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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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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