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Cwt96/지리학의 역사 (일본어)

'지리학의 역사 '는 지리학 발전의 역사이다.

지리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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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의 근본적인 발상은 "남의 토지는 어떻게되어있는가?"이다. 이 요구는 이미 인류가 아직 문명의 상황에서 벗어나 때 필연적으로 발생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글로써 확인할 수있는 지리학의 발상지는 고대 그리스이다. 지리학의 명칭인 geo (토지) graphia (표시)는 에라토스테네스 등 당시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의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이것도 그런 다른 지역을 연구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였다. 지리학은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동등한 인류 최고의 학문이었다.

고대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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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써 확인 가능한 첫번째 지리학자는 호머이다. 호머는 뛰어난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먼 지역의 모습과 바다의 모습 등 우수한 문학적인 감각으로 가지고 표현하고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에서 본 해석이며, 호머 자신은 어디까지나 시를 지은 것이었고, 지리학자로서의 자각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처음 지리학자으로서의 자각을 갖게 된 것은 밀레 토스의 헤카타이오스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세계관 연구에 큰 관심을 보이고, 아마 그리스 시대 최초의 지리서 "뻬리에게시스"을 보여, 세계지도를 그리고 지구는 둥글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리학의 아버지 으로 간주되고있다. 그 제자인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지리학에 대한 업적을 남겼다. 멀리 다른 나라의 모습을 설명했다. 그의 설명은 이집트에서 바빌로니아까지 모습이 나와있어 당시의 그리스로 보면 헤로도도스 묘사는 역사서이기도하지만, 중요한 설명서이고 지리학적인 업적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학의 흐름은 지금은지지학과 불리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학을 생각하면 또 다른 원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지형이나 바다 혹은 지구 자체를 보는 자연 과학 (지구과학)으로 지리학이다. 이 원류도 같은 고대 그리스에서 번성이다. 현재는 일반 지리학라고되어 있지만 원류이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지리학이 번성했을 때부터,이 두 가지 흐름 (지지학과 일반 지리학)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에은 주시할 필요가있다. 왜냐하면이 두 흐름이 오랫동안 서로 영향을받지 않고 발전되어 왔지만,이 두 가지 흐름을 하나로 융합하려고했을 때, 즉 그 지역의 모습 (지지 학)과 기후와 지형 자연 환​​경 (일반 지리학) 서로 인과 관계가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 이때야말로 현재 우리가 접하고있는 현대 과학으로서의 지리학이 탄생했을 때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위업에 도달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폰 훔볼트 | Humboldt와 칼 리터 | 리터라고 두 사람의 지리학자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19 세기 초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아래 참조)

이 지구 과학으로서의 지리학의 원류는 탈레스 | 타레스 등으로 대표되는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 들이었다. 이미 이때부터 지구의 크기와 우주에서의 지구의 위치라고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지구가 구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물론, 지리학이 아닌 현대에서 말하는 천문학과 지구 물리학의 원류이기도하지만, 학문이 미분화이던 시절, 그들의 업적은 후에 지리학에도 계승되어가는 것이기도했다.


만 학의 선조인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출현이나, 당시로서는 놀라운 정확한 값은 지구의 크기를 측정한 에라 토 스테 네스 등이 출현했을 무렵 (전 3 ~ 2 세기)에는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더욱 넓어 해양과 기후, 하천의 기원과 홍수 문제 등에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관심의 확대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에 의한 것이 크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을 그들의 세계관 멀리 인도에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도 실제 관측과 실험이 모두 부족하고 (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실행하는 기술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상의 부분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으며, 정확도에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모르는 땅에 추측은 피하고 안정 알려져있는 지역에 대해 정확한 묘사를 시도하도록 지리학자들은되어 갔다. 이것은 다음의 고대 로마 시대가되고 나서 더 저명하게되었다.

고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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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지리학은 스토라본, 쿠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 | 프톨레마이오스로 대표된다. 고대 로마 시대는 고대 그리스보다 더 정확하고 과학적으로 지리학을하는 자세를 볼 수있게된다. 스토라본 지리지를 보여주고 민족의 이동과 사회 제도에 계정을 남겨두고 프톨레마이오스, 당시의 수학과 천문학의 성과를 최대한으로 살려 각국의 지리적인 위치 파악에 큰 공적을 남겼다. 그들이 남긴 업적은 이후 중세까지 영향을 남기게되었다.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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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 Hereford Mappa Mundi 1300.jpg | thumb | TO 그림보기. (1300 년경 그림) 이스라엘이 중심이 그려져있다. 중세 유럽은 지리학에 많은 학문과 마찬가지로 암흑의 시대 였다고 할 수있다. 한때 그리스 사람이 생각하고 있던 것 같은 천체의 지구는 부정되고 기독교의 발상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지도가 (TO 그림) 그려하기도했다. 중세 봐야 업적을 남긴 것은 많은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유럽 문명이 아니라 이슬람 문명 하에서이다. 이슬람 동안 이븐 바투타 같은 대형 여행가가 나오고, 동부 아프리카에서 남부 러시아, 심지어 중국까지 세계관을 확장했다. 그들 이슬람 학자가 남긴 객관적인 세계의 묘사는 이후 기독교 문화권에도 소개된이 시대에 공통적으로 말할 수있는 것은이 시대의 지리학적인 업적은 역사와 사회 제도 등의지지 계정 확대이며, 자연 과학에 의거한 일반 지리 확대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일반 지리 확대는 이후 르네상스까지 기다려야했다.

마르코 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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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전에 대 여행가 마르코 폴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르코 폴로는 아시아 각지를 순방하고 원래 (왕조) | 원나라에 오랫동안 모시고 "세계의 기술"을 남긴 역사상 뛰어난 인물이다. 이 작품은 유럽인 그때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아시아 관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그리는지도에도 진보가 인정되었다. 그저 학문의 이론적 기여는 적고, 지리학의 역사는이 큰 여행가의 업적은 유럽인의 세계관 확대라는 실적 밖에 남길 수 없다.

대항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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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는 그동안 오랫동안 정체되어 지리학도 발전의 조짐을주게되었다. 르네상스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있는 다음의 대항해 시대는 "지리적 대발견의 시대"라고도한다. 1492 ~ 1522 년에 걸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콜럼버스, 바스코 다 가마, 페르 디 난도 마젤란 | 마젤란 등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항해자들에 의해 당시 최첨단의 항해술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아시아의 제한된 곳에 밖에 알려져 있지 않은 유럽의 지식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 세계관의 극적인 확대는지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Mercator | Mercator 이름으로 잘 알려져있는 네덜란드의지도 학자 게라루두스 Mercator | 게르하르트 크레이머가이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 투영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 발명된 인쇄술은 그동안 귀족들의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지도 일반에의 보급도지도의 발전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이 인쇄술은 고대 로마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의 "지리서"의 보급에 중점을 두었다. 이 글을 통해 사람들은 수학적으로 즉 위도와 경도라는 것이 유용성을 인정 이것에주의를 기울여도, 지리적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노력했다. 이것도이 시대의 지리적 대발견을 밀어다고 할 수있다.

이 시대의 지리 서적이라고하면 Sebastian Munster "코스모구라휘아"(우주 잡지)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확대를 통해 가능 해졌다, 이름 그대로 온갖 지구와 우주를 포함하여 세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아직 天動説의 시대였다) 사람들의 관심을 지리학에 갈고 여러 버전을 거듭 정도의 성황이었다. 또한 지구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있게되고, 그때까지 유럽에는 믿을 수 있지 않은 열대의 존재도 포함되게 기후 구분을 시도도 행해지게되어 갔다.

뮌스터에 한정하지 않고, 이러한 지상과 우주와의 관계까지도 일괄적으로 고찰한 코스모구라휘적인 저작이이 시대의 지리 책의 특징이지만, 당시의 과학의 발달하지, 아직 확실히는 말할 수없는 세계에 대한 지식도 함께 곧 버전을 거듭하면, 이야기와 같은 과장을하게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가 그 긴 것은 사람의 지리에 대한 지식 향상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리상의 대발견"라고이 시대의 지리학도 지리적 시야의 확대와 위도 경도의 효과, 나아가 기후와 지형 파악했던 것이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인 지리 학적 입장에서 보자면 단순한 지역의 설명에 그치고있다 할 수있다. 왜냐하면 아직 지리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하는만큼 자연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항해 시대의 특징은 유럽인의 지리 지식의 확대에 마감, 지리학의 학문적 발전에별로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된다.

과학적 지리학의 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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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졌다 대항해 시대 유럽은 대폭적인 지리적인 지식이 얻은 것, 그것을 학문에서 밀어주는 단지의 과학 기술은 이후 17.18 세기까지 기다려야했다. 17 세기 이후, 자연 과학은 어느 때보 다도 크게 발전 하였다. 당시 코스모구라휘적인 저작권은 단순한지지의 기재에 그쳤고, 더욱이 과장부터 서서히 지표의 현상에있어서 하나님의 섭리 등 과학적인 자세에서 동떨어진 거도 함께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다.

과학이 발전하여 온 17 세기 이후 지상에서 전개되는 기상 및 지형 등 다양한 자연 현상은 결코 개인의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해명 이해될 수있는 것이며 지리학은 이러한 과학적 해명하는 학문을 목표로해야한다는 생각이 이루어지게되었다. 그 인물의 대표격은 네덜란드 사람 와레니우스이다. 그의 저작 "일반 지리학"은 이러한 이념하에 지리학 아래 해양학, 기후학이 오는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대부터 정체되어있는 일반 지리학 이론 구축이 다시 모색하도록했다. 그러나 와레니우스 사후 그의 아이디어를 잇는 것이 나타나지 않고, 지리학은 일시 주춤했다.

이 시대의 실적으로 뷔레부로루토 Snell | 스네리우스 의한 삼각 측량의 발명품들 수있다. 또한 학문의 세분화와 자연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시기이기도하다 (아이작 뉴턴 | 뉴톤이 나타난 것도이시기이다). 이러한 자연 과학의 발전과 그에 따른 측정 장비의 발전은 아래의 지리학 발전의 기초가되어 갔다.

한때 주춤했던 지리학의 역사를 달렸다는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이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지리학을 마련하고, "지리학은 거기에 산이 있고 거기에 강이있어 결코 하나님의 섭리 (신학) | 섭리로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해명되고 남은 것이 연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으로 지리학을 논하는 것은 적고,이 시대의 많은 지리 서가 모르는 땅 자연의 신비 현상을 흥미 위주로 자세히하고, 지리학은 무려 관계없는 토지 역사 및 정치 제도를 설명하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덜 정확도 아닌 고려 사항이되지도 있었다.

또한이 시대는 지질학 등 인접 분야에도 눈부신 발전을 볼 수 지리학에 영향을 준도 놓칠 수 없다. 이와 같이, 지리학이 근대 학문으로 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19 세기 Humboldt와 리터라는 인물의 출현을 기다려야한다. 또한, 지리학이 현대적인 모습이되는 것은, 현대에서 말하는 자연 지리학 분야에서이다. 인문 지리학 빛이당하는 것도, 19 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근대 지리학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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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보이는 지리학 내용의 대부분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 근대 지리학의 성립을 촉진 것은 고대부터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대항해 시대에 전 세계로 확대되는 세계관, 혹은 각지의 지리 지식과, 물리학 및 천문학, 수학 등 자연 과학의 발달과 그에 따른 관측 기기의 발달을들 수있다. 근대 이전에는지지와 같은 기술은 집적되어도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 파악하는 행위는 와레니우스 등이 그 비전적인 이론을 제시하고는 기술되지 않은 발육에서 그것이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리학은 현대에서 보면 지표 공간의 묘사가 그 목적이며, 그 이상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어려웠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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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하고 그때까지 자연을 포함한 단순한지지의 계정이 목적이었다 지리학 많은 과제와 견해를 제시한 사람이 독일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이다. 칼 리터와 더불어 19 세기에서 지리학의 제비를 키운 것은 독일이었다. Humboldt는 현재 전세계의 지리 학계에서 '근대 지리학의 아버지 '로서 그 업적이 칭송하고있다. (하지만 그는 첫번째로 자연 주의자이고, 탐험가이며, 지리학자로서의 얼굴이 결코 첫 자리가 아님을주의하기 바란다.) 그는 탐험가 박물학자 로 남미 다른 사람 외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과학자의 눈으로 상세하게 조사하고 그 모습을 설명했다. 90 년 생애 수많은 저작을 쓰고, 당시의 독일의 대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훔볼트, 지표에 관한 다양한 자연 현상을 결코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다양한 상호 관계로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했다. 즉 지리학자의 목적은 식물을 식물 학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한 지질을 지질 학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의 내적 연관을 볼 것이라고했다. 훔볼트 지리학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의 관찰 방법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치고 기후와 지형, 식생, 심지어 민족과 역사까지도 그 내적 연관에 의해 결합되어 있으며, 그 인과의 추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자했다. 이 인과의 추구야말로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볼 수있는 것이며, 그 추구 방법이기도하다 관찰 방법, 지형 단면과 등온선도, 기압 측정 방법 등 당시의 첨단 기술 을 구사한 방법을 보급했다. 따라서 각국의 차이를 비교 고찰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수있게했다. 즉, 훔볼트 각지의 사건의 인과 성의 추구라는 지역적인 관점에서 실적과 그것을 일반 법칙화하고, 그 법칙을 다양한 장소에 적용시켜 객관적인 관점에서 각 지역별로 비교 연구를 실시한다고 지표면 전체에 대한 공적 두 가지 큰 업적을 남긴 셈이다. 이는 고대 시대부터 별도로 발달한 지역 지리 부문과 일반 지리학 부문과 사이에 있었던 벽을 허물어졌다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현재 우리가 접하고있는 근대 지리학의 원리가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성과는 식물해라, 기후해라 그동안 단순한 무기 과학적인 지식의 엉망진창이던 것을 유기적인 연관의 것으로 바꾸었다. 또한 지형 단면과 등온선 그림의 원리는 현재의 지리학도 직접적으로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 이용되고있다.

이러한 기본 정신, 즉 사건의 내적 연관을 추구하는 자세는 현재 지리학에도 계승되고 있다고 할 수있다. 예를 들어, 지형을보고도 단순히 지형을 볼뿐만 아니라, 기후와 지질도 관심을 지형을 성립시키고있는 인과을 모색한다는 것이 지리학의 입장에서, 그래서 지형 이외에도 기후 과 지질 등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지형의 물리적인 営力 주목로 오로지 그 메커니즘을 탐구 지구과학 자세는이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있다. (하지만 현재의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세계에서는 실제적인 학술 성과를 올릴에는 차이는 거의 볼 수 없게되었다. 예를 들면 지형 분야에서 지리학자도 지질학의 영역에 대한 관심 이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훔볼트 박물학자인 탐험가이며, 자신 지리학자라는 자각은 비교적 희박했다고 말하고있다. Humboldt를 "근대 지리학의 아버지"로 원단은 후년 지리 역사가들은 성과이다, 어쨌든, 지리학의 역사에서 훔볼트 정도 평가되고있는 인물은 또 없습니다.

칼 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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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지리학자로서의 자각이 컸다는 Humboldt보다 칼 리터 쪽 것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설립된 훔볼트 대학 베를린 | 베를린 대학 지리학 강좌 (강의가 아닌 전문 사람으로 지리학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담당하고 세계 최초로 설립된 지리학 학술 단체 "베를린 지리학 협회"의 초대 회장을 죽자까지 맡아 학문으로서 지리학의 정비에 노력했다. 그는 Humboldt에 영향을하면서도, 그의 자연 지리학에 특히 인문 지리학 방면의 설립에 힘썼다. 각지의지지를 비교 고찰하고, 철저한 자료 수집과 수수께끼는 단순한 표면적인지지의 엉망진창이었다지지 학의 분야를 과학적인 지리학의 한 분야로 높인 것은 리터 공적 이다. 또한 지리학의 영역을 대지에 한정하고, 대지와 인류와의 관계에 중점을두고, 그 관계 속에 "신의 손"을 인정, 철학적인 지리학 자세도 유명하며, 지표면과 인간 와의 관계를 목적론적인 태도에서 본 것도 리터의 태도임을 유념해야한다. 라는 것도,이 아이디어가 잠시 독일의 지리 학계의 기본 자세로 영향을 갔다 때문이다. 그 이전 베를린 지리학 협회의 설립에도 힘을 다해 개별 경향이었다 지리학자와 지리학의 성과의 연계 교류에 큰 공헌을 한 것도 중요하다.

또한이 시대, 경제학이나 사회학, 지질학과 기상학 등 인접 학문 분야도 다양한 선구자에 의해 근대화가 도모되고 시대이기도했다. 지리학도 그러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두 거인은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근접 학문 분야와의 연계를 실제로 꾀하는 두 학문 체계가 정비된 19 세기 후반된다.

19 세기 후반 ~ 20 세기 전반의 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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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년 현대 지리학의 확립에 노력했다 Humboldt와 리터의 두 거장이 잇따라 타계했다. 그들의 공적이 대지에 뿌리에 붙이는 것은 19 세기 후반까지 기다려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운 근대 지리학의 이론을 실천하는 데는 기술적 제도적 미숙이었다 때문이다. 이 시대는 다양한 계통 지리학의 발달 외에 세계 각국에 현대 지리학이 이입되었다는 것을 각국에서 지리학 학술 단체가 발달한 것을들 수있다. 모두 현재보고있는 지리학의 근본이되고있는 것이다.

이 시대, 지역의 교통망의 발달, 자본주의의 발달 등 전세계적으로 근대화가 진행된시기였다. (일본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것도이시기이다) 특히 교통망의 발달은 지리학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방면으로 왕래가 쉬워졌다 때문이다. 이시기에는 호주 대륙도 널리 알려져 그동안 신의 영역으로되어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내륙까지 탐구되고 현재 가지고있는 지리적인 인식과 거의 동일하게 된 것이다. (즉, 지구상의 모든 범위를 파악되었다) 또한이시기 식민지라는 이름으로 유럽 열강 제국이 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지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게있다. 이미 리터가 베를린 대학에서 지리학을 강구하고 있던 시절부터 군인을 상대로 사관 학교에서 지리학 강의도 실시되고 군사학의 한 분야로 관심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관점 따라서는지도의 독도와 지리 학적 지식의 습득은 적국의 모습을 파악하는 군사적인 중요한 수단이기도했기 때문이다. 이 자세는 제 차 세계 대전까지 일본도 예외는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보인 것이다. 특히 정치 지리학 내지 지정학이라는 분야에이 군사 침략적인 색상이 강했다. 특히 제 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나치의 이론의 정당화에이 분야가 이용되고, 전후 잠시이 두 분야는 일종의 금기가되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 세기 후반 독일에서 번성 근대 지리학의 물결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이입되었다. 훔볼트 자연 주의자 였기 때문에,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갔다는 식물학과 박물학 방면이고, 지리학에 영향을 길게 끌기는했다. 반면 리터 상습적 지리학자이며, 지리학 제도 마련에 열심 이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영향을 후세의 지리학의 토대가되었다. 19 세기 후반 이후 지리학은 많은이 리터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받은 인물이 만들어 냈다. 특히, 그들을 리터 학파라고도한다. 그러나 리터 후 실적을 남기는 인물을 나오는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우선 독일의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알프레드 헷토나와 프리드리히 랏체루, 오토 슈류타들 수있다. 리히트호펜은 현대 지형학 분야와 실크로드의 발견으로 실적이 있고, 지리학 협회 회장을 맡았다. 알프 헷토나는 예리한 시각과 탁월한 문장​​으로 지리학 방법론과 제도 론을 논박 19 세기 후반부터 20 세기 초반 세계적인 지리 이론의 지도자가되었다. 프리드리히 랏체루은 지리학을 인류와 대지의 관계를 설파하는 학문이라고보고, 환경이 인간의 모습을 규정하는 환경 결정론을 풀어했다. 정치 지리학의 창시자이기도하다. 오토 슈류타은 "인문 지리학의 목표"인문 지리학의 모습을 설명 하였다. 이 시대의 독일에서는 란토샤후토 ( Landschaft , 경관이라고 번역되는)의 개념에서 논쟁이되기도했다.

프랑스는 비달 드 라 부라슈와 에마뉘엘 드 마루톤누 나타났다. 부라슈 환경 가능 론의 입장에서 인문 지리학을 설명하고, 환경은 사람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을 준다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표명. 이 아이디어는 현대 지리학의 주류가되어 갔다. 마루톤누은 "지리학의 역사"를 보여주 예리한 관점에서 지리학을 고찰 하였다. 또한 본업인 기후학 분야에서도 유명하다.

미국 | 미국에서, 미국 지리학 협회가 만들어져 데이​​비스 등이 나왔다. 특히 계통 지리학의 연구가 활발하게되어, 20 세기 지리학을 점차 리드 해 나가는 것이되었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지리학이 이입되었다. 지리학과를 만든 것은 교토 제국 대학 시내 琢治이나 도쿄 대학 | 도쿄 제국 대학의 야마자키 直方, 그들은 일본의 지리학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또한 야마자키 直方는 일본 지리 학회도 만들었다. 또한 우치 鑑三과 마키구치 常三郎 (창가 학회의 창시자이기도하다) 등 재야의 지리 연구도 중요하다.

이 시대는 근접 여러 학문의 발전과 연관하여 경제 지리 및 사회 지리학, 도시 지리학, 기후학, 지형학 등 각종 계통 지리학이 잇따라 정비되어 있고, 지리학 주제 내용 다양화되어가는 시대이기도했다. 이 계통 지리학은 물론 지금도 연구되고있는 것이다. 또한 각지에 학회가 있으며, 각 연구원의 성과를 공유 것도 크다.

이처럼 근대화와 계통 지리학이 정비되어 있고, 20 세기 후반을 맞이하다,이시기에 특히 인문 지리학에서 기술적인 지리학에 큰 변화를 볼 수있게된다. 즉,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을위한 수치 데이터라는 것이 도입되어가는 것이다. 이 교류는 "계량 혁명"이라고 1950 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전세계에 혁명적으로 퍼진 것이었다.

계량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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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원점으로 1950 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 정비되어 있었다 통계를 배경으로 측정 데이터의 지리 학적 공간 분석 기법을 시도할 수있게되었다. 이 운동은 워싱턴 대학 (Washington) | 워싱턴 대학의 연구진들에 의해 시작, 곧 미국 사이에 알려지게되었다. 이 운동은 이러한 계량 지리학에 수용 힘들게이나 비판적인 부분도 포함하여 지리학의 방법론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미국에서 전세계로 "혁명"에 보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계량 혁명이라고한다. 훔볼트 등에 의한 근대 지리학의 성립 이후의 패러다임 것으로, "두 번째 혁명"과 "두 번째 파도"라고 불릴 정도의 지리학에서 한 대단한 절점였다. 이 물결은 최근까지 세계를 석권하여 현재는 지리학 연구에있어서의 비중은 상당 할 수있다. 자세한 내용은 계량 혁명을 참조하십시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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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리학은 환경 문제와 GIS의 검토 등 시대의 요구에 맞춰 다양 해지고있다. 또한 경제학이나 사회학, 기상학 등 인접 학문 분야도 기존의 숙련된 방어적인 연구를 넘어 새로운 영역의 개척도 시도되고있어, 지리학도 이러한 여러 분야와의 제휴도 빠질 수 없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지리학 자신의 견해와 영역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커지고 것도 의미한다. 현재는 그 같은 다른 학문과의 연계와 균형의 일부분 지리학은 어떤 주장을 할 수 있는지 검토되고있는시기라고 할 수있다.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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