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Glory2014/연습장


2017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일본태생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일본명: カズオ・イシグロ, 石黒一雄)의 대표작 ‘The Remains of the day’는 국내 한국어 출판서적은 물론 신문방송과 인터넷에‘남아있는 나날’로 번역돼 있으나 이는 오역된 제목이다. 그날의 흔적’ 또는‘그날의 잔영 ’, ‘그날의 기억’,‘그날의 유물(遺物)’ 정도로 번역해야 옳을 것이다.

이 소설의 일본어 제목은 ‘日の名残り’(그날의 잔영), 중국어 제목은 ‘長日留痕’(장일유흔: 긴긴날의 남겨진 흔적)이다. 우리 출판사들의 제목이 오역이라는 것을 당장 알 수 있다.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른 번역이다. 번역서의 제목이 반드시 원전과 같을 필요는 없으나 이 경우도 작품의 정체성을 훼손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예컨대 서부영화 제목 <The Magnificient 7>을 ‘장대한 7인’으로 하지않고 ‘황야의 7인’으로 옮기는 경우 멋을 부린 그럴싸한 번역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이 즐겨봤다하여 ‘대통령의 영화’로까지 불리는 게리쿠퍼-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High Noon'도 국내에서 ‘정오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는데 작품의 주제나 내용에 잘 맞는 번역이다.

물론 번역은 어려운 작업이다. 천하의 괴테도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자서전을 번역하며 1천여 개나 오역을 했을 정도였다. 이탈리아 격언에 ‘번역은 반역이다’(Traduttore, traditore/Translators are traitors.)라는 말이 있듯이 번역은 배신이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이라도 원작자의 생각과 의도, 원문의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흠을 지적당하기 십상이라는 뜻에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프랑스의 작가이자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번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번역으로 인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된다”(Translations increase the faults of a work and spoil its beauties.). 미국의 문학비평가인 해럴드 블룸(Harold Bloom)도 “모든 통역은 오역이며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 따라서 어떠한 번역이라도 오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Every interpretation is a misinterpretation, and every reading is a misreading, one could infer that any translation is a mistranslation.)고 말했다. 시어도어 세이버리(Theodore Savory)는 번역가의 일이란 원작가의 일보다 더 힘들다(The translator's task is much harder than that of the original author.)고 했으며, 조지 보로우(George Borrow)도 번역은 기껏 메아리에 불과하다(Translation is at best an echo.) 했다. 그래서 일찍이 영국의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법관이었던 우드하우즐리(Woodhouselee)는 “최상의 번역가란 동종(同種)의 원전을 만들어내는 작가다(The best translators have been those writers who have composed original works of the same species.)라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들은 번역이 어렵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번역에서의 신중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엇보다 오역은 독자에 대한 죄악이자 원저자에 대한 죄악이다. 번역서가 원저자의 훌륭한 생각이나 발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시킨다면 이는 죄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번역자의 불성실이나 무지, 또는 해당 국가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오역이 도처에 널려있다. 문제는 이러한 오역들이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고 인류의 지적(知的)성과물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사실관계 왜곡은 국민을 오도(misleading)함으로써 ‘괴담’(ghost story)이나 ‘유언비어’(rumour)로 발전돼 사회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후세에 오역되는 바람에 1999년 7월 지구의 종말이 온다며 세상이 공포에 떨며 발칵 뒤집힌 일이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영호남 지역갈등이 훈요십조의 오역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은 오역의 폐해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示唆)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2008년 여름 3개월여동안 서울 도심을 사실상 무법천지로 만든 ‘광우병 촛불시위’도 오역이 시발점이었다.

가즈오의 이 소설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맨 부커상(Man Booker) 수상작이기도하다.

제임스 아이보리(James Ivory)감독, 앤소니 홉킨스 - 엠마 톰슨 주연의 1993년 영미합작 영화 ‘The Remains of the day’ 역시 가즈오의 1989년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것인데 국내에서는 영화 제목 역시 ‘남아있는 나날’로 오역돼 있다. 이 영화는 가장 최근인 2013년 12월 7일 저녁 11시에 방영된 EBS의 ‘세계의 명화’에서도 ‘남아 있는 나날’이란 오역된 제목으로 소개됐다. 당시 EBS의 보도자료를 기사화한 국내 신문들은 연쇄적으로 오역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The Remains of the day’의 경우, ‘남아있는 나날’로 번역할 경우 'remain'이라는 단어의 뜻도 제대로 짚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작품 내용이나 정체성(identity)에 부합하지 않는 다는 지적을 받는다.

‘remain’은 명사로 쓰일 때 통상 복수형(remains)을 취하며 흔적, 잔존물, 잔해, 궤적, 자취, 유물, 유적, 잔액, 유체(遺體) 유고(遺稿), 유족(遺族) 등의 뜻이 있다.

가즈오의 이 작품은 브론테 자매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처럼 오리지널 영국문학의 분위기를 아주 강하게 풍긴다. 작품의 큰 줄거리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도 못하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주인을 위해 충성으로 평생을 바친 한 남자가 인생의 황혼에서 바라보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 만큼 ‘남아있는 나날’이란 작품의 정체성을 망가뜨리는 제목이다.


이 책은 처음 민음사에서 ‘남아 있는 나날’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탓인지 영화 제목도 같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세종서적’과 ‘신아사’의 번역판도 모두 제목이 ‘남아있는 나날’로 돼있다.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사전, 위키백과, 언론 보도기사 등 온통 오역된 제목으로 도배질을 하고 있다. 제목이 오역이다보니 관련 학술논문이나 대학생 리포트물도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서평에도 “젊은 나날의 사랑은 지나갔지만, 남아 있는 나날에도 희망은 존재한다”는 원작과는 맞지 않는 엉뚱한 표현도 들어가 있다.

다음은 이 영화의 줄거리인데 이를 보면 ‘그날의 흔적’인지 ‘남아있는 나날’인지 쉽게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1958년, 스티븐스(Stevens: 앤소니 홉킨스 분)는 영국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 중 그는 1930년대 국제회의 장소로 유명했던 달링턴 홀(Darlington Hall), 그리고 주인 달링턴 경(Lord Darlington, 제임스 폭스 분)을 위해 시골 저택 집사로 일해 왔던 지난날을 회고해본다. 당시 유럽은 나치즘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스티븐스는 달링턴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독일과의 화합을 추진하던 달링턴은 친 나치주의자로 몰려 종전 후 폐인이 되고 만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충성을 바쳤던 달링턴경이 나치 지지자라는 것을 훗날 깨닫는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맹목적인 충직스러움과 직업의식 때문에 사생활의 많은 부분이 희생되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고, 매력적인 켄튼(Miss Kenton, 엠마 톰슨 분)의 사랑을 일부러 무시해 몇 년 동안 켄튼과의 관계도 경직돼왔다. 내면에서 불타오르는 애모의 정을 감춘 채 스티븐스는 오로지 임무에만 충실해온 것이다. 결국 그의 태도에 실망한 켄튼은 그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야 만다. 지금 스티븐스는 결혼에 실패한 켄튼에게로 향하고 있다. 그녀를 설득시켜 지난날 감정을 바로잡아 잃어버린 젊은 날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그러나 이러한 희망마저 무산되고 그는 새 주인에 의해 다시 옛 모습을 되찾게 된 달링턴 저택으로 혼자 외로이 돌아온다. 지난날의 온갖 영욕을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남은 달링턴 마을은 어쩌면 자신과 조국 영국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nternet Movie Database: IMDB)나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의 보도를 보더라도 가즈오의 ‘The remains of the day’는 주인공 스티븐스가 주인에 충성하며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까지 포기했던 지나간 특정시점(particular point)에서의 자신의 생애를 반추(reflection)하고 기억(memory)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오역된 제목처럼 ‘남아있는 날에도 희망은 있다’는 식으로 미래나 여생(餘生)의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참고문헌: 서옥식, 오역의 제국-그 거짓과 왜곡의 세계(도서출판 도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