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Kkanykan1995/연습장

1. 랩이 한국에 상륙한 날

  1970년 미국에 힙합 문화가 생긴 이후 우리나라에 첫 랩을 시도한 것은 1989년이다. 홍서범은 '김삿갓'이라는 당시에 낮선 음악을 발표하였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음표가 한 개도 등장하지 않고 모든 가사가 랩으로 처리되는 처음으로 시도된 곡이였다. 실제로 홍서범은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서 요사이 유행하는 음악인데 한번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음악 전문가들은 이 노래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서 큰 이슈가 되지는 못하였다.


같은 시기의 가수인 나미도 비슷한 시도를 하였다. 히트곡 '인디언 인형처럼'을 랩버전으로 리믹스를 버전을 발표를 하였다. 그녀와 같이 팀을 이루던 '붐붐'의 신철은 그녀의 리믹스 앨범을 프로듀싱을 할 뿐만 아니라 랩을 담당하면서 '싱어+래퍼'의 조합을 이루어내면서 '현징영과 와와', '서태지와 아이들'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그 후에 '철이와 미애'로 가수로 성공을 거두었고 DJ DOC를 프로듀싱하면서 랩 또는 리믹스 장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2. 랩, 가요와 만나다.

 랩이라는 새로운 표현 방식이 전해지면서 자신의 음악에 랩을 도입시키는 시키는 가수들이 생겨났다. 그 중 한명이 정석원이 이끈 015B이다. 그는 두 번째 음악에서 슬로-랩 스타일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1991)를 발표하였다. 이 곡의 특징으로 '김삿갓' 같이 가사 전체를 랩으로 표현하였고 '랩은 빠르고 신나야 된다.'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해 부드럽고 감성적인 스타일의 랩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신해철도 솔로 시절 '안녕'이라는 노래에 랩을 삽입해 눈길을 끌었다. 이후 그가 이끈  밴드 'N.EX.T'를 통해 록과 랩, 테크노를 접목시키면서 곡을 발표하였다.


1990년대 초반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랩 댄스라는 장르에 몰두해 전문적으로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는 뮤지션들이 꾸준히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가수가 DJ DOC이다. '자칭' 한국 최초의 래퍼라는 DJ 처리(철이)가 클럽 DJ 출신 맴버를 모아 결성한 이 그룹은 구성(싱어 1명 + 래퍼 2명)에서 완벽한 랩 그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각 앨범마다 도전적인 테마와 사회풍자적인 소재를 이용하면서 미국 갱스터 래퍼의 면모마저 풍겼다. 하지만 데뷔 시절 이들은 비트나 가사는 창조적이지 못했고 멜로디 위주인 가요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힙합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이 있다. 힙합그룹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던 이들은 5집에 이르러서 비로소 플로우를 확립하게 된다.

3. 랩 댄스 시대의 3인방

(1) 현진영

 그는  힙합풍의 음악을 자신의 앨범에 전면 도입한 최초의 가수이다. 1980년 대 후반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뉴 잭 스윙 풍 음악은 국내의 많은 댄스 뮤지션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흐름을 제일 먼저 구체적으로 도입, 적용시킨 가수가 현진영이다. '슬픈 마네킹'이란 곡이 대표적으로 이 곡 중간에는 완전한 형태의 플로우를 갖춘 형진영의 랩이 삽입되어 있다.


현진영은 1992년 발표한 'New Dance 2'에서 더욱 진보한 래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타이틀 곡 '흐린 기억속의 그대'는 댄스곡으로 대중성이 강하지만 수록곡 '미인', '한동한 뜸했었지.', '봄비'에는 각 절마다 다른 스토리의 랩 가사가 등장한다. 이 가사들이 모여 하나의 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리지날 힙합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이 힙합풍의 음악을 전면적으로 시도한 최초의 가수라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랩'의 유행을 폭발시킨 그룹이다. 이들은 '랩 댄스'를 유행시켰고, 대중화했으며, 랩 댄스를 한국 대중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장중한 오프닝 뒤로 이어지는 경쾌한 리듬, 기타와 강렬한 연주와 빠른 랩이 어우러진 '난 알아요' (1992)는 청소년 세대의 송가가 될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얻었다.


같은 앨범에 실려 있는 '환상 속의 그대'는 단순한 형식미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김삿갓' 이후 가장 정통적인 형태의 랩을 담은 노래이다. 랩과 댄스라는 젊고 자극적인 두 개의 테마는 단숨에 신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대중음악을 넘어 대중문화 전반에 급진적인 세대교체와 소비 주체의 변화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진가가 다시 한 번 발휘된 것은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앨범의 대표곡 'Come Back Home'이다. 미국의 갱스터 랩처럼 욕이나 저속한 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가출 청소년에 관한 내용을 직접 다룸으로써 랩의 메시지 전달 기능을 충실히 재현해냈다.


(3) 듀스

 듀스의 맴버 이현도는 미국의 거장 어반(urban) 뮤지션 테디 라일리의 전매특허인 '뉴 잭 스윙'을 받아들여 그것을 본인의 멜로디와 리듬감에 맞추어 변형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히트곡 '나를 돌아봐.'인데 멜로디 변화가 크지 않으면서 댄스 뮤직 특유의 긴박한 리듬감을 띤 일련의 음악을 선보였다.


이현도는 랩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고 불리는 '라임'에 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을 한 인물이다. 높은 수준의 라이밍과 단어 구사 능력을 선보이지는 못하였지만 랩을 만들면서 라임의 형태와 단어의 조합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듀스의 세번째 앨범인 'Force Deux' (1995)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련되게 무르익은 편곡 기술도 훌륭했지만, 재즈, 휭크, 테크노 등 서로 다른 스타일을 힙합의 범주 안에 위화감 없이 버무린 솜씨는 그의 독보적인 예술적 재능을 확인시켰다.


 듀스의 등장과 이현도의 활약은 단순히 음악에 대한 평가를 넘어 힙합이라는 새로운 음악이 한국 대중들에게 폭넓게 인식된 사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음악 팬들에게 힙합이라는 낯선 문화를 본격적으로 의식하게 한 최초의 뮤지션 중 한명이다.

4. 재미 교포 뮤지션들의 활약

 재미교포들은 미국에서 힙합과 랩을 쉽게 접하였고 이런 문화를 한국에 자리잡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국내 뮤지션들에게 불가능의 영역이였던 자유로운 '영어 랩' 구사, 그에 따른 묘한 서양적 분위기는 블랙 뮤직 뮤지션으로서의 이점으로 작용했다.
 솔리드는 싱어(김조한), 작곡자(정재윤), 래퍼 & DJ(이준)으로 구성되어 힙합과 R&B 중간 형태의 음악을 선보였다. 전문 힙합 그룹은 아니였지만 그들이 들려준 곡의 감수성은 국내 랩 댄스의 수준을 훨씬 상회하였다. 특히 'Party People', 'Hip Hop Nation', 'Pass Me The Mic'은 미국 뮤지션들에게서 들을법한 완전한 힙합 곡으로 특히 래퍼인 이준의 목소리는 래퍼를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팝의 본고장 미국에서 감각을 키운 정재윤의 프로그래밍이나 비트를 만드는 솜씨는 동시대 한국 뮤지션과 비교하면 확실히 뛰어났다.


업타운 역시 1990년대 중반에 가요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솔리드와 달리 업타운은 힙합 그룹의 구성을 철저히 따랐다. 리더 정연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래퍼였고, 특히 카를로스와 스티브는 보컬을 담당하지 않는 전문 래퍼였다. 비트나 샘플링에서도 미국 서부 힙합 스타일을 그대로 따랐고 가요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이국적인 멜로디와 편곡으로 음악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으로 드렁큰 타이거의 타이거 JK이다.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Tiger JK는 음악 평론가였던 아버지 서병후를 따라 초등학생 때 미국으로 떠났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양한 음악을 경험하였다. 미국에서 자신이 좋아하던 아티스트인 아이스 큐브가 한국을 디스하는 'Black Korea'를 발표를 하자 이에 반박하는 'Call Me Tiger'를 LA 힙합 페스티발에서 선보이면서 한국의 인기 프로그램 자니윤 쇼에도 소개가 되었다. 그 후 1995년에 자신의 친구인 미키 아이즈, 스트램과 함께 한국에서 힙합 앨범을 발표하지만 힙합에 대한 선입견, 인종차별 등으로 실패를 경험한다. 2년 후 1997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여러 차례 길거리 공연 및 클럽 공연을 하였고 DJ 샤인과 함께 1998년 드렁큰 타이거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 전통 힙합의 선구자 가 되었다.


재미 교포 출신 뮤지션들의 약점은 기본적으로 한국어 구사에 문제가 있었다. 솔리드의 이준, 업타운의 스티브, 카를로스 등은 한국어 가사를 전혀 쓸 수 없었고 국내 작사가들에게 가사를 받아 부르는 수 밖에 없었다. 타이거 JK도 초기에는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어로 작사를 하긴 했지만 라임이나 플로우가 엉망이었다. 그래서 오직 영어 랩만을 구사하는 곡이 많았다. 영어 랩을 하면서 MC로서의 기량을 온전히 발휘하면서 다른 한국 랩을 하던 래퍼와는 달리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교포 출신 뮤지션들의 영어 랩은 힙합 씬에서 아주 자연스러웠고 200년대 이후로는 그 자체가 한국 힙합 문화의 주요 부분으로 차지했다.

5. 힙합의 대중화

 힙합이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소수 마니아만이 즐기던 음악이였다. 드렁큰 타이거, 주석, CB Mass, 가리온 등은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하였지만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다.
 힙합에 대중성을 가미해 큰 인기를 누린 대표적인 가수는 지누션이다. 지누션은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양현석과 듀스 출신의 이현도가 만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특히 '말해줘'는 엄정화의 매력적인 보컬과 이를 뒷받침하는 멜로디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말해줘'는 엄정화의 보컬부분을 지운다면 지누와 션의 랩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전 세대의 듀스와는 달리 자유로운 플로우를 선보이면서 힙합의 면모를 보여줬다.


2005년에 힙합 계에 큰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난다. 에픽 하이의 'Fly'가 당대 최고의 아이돌인 동방신기를 제치고 공중파 순위 차트 1위를 달성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음원 차트는 '방송기여도' 같은 점수등으로 대중으로부터 인기가 있는 가수들에게 유리하게 채점이 되었다. 하지만 에픽하이가 이런 악조건을 이겨내면서 1위를 등극하면서 힙합이 듣기 좋은 음악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여러 음악 프로그램으로 1위를 달성하면서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였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에픽하이에게만 이러난 일이 아니다. 같은 해 리쌍의 '내가 웃는게 아니야'도 음악 프로그램 1위를 차지하였고 2005년 4분기 음반판매량을 보면 에픽하이가 1위, 다이나믹 듀오가 6위, 리쌍이 7위를 달성하면서 힙합이 점점 대중화가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되었다.


 2005년 이후에도 에픽하이, 리쌍, 다이나믹 듀오 등은 여전히 앨범 발표 때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2007년에는 힙합과 아이돌을 합친 그룹인 빅뱅의 '거짓말'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또 다른 형태의 힙합 문화를 정착시켰다. 빅뱅을 계기로 현재의 블락비, 방탄소년단, Winner 같은 힙합을 주로 하는 아이돌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점 언더그라운드에서 활약하던 힙합 아티스트들이 음원차트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다. 범키, 프라이머리, 버벌진트, San E, Zion.T, Crush, 빈지노 등 다양한 힙합 가수들이 발표한 곡이 음원차트 1위를 달성하면서 현재 힙합은 더 이상 마니아들만의 음악이 아닌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는 하나의 문화로 성장하였다.


[출처] 한국 힙합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