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Pudmaker/수필/노무현

http://pudmaker.egloos.com/1414551

(많지는 않으나 제 블로그를 방문하시는 몇몇 분들께 : 저는 '서거'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저보다 '높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떄문입니다. 대중들을 상대하는 주요 일간지, 방송과 같은 책임있는 언론이 아닌 개인에 불과한 제가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한 양해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 노무현이 23일 아침 자살했다. 역사를 공부하고 있지만 전직 국가원수가 그것도 바로 전직 국가 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례는 히틀러 이외에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만큼 이 사건은 한국사 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명박의 표적수사 때문이다, 노무현은 죄값을 치룬 것이다, 이념을 넘어 국민 화합의 계기로 삼자, 더 이상 권력형 비리가없어야 한다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명박이 퇴임한 다음에야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 별개로 나도 노무현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을 조금은 가지고 있다. 내 대학생활의 대부분이 노무현이 대통령직에 있었을 시절이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에 대한 추억이 약간은 있다.

1

때는 2002년 12월,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2002년 한일월드컵의 열기를 지나 수능을 봤고,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미선이, 효순이 촛불시위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의 문턱에 다가온 우리들은, 앞으로 5년을 책임질 대통령이 누구일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대선에 대해 상당히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갖가지 '사교육'(논술)으로 인해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를 지지할 정도의 생각은 차마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좋은 대통령'이라고 믿고 있었던 김대중의 아들들이 줄줄이 비리 혐의로 잡혀간 것도 이러한 판단에 일조했다.

지금은 전혀 아니지만 당시 열렬한 노빠이던 친구 C 역시 나와 같이 '사교육'을 받던 친구 중 하나였다. 고1 때부터 알고 지내던 그 친구는 학교 성적 및 수능 성적이 최상위급인 데다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갖추고 있어(다만 키가 작은 것이 흠이었다^^.) 모두가 그 친구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대선이 다가올수록, C는 공공연히 노무현이야말로 앞으로의 5년을 책임질 지도자로 적격이라는 의견을 피력했고, 나 역시 그 생각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이회창보다는 노무현이 훨씬 낫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드라마틱한 후보 경선과 정몽준과의 단일화 파동, 대선 하루 전인 12월 18일 정몽준의 단일화 철회 및 12월 19일 아침 노무현을 떨어뜨리려 안간힘을 쓰던 조중동의 사설, 그리고 거리에서는 계속되는 촛불시위..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숨가쁘게 돌아가던 나날들이었다.

노무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노무현이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그 밑에 있는 민주당 무리들 역시 한나라당 만큼이나 썩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나는 애써 대선에 무관심한 척 했다. 그러나 사실 속으로는 이회창이 떨어지고 노무현이 당선되기를 그 친구만큼이나 빌었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지나 팽팽했던 개표는 점점 노무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이었나. C로부터 전화가 왔다.

"됐어! 됐다고! 만세!! 지금 얼른 티비 봐라!!"

잠시 대선을 무시하고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던 나는 얼른 티비를 틀었다. 놀랍게도 C는 당시 노사모의 상징과도 같던 노란 목도리를 몸에 걸치고 환희에 찬 표정으로 광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월드컵 4강 때도 보지 못했고, 원하던 대로 대학 입시 결과가 나온 뒤에도 볼 수 없었던 그 표정.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친구는 그 뒤로도 한동안 학교에 노란 목도리를 걸치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노무현의 당선을 축하했다.

(이라크 파병이 결정되던 즈음부터였나, 그 친구는 더이상 노무현의 ㄴ도 꺼내지 않았다.)

2

두 번째 추억은 바로 노무현 탄핵 소추 사건 때였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나는 확고한 진보정당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 사실상 유일 진보정당이던 민주노동당이 부족하기는 하나, 현재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는 그나마 가장 올바른 정치를 펴줄 것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이미 노무현에 대한 모든 기대는 0에 수렴하고 있었다. "국익을 위한다" 어쩌구 하면서 이라크에 파병을 한 것부터 하여, 최도술 비리, 노건평 뇌물수수 등이 터져나왔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급격히 떨어졌으며, 나 역시 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학교 교지편집부에서 일하면서 작게나마 노력했다.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 선거운동을 계속해 왔고, 본인과 측근들의 권력형 부정부패로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으며, 국민경제를 파탄시켰다"

그러던 2004년 3월 12일. 국회는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노무현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찬성 193명 반대는 겨우 2명이었다. 노무현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없고, 그가 남은 임기동안 올바른 정치를 펼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500억 차떼기당, 부정부패 원조당, 영호남 지역당,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을 상전 모시듯 하는 놈들에게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상황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에서도 이 상황을 시시각각 보도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탄핵 반대 여론이 70%를 넘는 등, 한나라당, 민주당 떨거지들은 단단히 정치적 역풍을 맞고 있었다.

사람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노사모가 주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한나라당-민주당의 추잡한 탄핵에 맞선 자발적인 목소리가 하나둘 씩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지편집부의 일원으로써 나 역시 이러한 현장에 뛰어들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아마 2004년 4월의 어느 쯤이었을 것이다. 이미 미선이-효순이 촛불시위를 통해 대규모 대중집회를 경험한 나는 이번 역시 그때와 비슷한 그림이 아닐까 생각하며 시청앞 광장으로 향했다. 취재용 허접한 디카를 옆에 들고 약간의 기대, 그리고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나름의 냉철함을 동시에 새기려 노력하며 광장에 도착했다.

눈 앞의 광경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취재를 위해 이순신 동상 근처의 한 건물로 올라갔다. 세종로 사거리는 물론 그 다음 블록까지 이루 말 할 수 없는 많은 인파, 어쩌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한목소리로 국회의 미친 탄핵 소추를 반대하고 있었다.

국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국회를 향한 국민들의 준엄한 선언. 2008년 촛불 시위를 경험할 때까지 그러한 감동은 다시는 느낄 수 없었다. 비록 "이건 혁명적 상황이다!"라며 설레발쳤던 모 선배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다수의 대중이 직접 내는 목소리야말로 그 어떤 권력보다도 큰 힘을 발휘한다는 진리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리고 당연히, 탄핵은 취소되었고, 노무현은 자리로 돌아왔다.

3

시간이 지나 2007년 10월. 나는 의무경찰로서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노무현은 퇴임을 남겨두고 사실상 마지막으로 중요한 일을 추진하려 하였다. 그것은 바로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이었다.

노무현이 김정일을 만나러 가는 길에 위치한 판문점 일대는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전국의 전, 의경들이 동원되었으며, 기타 청와대 경호실, 경찰 특공대 등이 노무현을 경비하기 위해 만전을 기했다.

당시 나는 갓 수경이 된 상태로, 어쨌든 다른 일들은 후임들에게 맡겨두고 버스 안에서 다른 대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노무현의 지지율은 20% 대에 머무른 지 오래였지만, 대통령이 눈 앞을 지나가는 현장을 보게 된다는 사실에 모두들 설레여하는 눈치였다.

나는 평소 설파하던 대로, "노무현이 뭐 대단하다고"라고 일축하며 얼른 상황이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노무현과 수행원들이 도착했고, 의경버스에 설치된 위성 티비 역시 그 모습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반노무현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별 충돌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2007년 10월 당시 이미 정권교체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한나라당 후보로 선출된 이명박이 다음 대통령으로 선출될 확률은 99%였고, 김정일과 정상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결국 이명박은 그것을 모두 무시하리라는 것 역시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면서 또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어쨌든 퇴임하기 직전까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구나. 하지만 김정일 독재왕정에서 별 소용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남북 정상회담은 끝이 났다.

4

토요일 아침, 오랜만에 달콤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동생이 갑자기 깨운다. "노무현이 죽었대!!"

왠 뜬금없는 개소리인가? 전혀 예측하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무시하고 계속 잠을 자려는데, 동생이 계속 깨운다. 결국 할 수 없이 일어나 티비를 틀었는데, 이미 모든 티비 채널은 노무현 소식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노무현이 아니라 노태우 아닐까? 추징금 문제로 동생과 조카와 다투는 데다가 병까지 얻어 오락가락한다는 노태우가 죽었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티비 화면은 분명히 "노무현 서거"를 알리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 5년 및 그의 드라마틱한 대선이 순식간에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권위주의를 해체시켰으며, 지역주의까지 타파하려 노력했던 대통령. 그러나 이라크 파병을 결행하고, 한미 FTA 추진, 미친소 수입의 발판을 마련한 대통령.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면서 비정규직 양산법을 만들고, 그를 지지했던 개혁을 열망하는 국민을 배신한 대통령. 취임하자마자 이명박이 정치적으로 파산하자 반대급부로 큰 인기를 다시 얻은 대통령. 하지만 비리 혐의로 파탄나면서 결국 "존경하는 대통령 명단"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할 기회를 영영 놓쳐버린 대통령.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반은 농담으로, 반은 진담으로 뇌까렸던 이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놔 노무현 하필이면 이때 죽어서 무한도전도 못보고 소녀시대도 못보잖아!"라고 떠드는 초딩에게 "무도나 일밤은 다음 주에 보면 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제 영영 볼 수 없습니다."라는 리플이나 남겨주었다.

단 한번도 그의 주장에 동감하지 않았고, 그의 정책에 찬성하지 않았던 나지만, 그 순간만은 부엉이 바위 위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하필이면 왜 자살이냐고!"라고 따지지 않고 조용히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2년 전 저 멀리 지나가듯, 언뜻 본게 전부인 노무현 전 대통령. 하지만 (긍정, 부정을 떠나) 그 어느 역대 대통령보다도 내게 강한 인상을 남긴 대통령.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