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Russ/낙서장

여진인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편집

제가 중학교때 과외하던 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선생님 성이 이씨 인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분은 분명 저에게 자신은 함경도에서 어려서 자랐고 6.25 이후 부모와 함께 피난온 사람으로 자신은 여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진인들은 함경도 일부지방에 모여 살면서 여진의 풍속을 유지하고 여진말도 사용하며 일제시대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한반도에 사는 조선인이라 칭하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풍속과 문화를 버리고 중국의 풍속과 문화를 따른 변절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당당하게 여진인들은 한반도 북부의 열악한 자연환경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왔으나 여진인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지배한 이후 여진인 왕족들이 부패하여 중국에 동화되었다고 하시면서 앞으로는 여진인임을 자부하며 사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이며 여진말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국어를 전공하신 까닭인지 우리 국어는 남방계의 영향을 받은 신라가 통일해서 문법은 여진어와 비슷하나 고유어의 단어들은 여진어와 큰 차이를 보이며 중국의 한자를 차용한 이후 완전히 달라져서 현재는 여진어와 전혀 다른듯 하나 아마 천년전에는 서로 말이 통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여진인이었다고 하시면서 그가 훗날 조선에 뿌리가 있음을 나타내려고 전라도 전주를 본향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은 순수 여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와 의형제를 맺은 퉁지란, 후에 이씨성을 받은 이지란과는 실제로 혈연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진인은 분명 우리와 외모가 똑같습니다. 아니 우리보다 더 순수 혈통입니다. 우리 한국인이 90% 몽골로이드 혈통과 10%의 말레이 계통의 원주민 유전자가 있다면 여진인은 100% 몽골로이드라고 할수 있지요. 우리가 만주족, 여진족, 말갈족 등으로 부르는 그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며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원주민의 피가 남아있고 그들의 언어를 이어받아 단어가 전혀 다른 것 처럼 보일 뿐 입니다. 백제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언어가 달랐다고 하는 말씀은 바로 이런 차이었다고 보아집니다. 문헌과 과학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아직 스스로 여진인이라고 확신하는 노인들이 대한민국에 생존해 계실것으로 봅니다. -> 이 부분은 어떤 사용자가 여진족 항목의 토론에 올렸던 내용입니다(2007년 1월 27일 토요일).

동북공정의 원인과 한국인 편집

요즘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인하여 한국내에서 언론과 국민들이 반대의 여론이 높아져만 가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변방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새롭게 하여 그들의 변방에 있던 주변 민족에 대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소수민족의 독립과 아울러 북한의 붕괴시 북한땅과 만주땅에 대한 영구적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국민들은 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려고 하는 동북공정에 대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북공정을 중국이 시작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한국사람들 자신에 있다고 하겠다. 고구려는 모두 알다시피 그 시원을 부여에 두고 있다. 부여는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부터 적어도 기원전 4세기 경에 고조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온 나라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한가. 강단사학에서는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을 신화로 여기며 역사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기독계에서는 학교에 세워진 단군상의 목을 제거하는 사건도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역사교육의 부재로 말미암는 것으로 강단사학이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가르치는것이 그 큰 이유라 하겠다.

둘째로 모든 국가의 역사시대 이전에는 반드시 건국신화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의 건국신화는 삼국유사에도 기록하고 있듯이 바로 환인신시라고도 불리는 환웅의 역사이다. 그리고 환웅이 건국한 나라의 임금중에 치우도 그 신화의 일부라 하겠으며 사마천의 사기에 치우와 헌원과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실정은 어떠한가. 한국사람들은 중국의 신화인 삼황오제는 인정하면서 한국의 건국신화인 환인, 환웅, 신시, 치우에 대한 기록은 부정한다. 본인이 틀:한국사틀:중국사를 보고 한국사에 환인과 환웅의 나라인 환국과 배달국을 첨가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은 신화도 아니기때문에 한국사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사의 삼황오제는 신화이므로 꼭 넣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헌원과 치우와의 전쟁기록이 있다. 그런데 똑같은 기록에 나와 있는 헌원은 인정하면서 치우는 인정하지 못한다니, 한국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단번에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한국의 역사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며 이러한 건국신화적 바탕이 없는 역사는 무너지게 마련이다.

중국은 이를 처음부터 잘 간파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강단 사학자들이 환인 환웅은 물론 건국시조인 단군까지 신화로 내몰고 있으며, 고조선 --> 부여 --> 고구려 -->발해 로 이어지는 역사관과 진국 --> 삼한 --> 백제 신라 --> 고려 --> 조선 으로 이어지는 남한 강단사학계의 역사적 인식을 중국은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급기에야 한국의 북방의 역사인 고구려를 시점으로 그 연계된 역사를 하나 하나 자국의 역사로 만들고 있다.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정립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강단 사학계는 한술 더 떠서 원삼국시대라는 이상한 단어를 만들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도 AD300년 이전의 역사는 역사로 포함시킬 수 없다는 이상한 이론을 만들었다. 중국은 가면 갈수록 역사를 아득한 상고적 역사까지 포함시켜려 하며 신화까지도 역사로 만드려고 하는 판에, 한국은 자국의 역사를 자꾸만 축소시키려고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게된 발단이라 하겠다.

이글을 읽고있는 자신은 아니라고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 위키에 있는 사람만 보더라도 환국 신시 고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거부하여 자국의 역사를 축소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중국의 사대하는 역사적 인식의 피해가 크다고 할 것이다. 틀:한국사에 과연 신화가 포함되느냐 안되느냐, 그리고 틀:중국사에 신화가 포함되느냐 안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람들의 역사적인식에 대한 중국사대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할수 있다. 이를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커다란 사업을 만들어 한국의 북방과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바로 한국사람들이 가진 사대의식으로부터 발단된 것이며 중국의 동북공정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대의식을 버리고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의식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한국사의 일부인 제나라 편집

고구려는 668년 수도 평양성이 함락당하지만 한대륙과 한반도 북부 전역에서 다양한 재건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물론 그중에서 발해가 가장 돋보이면서 고구려의 계승자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지만 이외에도 반듯한 국가를 세운 경우가 여러 국가이다. 특히 이정기를 중심으로 한 산동 반도의 고구려유민들은 제(薺) 나라를 세우고 낙양 등 당 중심부의 일부이자 해안일대 지역을 장악하면서 765년 제나라를 수립하고, 819년까지 55년간 산동과 화북 일대를 다스리게 되었다. 제나라의 존재와 건국의 기초를 닦았던 인물은 이정기(李正己)이다. 그의 대통을 이어 제나라를 세 우고 왕이 된 이납(李納), 그리고 그의 아들로 대를 이은 이사고(李師古), 이사도 (李師道) 등으로 이어지는 4대의 역사기를 가진다. 특히 제나라의 공세로 당황제 덕종은 살아남기 위해, 783년 10월 봉천(奉天, 지금의 시안 서북쪽 80km)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이사도는 낙양의 물자보관소 ‘하음’을 공습, 무려 150만개에 달 하는 창고를 불지른 뒤, 사저(私邸)를 짓고 군부대를 상주시키고,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죽여 버린다. 806년부터 809년까지 4년간 수시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낙양을 장악하기도 한다. 당시 제는 독다적인 법령과 조세제도를 갖추고, 문무백관을 임명한 뒤, 자체적인 지방행정단위와 통치조직을 구비하여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있었다. 당황실에 의해 왕으로 책봉된 여타 번진 (藩鎭) 세력들과 구별되는 엄연한 독립국가였던 것이다. 제나라의 의미는 영토의 크기보다 국가의 격과 자질과 내용이다. 당시 산동 지역은 가장 귀중한 재화였던 소금과 구리의 산지이자 농수산물이 풍부했던 옥토였다. 이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화북 등지를 포괄한 제나라의 무대는 고구려 유민이 일으키고 지도하고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한국사의 일부라 할 것이다. 중국사에서도 제나라를 일으킨 이씨 일가를 고구려인이라 명기하고, 제나라체제 하에서 산동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고 기록하였고, 제가 망할 때 당이 고구려계 군인 1200명을 집단학살 했다는 점(정복한 나라의 군인을 집단 사살한 것은 당나라 역 사상 전무후무) 등을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한겨레의 역사임을 반 증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신구당서(新․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자치통감 (資治通監), 태평어람(太平御覽) 등 중국 역사책들도 제나라 왕 이납의 죽음에 대해 임금의 사망을 일컫는 ‘훙(薨)’ 으로 표현한 점에 비추어 당으로부터 독립된 나라였음을 확실히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제, 제나라는 없다. 그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제나라는 7, 8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역사와 정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우리 역사의 일부로서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2007년 2월 21일 수요일)

제주 방언 편집

  • 게민 또 놀러옵서양(그러면 또 놀러오세요).

"되"와 "돼"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 편집

"하"와 "해"를 넣어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