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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편집죽전1동
편집죽전1동의 인구는 59,370명(2015년 2월 28일 기준, 내국인)으로 용인시 전체 인구의 6.2%를 차지한다. 남자는 29,073명, 여자는 30,297명이며 세대수는 20,495세대이며 외국인은 622명이다.[1] 죽전1동의 인구구조는 도시 지역의 특성이 나타나서 유소년 인구비율은 19.7%로 용인시 전체 18.3%보다 많으며, 노인인구비율은 9.3%로 용인시 전체 10.3%보다 적다.[2]
죽전 2동
편집죽전2동의 인구는 19,856명(2015년 2월 28일 기준, 내국인)으로 용인시 전체 인구의 2.1%를 차지한다. 남자는 9,770명, 여자는 10,086명이며 세대수는 7,490세대이며 외국인은 74명이다. [3] 죽전2동의 인구구조는 유소년인구비율이 16.1%, 노인인구비율이 9.0%이다.[4]
갈담리
편집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경안천 변 중앙에 위치한 갈담리는 2008년 현재 면적이 5.575㎢이며, 총 605세대에 1,418명[남자 773명, 여자 64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5] 자연 마을로는 갈월·돌댐이·파담이 있다.
위치
편집동쪽으로 상림리, 도웅리, 서쪽으로 매산리, 신원리, 남쪽으로 초부리, 북쪽으로 왕산리, 일산리와 접한다. 정광산에서 흐르는 하천이 마을 전체를 가로질러 경안천으로 합류한다.
명칭 유래
편집1914년에 갈월(葛月)과 파담(琶潭)에서 한 자씩 따서 갈담리라 하였다. 갈담은 옛날에 어영대장을 지낸 정찬술이 낙향하여 집을 짓고 「갈지담방 시우중곡(葛之潭芳 施于中谷)」이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서 갈담을 취했다 한다. 파담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이 낙향하여 개울가에 정자를 짓고 비파를 타면서 유유자적한 데서 유래했다.[6]
주요 기관
편집모현면사무소
편집모현119안전센터
편집갈담저수지
편집문화재
편집약천선생별묘(남구만사당)
편집조선 중기의 정치가이며 문인·시인이었던 남구만이 생시에 잠시 우거하였다고 전하여지는 곳.
갈담리 선사유적
편집[출토유물] 갈담리 선사유적에서 채집된 유물 4점 중 석영암제 강돌을 이용한 몸돌 2점은 수직 방향으로 떼기가 이루어졌다(높이 7~8㎝). 나머지 1점은 석영암제인데, 여러 방향으로 떼기가 이루어진 것이다(폭 6.5㎝). 또 홈날 1점은 평면 사각형으로 인위적인 박리면이 앞쪽에 관찰되며, 측면에 오목한 날을 만들어 홈날로 사용하였다(폭 2.8㎝).
갈담리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각면원구 1점과 몸돌·자르개·박편 등이다. 다각면원구는 폭 9.0㎝로 다소 거친 석영맥암 재질인데, 앞면과 뒷면 일부에 자연면이 남아 있고, 여러 방향에서 떼기를 베풀어 만들었다. 몸돌은 규질암제로 앞면과 뒤편, 그리고 아랫면에 자연면이 남아 있으며, 모양에 따라 여러 방향에서 떼기를 베풀었다. 그 밖에 장타원형 자르개와 규질응회암재 박편 등이 발견되었다.
갈담리 선사유적에서는 석영암 강돌을 이용한 몸돌류가 발견되었는데, 아래와 위의 편평한 면에서 수직 방향으로 떼기를 베푼 것들이다. [7]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주석
편집
안응록(安應綠, 1919 ~ ?)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 간도특설대 중사였다.
생애
편집1940년 간도특설대 제2기생으로 입대하였으며, 기박련(機迫連) 중사 간호로 복무했다.
1941년 1월 안투현(安圖縣) 대황구 부근에서 동북항일연군 여성 대원 4명을 체포했다. 허종범과 함께 이들을 압송하던 중 강간을 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2명을 살해했다. 1941년 4월에는 간도특설대 3개련(連)이 안투(安圖), 화뎬(樺甸), 둔화(敦化) 경계지역에서 수색을 하던 중 항일연군 2명을 직접 체포했다.
같이 보기
편집참고자료
편집-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9). 《친일인명사전》. 4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