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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대한민국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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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한(宣宗漢)
보성선씨 오세충의록(五世忠義錄)
작가 정보


보성선씨 오세충의록(寶城宣氏 (五世忠義錄) 보성 선씨 오세충의록은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를 포함하여 산재되어 수록되어 있던 선씨 오충(五忠)의 행적을 종합하여 집대성한 문집이다.

개요 편집

<보성선씨 오세충의록>은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의 16세손 되시는 선종한(호_오림정)이란 분이 편찬한 책이다. 이 최초로 발간된 것은 조선말엽 헌종 8년(1838년)인 바, 원래 이 충의록은 산재되어 수록되어 있던 오충(五忠)의 행적을 종합하여 집대성한 문집으로서, 우리의 선조들이 오충의 업적을 추상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사기와 전서 등에 기재된 사실을 발췌하여 선씨 아닌 다른 씨족중의 당시 유명한 학자들이 근식한 것이며 여기다가, 교지, 관문, 일기문, 상소문, 제문 등을 합록하여 조상의 충효절의를 기리고자 발간한 문집이다.

<보성선씨 오세충의록>은 타 문중에서는 보기 드문 조상의 충,효,절,의가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기록하고 있으며, 족보의 종류중에 기타로 분류되어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자타가 공인하는 서적으로 우리 보성선씨 문중의 유일한 전기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간행한 도서목록에 기재된 역자적인 서적이다. 간행당시에 이 책은 120여면과 42,000여 자에 달하는 순한자로만 기록된 책으로, 이 책에 귀중한 내용을 오늘날 자세하게 알고 있는 후손은 극히 몇 사람 뿐이고, 오로지 가전기보로서 보존하고 있는 고서에 지나지 않은 실정임에 선조의 덕행과 위업을 드날려서 후세헤 전함은 자손의 도리로서, 이 책을 후손들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알기 쉽게 하기 위해 1970년에 번역판이 발행되었다.

족보의 종류로 분류한 <보성선씨 오세충의록> 편집

족보의 종류에는 대동보, 족보, 세보, 파보, 가승보, 계보, 가보, 만성보 등이 있으며, 『문보(文譜)』,『삼반십세보(三班十世譜)』,『진신오세보(縉紳五世譜)』, 『호보(號譜)』와 같이 현달한 조상의 세계를 명백히 하려고 한 보서(譜書)나 『대방세가언행록(帶方世家言行錄)』, 『보성선씨오세충의록(寶城宣氏五世忠義錄)』 등과 같이 조상 중 충,효,절,의 가 특히 뛰어난 사적과 공훈을 수록한 것도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보성선씨 오세충의록> 기록 요약 편집

서울대학교 도서관인 규장각에는 우리나라의 옛문서와 책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여기 규장각에 보성선씨 가문의 중요한 기록인 '보성선씨 오세충의록'이 보관되어 있다. 규11493은 규장각의 문서보관번호이며 규장각에서 분류 정리한 내용을 요약 기록하였다.

 1책(63장) 고활자본(木活字) 33.7×23.6cm.       사주단변 반곽:26.3×20cm.
 10행 24자 주쌍행(注雙行)          판심(版心):상하화문어미(上下花紋魚尾)
 서(序):김이양       발(跋):김조순 등     


중국계 귀화인으로 조선에 충의를 바친 보성선씨 5世의 행적과 그에 관련된 사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수록된 인물은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_麗末, 生歿年未詳), 선형(宣炯_1434∼1479), 선거이(宣居怡_1550∼1598), 선약해(宣若海_1579∼1643), 선세강(宣世綱_1576∼1636) 등이며, 시조 선윤지의 16세손인 후손 선종한(宣宗漢)이 1838년(헌종 4)에 수집·간행했다. 권머리에는 김이양의 서문(1837년)과 목록이 있고 권말에 김조순, 김담, 이완희, 선태중, 선상섭, 선학로, 선시면의 발문이 있다.

<보성선씨 오세충의록>에 기록된 각 인물별 유사의 수록내용은 다음과 같다.

(1)퇴휴당유적(退休堂遺蹟);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의 충의사실을 수록. 선윤지는 호를 용암, 퇴휴당이라 했으며 元明交替期의 중국인으로써 고려에 귀화하여 1382년(高麗 禑王 8년)호남도관찰사(湖南都觀察使)가 되었으며, 관찰사 재임중 왜구소탕과 유학진흥에 힘썼으며 그 덕을 기리는 생사당(生祠堂_寶城)이 세웠질 만큼 칭송을 들었다 한다. 고려가 멸망하자 향리에 은거, 吉再·徐甄 등과 교유하였으며 1799년(正祖 23) 보성에 사당이 건립되었고 1831년(순조 31)에는 후손 4명과 함께 오충사(五忠祠_寶城)에 제향(祭享)되었다.

(2)평양공행장(平襄公行狀_鄭汝昌撰), 화상찬(畵像贊_宋時烈撰);모두 선형(宣炯_1434∼1479)에 대한 사실이다. 선형은 윤지의 현손이며 1451년(文宗 1) 무과에 급제한 뒤 1460년(世宗 6)에 안주목사가 되었다. 이어 경성부사·회령병마절도사 등이 되어 병방수지에 공을 세웠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을 때는 형조참판으로서 반군을 토벌, 적개공신 3등에 록훈되었다. 성종조에 유성군에 피봉되고 1474년(성종 2) 좌리공신 4등에 록훈되었다. 북방의 야인정벌에 계속 공헌하였으며 형조와 호조판서, 좌·우찬성을 역임했다. 오충사에 제향, 諡號는 평양(平襄)이다.

(3)부원수공전망사적(副元帥公戰亡事蹟); 선거이(宣居怡)에 관한 사적. 선거이의 字는 사신(思愼_, 號는 친친제(親親齋), 선형(宣炯)의 증손으로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1587년(선조 20) 녹둔도(鹿屯島)에 출몰하던 여진족을 당시 조산만호(造山萬戶)였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방어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동래부사(東萊府使)로서 전공을 세웠고 전라병마절도사와 부원수를 겸직 행주·운봉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1598년 울산전에 명군(明軍)과 합세 2만여 병력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고 광주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4)수사공행장(水使公行狀_金담撰), 심양일기(瀋陽日記); 선약해(宣若海)와 관계된 행장과 사적, 선약해의 字는 백종(伯宗), 1605년 무과에 급제했고 1631년(인조 9) 비변사의 추천으로 국서를 가지고 심양에 사행(使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기절(氣節)을 고수했으며 그 공으로 昇階 밀양부사에 임명되었다. 평산부사를 거쳐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으나 임지에서 죽었다. 오충사에 제향되었다. 「심양일기」는 국서를 가지고 심양에 사행한 전말과 그때의 언행(言行)의 기록이다.

(5)참판공행장(參判公行狀_李亮臣 撰); 선세강(宣世綱)의 행장인데 그의 자는 士擧, 호는 매곡(梅谷)이다. 1603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경기중군으로 재임시 영평산성 監築에 공이 커 홍주영장이 되었다. 병자호란시 안동영장으로 있으면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 허완과 광주(廣州) 쌍령전(雙嶺戰)에서 분전했으나 전사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보성 오충사, 장흥 포충사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수사공 선약해의 '水使公入瀋陽日記'가 수록되어 선약해가 청나라의 사신으로 가서 경험했던 사실을 일기로 기록하여 당시 외세에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성선씨 오세충의록>에 기록된 교지와 기타 수록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성선씨 5명의 사적외에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흥 포충사와 보성 오충사와 관련된 교지(敎書)와 부원수공 선거이를 충렬지사로 표창하여 줄것을 상계한 예조관문(禮曹關文), 참판공 선세강의 첫 제사를 맞이하여 형인 선세기가 쓴 장공시제문(葬公時祭文), 보성선씨 일문 오충사의 청액(請額)과 사액(賜額) 전말을 기록한 청액상언(請額上言), 예조회계(禮曹回啓), 계문(啓文), 관문(關文), 유소(儒疏), 대소(臺疏), 원정(原情), 치제문(致祭文), 춘추향사문(春秋享祀文)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중국(명나라)에서 온 황조인이 후손으로 황단참배를 요청하는 참반상언(參班上言), 예조회계(禮曹回啓), 한성부 참반관문(參班關文) 뒤에 첨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