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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李泰俊, 문화어: 리태준, 1904년 12월 10일 (1904년 음력 11월 4일) - ?)은 한국의 소설가이다. 아호는 상허(尙虛), 별명은 한국의 모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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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작가 이태준.jpg
작가 생애
출생 1904년 12월 10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
사망 ?
직업 작가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작가 정보
장르 소설
가족 관계
주요 작품
영향
기타 정보

목차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1904년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에서 부친 이창하, 모친 순흥 안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장기 이씨 용담파. 호는 상허, 상허당주인. 1909년 망명하는 부친을 따라 러시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으나 8월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던 중 함경북도 배기미에 정착, 서당에서 수학한다. 1912년 모친의 별세로 외조모 손에 이끌려 고향 철원 용담으로 귀향해 친척집에 탁신한다. 1915년 안협의 오촌집에 입양되었고, 그해 도로 용담으로 돌아와 오촌 이용하 댁에 부쳐 살았다. 같은 해 철원 사립봉명학교에 입학한다. 1918년 3월 동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 철원 읍내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달 후 가출하여 여러 곳 방랑하다 원산 등지에서 객줏집 사환 노릇하며 이태를 보냈다. 어차에 찾아온 외조모의 보살핌을 받고 문학서적을 탐독했다. 이 뒤 인척 아저씨를 찾아 중국 안동현까지 갔지만 헛걸음하고 경성으로 온다.[1]

1920년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응시, 합격하나 입학금 마련이 어려워 등록하지 못했다. 1921년 4월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고학생으로 비교적 우수 성적을 받았다. 어차에 학우로 상급반에 정지용, 박종화, 하급반에 박노갑이 재적했고, 스승으로 이병기가 있었다. 1924년 《휘문》 학예부장으로 활동하고 동화 〈물고기 이약이〉 등 6편을 본지 제2호에 발표했다. 6월 13일 동맹휴교의 주모자로 지적당해 5년제 과정 중 4학년 1학기에 퇴학된다. 동년 가을 휘문고보 친구 겸연만의 덕을 보아 유학길에 올랐다.[1]

등단편집

1925년 일본에서 단편소설 〈오몽녀〉를 《조산문단》, 《시대일보》에 발표, 등단했다. 1926년 4월 동경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신문, 우유 배달 등을 하는 빈곤 가운데서 나도향, 화가 김용중 및 김지원 등과 교유하고 동경에서 《반도산업》을 발행했다. 1927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뒤 신문사, 모교를 전전하여 구직 운동했지만, 취업난을 닥뜨린다. 1929년 《개벽》사에 기자로 입사, 《신생》 등의 잡지 편집에 참사하고 잡지 《어린이》에 소년물, 장편을 다수 발표했다. 9월 안희제의 사장 취임에 맞춰 《중외일보》로 자리를 옮겼고, 사회부에서 3달간 근무 후 학예부로 전임했다.[1]

작품의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 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

박태원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1943년안협(현재의 북철원군)에 낙향해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민주주의민족전선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 곳에서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2]

1956년 숙청되어 함흥으로 추방, 함흥노동자신문 교정원으로 배치되었으며, 이후 다시 함흥콘크리트블록공장의 파고철 수집 노동자로 배치되었다. 1964년 조선노동당 중앙당 문화부 창작실 전속작가로 복귀하였으나, 몇 년 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추방, 그 곳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3] 사망 시기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현재는 1970년경이 가장 유력한 사망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탈북 작가인 최진이가 이태준의 딸들이 쓴 일기를 보았다며, 이들의 가족사를 증언한 바 있다.[4]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5]

생가는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생가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6]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식솔편집

1930년 이화여전 음악과를 갓 졸업했던 이순옥과 결혼했다. 슬하에 1931년생 장녀 소명, 1932년생 장남 유백, 1934년생 차녀 소남, 1936년생 차남 유진, 1940년생 삼녀 소현이 있었다.[1]

사후편집

2012년 11월 20일에 개통된 경원선의 백마고지역이 이태준의 생가 터(철원읍 율이리 소재)와 비교적 인접해 있어, 이 역의 명칭을 이태준역으로 하자는 주장이 일각에서 있었으나, 2012년 9월 철원군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백마고지역으로 역명을 정하였다.

작품편집

단편소설편집

  • 〈오몽녀〉 (1925)
  • 복덕방
  • 〈가마귀〉
  • 〈밤길〉
  • 〈영월영감〉
  • 〈토끼 이야기〉
  • 〈달밤〉
  • 〈산월이〉
  • 〈고향〉 (1933)
  • 〈불우선생〉 (1933)
  • <패강랭> (1938)
  • 〈농군〉 (1939)
  • 〈돌다리〉 (1943)
  • 〈해방전후〉 (1946)

장편소설편집

  • 《제2의 운명》
  • 《왕자 호동》
  • 《청춘 무성》
  • 《황진이》
  • 《농토》
  • 《사상의 월야》

외부 링크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이태준 (2015년). 〈작가 연보〉. 상허학회. 《이태준 전집 1 : 달밤 외》. 소명출판. 495-498쪽. ISBN 979-11-86356-19-7. 
  2.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
  3. 월북작가 이태준, 그는 자신의 소설이 예술이기를 소망했다, 강원일보.
  4. “일제시대 최고의 문장가 이태준의 통한의 가족사”. 《KEYS》 (제7호). 2000년 11월. 2016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8월 26일에 확인함. 
  5. 《월간조선》 2000년 11월호, 최진이 <월북작가 이태준의 통곡의 가족사>
  6. 유선희 (2005년 7월 6일). “북악스카이웨이를 걸어보자!”. 한겨레. 2008년 6월 1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