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익
서익(徐益, 1542년~158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부여(扶餘),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이다.[1]
서익
徐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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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자 | 군수(君受) |
호 | 만죽(萬竹)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42년 |
출생지 | 조선 충청도 은진현 (현 충청남도 논산시) |
사망일 | 1587년 |
국적 | 조선 |
경력 |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 의주목사(義州牧使) |
본관 | 부여(扶餘) |
부친 | 서진남(徐震男) |
모친 | 광주 이씨(廣州李氏) |
배우자 | 장수 황씨(長水黃氏) |
자녀 | 서용갑(徐龍甲) 등 6남 |
생애
편집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2]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3]
병조·이조좌랑, 교리,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서천군수·안동부사·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六條方略)으로써 북방을 선무(宣撫)하였다.
1585년(선조 18)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재직 중 정여립(鄭汝立)을 비판하고, 정여립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이이(李珥)와 정철(鄭澈)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4]
저서
편집- 『만죽헌집(萬竹軒集)』
가족 관계
편집사후
편집충청도 은진(恩津)의 갈산서원(葛山書院)에 배향되었다가 임진란때 서원이 불에타 우암 송시열이 주청으로 인근 산노리 효암서원에 배향되었으나, 위차 문제가 발생하자 집안에서 로 현 육곡리 행림서원으로 재차 모시게 되었다.
각주
편집- ↑ 서익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가정43년갑자7월20일사마방목(嘉靖四十三年甲子七月二十日司馬榜目)』
- ↑ 선조실록 18권, 선조 17년 1월 14일 임진 3번째기사
- ↑ 선조실록 19권, 선조 18년 5월 28일 무술 2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