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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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성(石峴城)은 삼국 시대의 성으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는 백제의 성으로, 392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1] 이후 백제의 진무가 석현성 등 다섯 성을 되찾기 위해 관미성으로 출전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2]
위치
편집삼국사기(1145)에서는 석현성을 위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분류했다. 대동지지(19세기)에는 석현성이 곡산으로 표기되어 있다.[출처 필요]
이케우치 히로시는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있다고 추정했다.[4] 임진강과 한강 사이의 지명 중에서는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각주
편집-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진사왕〉. 《삼국사기》.
秋七月, 髙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䧟石峴等十餘城.
-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아신왕〉. 《삼국사기》.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 ↑ 김부식 (1145). 〈본기 권7 문무왕〉. 《삼국사기》.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力戰, 死之.
- ↑ 池內宏 (1951).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滿鮮史硏究》 (吉川弘文館). 上世編 第2冊.
- ↑ 김윤우 (1990). “바로 잡아야 할 인천역사③ -고대사상의 미추홀과 인천”. 《황해문화》 (5): 341-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