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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이스 해전(1340년 7월 24일)는 백년전쟁 때 벌어진 주요 해전중 하나이다. 제일란트(현재 네덜란드)의 슬로이스(에클뤼즈(프랑스어: Écluse)항에 있던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괴멸시킨 후 제해권을 장악했다.

슬로이스 해전
에드워드 전쟁의 일부
BattleofSluys.jpeg
14세기 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에 기록된 전투 세밀화.
교전국
Royal Arms of England (1340-1367).svg 잉글랜드 왕국 Blason France moderne.svg 프랑스 왕국
지휘관
Royal Arms of England (1340-1367).svg 에드워드 3세  (WIA) Blason famille Quieret de Fransu.svg 위그 키에레  
니콜라 베위셰  
병력
260척 190척
피해 규모
약 4천명 25,000명(유럽: 역사, 노만 데이비스)
많은 함선이 나포됨

목차

배경편집

1337년 선전포고 이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 of England)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손잡고, 봉신이었던 에노 백작 등의 저지대(네덜란드)제후의 군대를 고용하여 북프랑스에 침입했으나, 프랑스왕 필리프 6세는 전투를 피했고, 저지대 제후들도 전투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340년에 이르러 전쟁자금도 고갈되었기 때문에 전략을 바꿔 아르테벨데(야곱 반 아르테벨데)의 지도아래 플랑드르 백작을 추방하고 자치정부를 세운 플랑드르 도시연합과 동맹을 채결하고, 아내 필리파브뤼헤에 남겨 새로운 병사와 자금을 모으게 한후,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

한편 프랑스는 노르망디제노바 용병들로 구성된 대해군을 집결시켜, 잉글랜드 해안 및 선박을 여러차례 습격해 잉글랜드 침공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에드워드 3세는 대신과 상의하여 의회를 열어 자금을 얻고, 특별 5항(싱크 포르)등에서 가능한 한도내로 배와 병사들을 모아 플랑드르로 향했다.

전투편집

프랑스 해군은 제일란트의 에클뤼즈(슬로이스)에 집결하였고, 에드워드 3세가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 숫자는 190척에 달했다. 함대 사령관은 프랑스 해군의 제독(본래는 보겔의 세네샬)이었던 위그 키에레(Hugues Quiéret)와 육군 사령관 니콜라 베위셰(Nicolas Béhuchet; 본래는 재무담당의 법률가. 파비에는 그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라고 평했다)와 제노바의 용병선장 바르바베라(Egidio Bocanegra (Barbavera)였다.

잉글랜드 함대는 200척에 달했으나, 이것은 병사이외에도 왕비의 시녀 등 비전투원이 많이 탑승한데다가, 적지않은 수송선도 포함한 것이라 생각된다. 잉글랜드 역사서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함대는 전력상 열세라고 이야기했다.(장 프루아사르는 [그 마스트가 숲처럼 느껴질정도의 함선의 양의 대함대]로써 에드워드가 공격을 주저했다]라고 이야기했고, 제프리 니베이카도 [그 함대는 전투준비는 완벽했고, 거기에 요새와도 같이 외관이 정열되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가까이 왔다는 보고를 받자, 해전 전문가이면서 정예의 갈레선 부대를 보유한 바르바베라는 맞아 싸워 해상전투를 제안했으나, 베위셰는 이를 기각하고, 항에 닺을 내리고, 배를 봉쇄하는 것처럼 합쳐 거대한 요새로써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주:당시 해전에서는 잡다한 배들이 모였기에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력적인 우세를 고려한다면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작전이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바르바베라는 휘하의 20척 정도의 갈레선을 이끌고 출격해 잉글랜드 함대의 일부와 교전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부상을 입히고, 잉글랜드 선박 1~2척을 나포하여 전장에서 이탈하는 데 성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곧 부상에서 회복하고, 함대를 정비한 다음 24일 아침 항에 주류중이던 프랑스 함대와 대전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바람을 받으며 태양을 등지는 좋은 위치를 차지한채 한 부대는 정면에서, 또다른 부대는 측면에서 공격하게 했다. 당시 해전은 적의 함선에 뛰어들어가 빼앗는 것이 주체여서 말 그대로 백병전이었으나, 잉글랜드군 우위는 그대로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플랑드르 함대(약 50척)이 참전하면서 잉글랜드의 승리는 확정짓게 되었다.

결과편집

프랑스 함대는 거의 모두 파괴되었거나 나포되었다, 연대기 작가인 베커는 피해가 400척이 넘었다고 적고있으나 이는 과장된 숫자로 생각된다. 익사자를 포함한 인적 피해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2명의 프랑스군 지휘관은 전사했다(잡혀서 처형되었다고도 한다). 잉글랜드측은 약 4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되어있다.(모라 뒤 주르당은 베유세가 포로가 되었을때, 범죄자라는 머리에 쓰기 직전 에드워드가 승선한 토마스 호 위에서 영국왕을 상처 입혔다고 한다)

이후, 잉글랜드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잉글랜드로부터 병사, 물자, 자금의 수송이 원활해졌기 대문에 본격적인 침공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에 대한 최초의 대승리였고, 그때까지 프랑스 왕도 여러나라의 군주, 제후들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의 주장을 가볍게 보고 있었으나, 이 승리로 인해 현실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프랑스측에서는 패전의 원인은 바르바베라가 너무 일찍 전장에서 이탈한 것과, 그외 노르망디의 함선에 대해서도 프루아사르 등에 의하면 [프랑스인은 이들 노르망디인을 크게 존중하지 않았다. 어떤 사름은 [이런 해적이 죽더라도 우리들은 아무것도 잃을것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종에게는 이런 진흙탕밖에는 없다. 프랑스 왕은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200,000 프랑을 절약했다. 그들의 4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지 않고 없앨 수 있었으며, 바다가 그들의 해적행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기세가 올랐던 잉글랜드 군의 공세는 성공하지 않고, 같은해 양국은 휴전조약을 맺었으나, 이것은 새로운 전투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기에 1341년 브르타뉴 계승전쟁, 데이비드 2세의 스코틀랜드로의 귀국에 의해 본격적인 장기 전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프랑스왕은 새로운 제독으로 그의 종형제 루이 데스파뉴(루이스 데 라 세르다)를 임명하여 새로운 해전에 대비했다. 잉글랜드측은 승리의 원동력이 해군력의 강약에 있음을 알아차리고, 함대를 정비하고 브르타뉴에 브레스트 등 거점을 쌓게 되었다.

참조 문헌편집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